< -- 5. 전진기지 -- > * 57화 *
바츠는 그의 이름이 불러지기 전까지 사내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2년이 넘은 기억은 너무나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나며 느꼈던 황홀함도 전부 잊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와야죠.”
“위법 아닌가?”
“아무렴요.”
사내는 문 앞에 그대로 서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굳은 얼굴과 무뚝뚝한 목소리가 방안에 묘한 긴장감을 흐르게 만들었다. 칼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칼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향한 대꾸가 매우 딱딱했다.
바츠는 마른 침을 삼켰다. 사내의 단단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에, 그의 검이 이미 턱 밑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검으로 손을 가져다댔다. 방안의 긴장감이 차츰 고조되고, 짧은 적막이 흘렀다. 손끝에 닿은 차가운 손잡이가 기분을 야릇하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검을 뽑게 되는 곳이 오늘 그것도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에게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차하면 그를 향해 달려들어야 한다는 것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바츠의 생각대로 특별한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칼이 그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긴장감으로 고조되던 짧은 적막을 한순간에 날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고맙네.”
칼의 목소리에 그를 향한 애정이 묻어났다. 조금 전 분위기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웃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문 앞에 선 사내를 향해 양팔을 벌리며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사내는 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더 밝은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칼을 힘껏 끌어안았다. 자리에서 겨우 상체만 세우고 있던 칼을 안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반가움이 전해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괜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의 철없는 장난이었다. 속았다는 사실에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약간의 서운함도 있었다. 하지만 절로 말려 올라가는 입 꼬리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아, 이 친구를 소개하지. 우리의 미래네.”
칼이 우두커니 서 있던 바츠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스타드, 이제 저 아이가 나를 대신해서 이곳에 앉아 있게 될 것이네.”
스타드가 바츠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정중하지는 않았지만 반가움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바츠 역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가 곧장 칼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무안했지만 딱히 불평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오랜만으로 보이는 그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레벨6으로 가시는 겁니까?”
스타드의 물음에 칼이 고개를 저었다.
“먼 길을 떠나야지. 마지막까지 긍지를 가지고 말이야. 가족들은 약속을 받았네. 손주 녀석들까지 말이야.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칼이 말을 마치자 방안에 침묵이 맴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행복한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동시에 스타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당사자인 칼의 미소가 더 또렷해지는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라파엘’, 그런 표정하지 말게.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건 그들을 전부 태워버리기 위함이 아닌가? 하지만 보게. 지금 이곳에 우리만 있는가? 나는 실패한 것이네. 오히려 그들에게 내가 고마워해야지. 성대한 대접을 해준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레벨1부터 5에 이르기까지 영웅으로 남게 될 것이네. 내 아이들이 자랑스럽도록 말이야.”
“...칼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그저 자신들의...”
“알고 있네.”
칼이 스타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말하고자 하는 욕심이 많아보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스타드의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지금 자네 아이가 몇 살이지?”
“10살이 되었겠군요.”
“아내와 아이가 레벨4에 있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스타드는 칼의 질문에 약간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충분합니다.”
“나도 마찬가지라네. 내 오랜 친구여, 우리의 여행은 긴 시간이었어. 정말 긴 시간이었지. 이제 나는 좀 쉬고 싶네. 나는 너무 늙었어. 혼자서 오줌 싸러 가는 것조차 벅차단 말이네. 내게 그 정도 여유를 가질 자격은 있지 않는가?”
칼이 얼굴에는 장난기 섞인 허탈한 미소를 그리며, 애원에 가까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운해 하지 말게. 자네는 내가 수십 년 동안 지켜본 헌터 중 최고였어. 그들을 혼자서 맞설 수 있는 헌터는 자네뿐이었다고. 내게 희망을 보여주어서 너무 고맙네. 언젠가는 모두 밖으로 나올 수 있을 거야. 자네보다 더 나은 녀석들이 나올 테니까. 안 그런가? 하지만 내게는 그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네.”
“정말 그렇게 믿으십니까? 아직...”
칼이 이번에도 스타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냥 그렇다고 해주게. 마지막 선물로 말이야. 내게 자네의 친절함을 보여주게.”
“그렇습니다...”
칼이 스타드의 마지못한 대답을 듣고는 몸을 뒤로 기울였다. 상체를 오랫동안 세우고 있기에는 그의 나이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스타드는 그 사실을 모르는지 칼의 한쪽 손을 낚아채며 그를 붙잡았다. 그가 편히 눕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련이 잔뜩 묻어있는 그의 손길에는 강제성이 전혀 없었다. 칼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몸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밤이 되니 좀 춥군. 하긴 항상 그랬지. 너무 추웠어.”
“엄지라도 드릴까요?”
스타드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장난기가 묻어났다. 칼이 기분 좋은 실소로 받았다.
바츠는 눈을 감으며 웃는 칼의 얼굴을 보자, 아르크에서 처음으로 다른 생명체를 보았을 때처럼 소름이 끼쳤다.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위축되는 그런 막강한 위화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줄기가 오싹한 그런 섬뜩함도 아니었다. 부드러우면서 저 밑으로 가라앉는 묘한 기운이었다.
“됐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걸 절대 놓치지 않죠. 틀렸다고 하면 오히려 더 집착하며 자신이 옳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스타드가 남은 손으로 벨트에 달린 주머니에서 기어이 혐오스런 물건을 꺼내놓았다. 옅은 보랏빛을 띄는 쭈글쭈글한 피부와 날카로운 발톱. 아르크의 부자들이 고액을 지불해서라도 얻고 싶어 하는 물건이다. 사령관의 숨통을 백년 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 영약이기도 하다.
“이걸 저쪽 서랍에 가져다 놓아주겠나?”
칼은 스타드가 헤러티커의 엄지를 꺼내놓자 그것을 받아 바츠에게로 내밀었다. 바츠는 선뜻 그것을 받아 테라치가 다녀갔던 방으로 향했다. 그가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방은 한 사람이 쓰기에 딱 맞았다. 하지만 4단 철제 파일박스가 벽을 따라 죽 늘어서 있어서, 생활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곳이었다. 중간 중간 캐비닛과 락커(Locker)도 있었다. 아마도 칼이 창고로 쓰던 곳인 듯 했다.
바츠는 바로 앞으로 보이는 파일박스부터 차례로 열어보았다. 테라치가 보여주었던 패치 형 식량부터 처음 보는 물건들이 정확히 분류가 된 채, 잘 정리되어 있었다. 칼이 말한 서랍은 두 번째 파일박스의 세 번째 서랍이었다.
서랍은 이미 엄청난 양의 헤러티커 엄지들로 가득했다. 적어도 50여개는 되어보였다. 이곳에서 헤러티커의 엄지는 매우 흔한 물건처럼 느껴졌다. 아르크의 부자들에게 차라리 전진기지로 한 번 나오는 것은 어떤지 제안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이렇게 손쉽게 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만나 보셨습니까?”
칼과 스타드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려왔다. 애초에 좁은 집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가능할리가 없었다. 칼이 너무 늙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누굴 말인가? 그녀의 아들? 물론이네. 상상 이상이더군. 그녀가 걱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네.”
“부사령관이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뭘까요?”
스타드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변했다.
“자네가 말했지 않는가? 사람은 자신이 믿는 걸 놓지 않으려고 한다고. 그 때문이겠지. 겁이 났을 거네. 그들의 세력은 점점 막강해지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 아이를 헌터로 육성하지 않았겠지. 그가 강력히 추천해서 가능했다고 알고 있네.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까?”
“그녀는 원치 않았으니 탐탁지 않겠죠. 부사령관을 저주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 아이 말이야. 그 아이가 사실을 알았을 때 뭐라고 할까?”
“글쎄요...크루엘라보다도 무서울지 모르겠군요.”
스타드의 목소리가 상당히 어둡게 변했다. 칼이 바로 말을 건네지 않았더라면, 엿듣고 있던 바츠의 가슴이 먹먹해졌을 지도 모를 만큼 무거웠다.
“자네보다도 냉정한 것 같더군.”
“제게는 최소한의 감성은 남아 있으니까요.”
스타드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그래, 그에게는 눈물이 없어 보였네. 아르크에서 괴물을 만들어냈어...”
“부사령관은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겁니다.”
스타드가 마치 명령을 하듯 단호한 목소리로 칼에게 말했다.
“그렇겠지. 아르크에는 이미 자유가 스며들었으니까. 크게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바츠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읊조리는 칼의 목소리를 듣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이롤로가 처음 결석했던 그 날처럼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당장이라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만큼 초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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