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58화 (58/268)

< --   5. 전진기지   -- >         * 58화 *

벌써 3년 전 일이었다. 평소와 전혀 다른 이롤로의 모습이 불행을 암시했다. 하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갑작스런 이별은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할 만큼 음흉했다. 쓸모없는 걱정을 하는 데나 정신이 팔리게 만들어, 때늦은 후회만 남겨주었다. 이롤로는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쓸쓸히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바츠는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그때의 비참한 이별이, 가슴 한켠 어딘가에 자괴감으로 남아있었다. 그렇다고 지금이 그 당시만큼 속이 답답하거나 가슴이 먹먹한 것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지난 기억 때문에 그런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뿐이었다.

미련이 남은 과거가 대게 그렇다. 애써 떠올리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기억이 되어버리면, 무감각하게 변해버린 인간에게 혐오감과 함께 나타나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는 한다. 기억이 가진 짓궂은 심술이지만 정확하게는 냉정한 시간이 가진 잔인함이다.

시간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차가운 기계다. 수리도 할 수 없고,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기계. 오직 맨 처음 누군가가 정해준 그대로 흘러가기만 한다. 아무런 의심도 없고 조금의 융통성도 없다.

“말이 많았군. 이제 그만 해야겠네.”

칼이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신음소리가 함께였다. 느릿한 인기척이 주전자를 가지러 갈 때처럼 그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바츠는 약속에 늦은 것처럼 황급히 방에서 뛰쳐나갔다. 호흡이 가빠질 만큼 빠르게 달린 것은 아니었지만, 초조하던 가슴이 울렁거리며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허겁지겁 음식을 집어먹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매스꺼웠다. 물론 그 불안이 그때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지금도 확신이 서진 않았다. 둘은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그저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또 한 번 그날과 같은 후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불길함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불길함은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칼은 스타드에게 한쪽 팔을 의지한 채 출입문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 눈에도 그가 작별을 고하는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타드는 그가 같은 거리를 가더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만, 혼자서 걷지 못할 만큼 유약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그의 팔을 꼭 붙들고 있는 손이, 그를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잠시 잊고 있었군.”

칼이 바츠가 달려 나오는 소리를 듣고는 걸음을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훨씬 젊은 스타드가 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의 움직임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스타드는 바츠의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이를 지켜보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오로지 칼의 느릿한 거동에만 관심을 쏟았다.

“나이가 들면 항상 이게 문제야. 생각은 많아지지만 곧잘 잃어버리고는 하지. 누군가는 모든 것이 늙어버려 기능을 상실했다는 증거라고 하더군. 하지만 지쳤다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 테지. 자, 받게. 이제부터는 자네가 이곳에 집사네.”

칼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아주 긴 시간동안 자신의 손목에 눌어붙어있던 낡은 PMP를 떼어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손 안에서 한뺨 크기의 녹색 화면이 더욱 밝아지며 또렷해졌는데, 얼핏 보았을 때에는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자잘한 실금들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살짝 손끝을 가져다대기만 해도 산산조각날 것만 같을 정도로 손상이 심했다. 칼의 호언이 거짓말이었다고 느껴질 만큼 너절한 모습이었다. 당장 작동을 멈춘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의 관심은 그것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아르크의 집은 그보다도 훨씬 낡아있었지만 불평한 적이 없었다. 그가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의 손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고 그의 허리춤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바츠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할 만큼 특별한 물건이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가 차를 내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낯설면서도 매우 익숙한 모순된 물건이었다.

스타드는 그때까지도 바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코앞에서 소리를 질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만큼 귀가 어두운 모양이었다. 조금 전 나직한 목소리로 칼과 대화를 이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무신경했다. 그는 바츠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어서 받게.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주어야 할 것은 이미 모두 말해주었네. 나머지는 전부 이 안에 들어있네. 아마 며칠은 이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겠지. 하지만 보게. 나도 이렇게 무사히 해왔지 않는가?”

칼이 바츠가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채근했다. 30cm 높이의 절벽에서 작은 모험을 앞둔 아이에게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다독이는 말투였다. 하지만 바츠는 이번에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의 격려가 부족했던 까닭은 아니었다. 30cm 높이의 절벽은 그의 격려가 없어도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쉬웠다. 그런데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허리춤에 있는 물건을 바라보자, 그도 한 때는 간절한 꿈을 꾸었던 소년이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기 때문이었다.

카니지 블레이드는 아르크에서 오직 헌터들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었다. 벨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일컬어질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하늘 저 멀리에서 날아온 운석을 지상의 헌터들이 주워온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썩 신뢰가 가는 말은 아니었다. 10만광년 이상에서 날아온 운석이 지표면에 떨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안에 피니움이라고 불리는 금속이 함유되어있을 확률은? 결코 확신을 가지고 믿을 수 있을 만한 사실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칼의 허리춤에 있는 카니지 블레이드가 굉장히 오래된 물건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완전히 헤진 손잡이를 보면 틀림없었다. 빛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광택이 흘렀고, 보풀이 일어난 소매처럼 거칠게 변해있었다. 그의 손과 빈번한 마찰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바츠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검을 휘두르게 될 일이 과연 몇 번이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한쪽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었다. 뒤쪽에는 침대가 여럿 놓여있는 어둡고 큼지막한 방이 있었고, 구석에는 몸을 물로 씻을 수 있는 욕실도 보였다. 전진기지라고는 불리지만 일반 가정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그냥 사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칼의 검은 적어도 무의미하지 않을 만큼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혼란스러워 말게. 때때로 저것을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네. 항상 작동시켜 놓아도 좋지만, 지쳤을 때 듣는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된다네. 경험이니 믿어도 좋네.”

칼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가까운 테이블 위로,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PMP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값 비싼 물건을 내려놓는 것처럼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리고는 남은 손으로 벽난로 한쪽을 향해 가리켰는데, 바츠는 그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쪽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잠깐만요. 왜 그걸 지금 제게 주시는 건가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 모른 척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가? 마음대로 하게나. 하지만 그런다고 진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네.”

바츠는 자신이 허겁지겁 뛰쳐나온 이유를 칼이 이미 눈치 채고 있다는 사실로 놀라웠다. 그가 꼭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은 마저 놀랄 겨를도 없이 무작정 떼를 쓰며 고집이나 부리도록 만들었다. 눈앞이 깜깜해진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막막함 밀려들었다.

“난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요. 이제 여기에 막 도착했잖아요. 그런데 떠나려고요? 말도 안돼요.”

“그런가?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준비는 아르크에서 전부 해주었을 테니 말이네. 그곳에서의 훈련은 정말 끔찍하지만 생각보다 아주 훌륭한 것들이네. 내가 자네에게 이 이상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간섭이 되고 말겠지. 내가 했던 말들을 기억하는가?”

바츠는 헌터와 주민들을 다르게 대하고, 이곳에 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말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내가 괜한 질문을 하는군. 자네는 젊으니까 충분히 기억하고 있겠지. 고작 두 가지였으니 말이야.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은 말게. 자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랬네. 이해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당황스럽고, 정신은 없고...그러나 그것이 우리들 아닌가? 우리는 항상 외로움과 함께 한다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지. 오직 자신을 믿고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지. 외로움은 우릴 더욱더 강하게 만드네. 그것이 우리의 자존심 아닌가? 특히나 우리 같은 사람은 더더욱 그렇지. 우린 외로움에서 태어났지 않는가?”

칼이 두 눈을 번뜩이는 것으로 말을 끝내고는 자신에게서 한시도 손을 떼지 못하던 스타드의 손길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그리고 혼자서 문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곳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걸려있던 낡고 헤진 검은색 망토와 방독면을 차례로 몸에 둘렀다. 그가 입고 있던 옷만큼 색이 바란 것들이었다. 멍한 바츠의 얼굴은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라파엘’, 부탁하네.”

칼은 문을 마주보고 선 채로 스타드를 향해 말했다. 스타드는 바츠의 발소리는 듣지 못해도, 칼의 힘없고 작은 목소리만큼은 용케 알아들었다. 방독면 때문에 목소리가 뭉개졌는데도 되묻지 않았다. 벽난로 옆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사각형 상자가 놓여있는 선반 앞에 섰다.

사각형 상자는 그 모습만으로도 해괴했다. 오른쪽 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손잡이가 달려있었고, 위에는 무엇인가를 올려놓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뒤쪽에서부터 연결된, 사람 머리통 크기의 커다란 나팔관이 눈에 띄었다.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기 위해 입 주위에 손을 동그랗게 모아서 가져다댄 모습을 연상케 했다.

스타드는 그 앞에서 근처에 책처럼 꽂혀있던, 납작하고 둥근 검은색 원반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사각형 상자 위에 올린 후, 처음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바늘처럼 생긴 물건을 원반 위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원반이 빙글빙글 돌며 바늘에 긁히는 소음을 몇 차례 일으키더니 이내 나팔모양의 관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Twas blind, but now I see.

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And grace my fears relieved...’

============================ 작품 후기 ============================

에...인사를 드리기에는 너무 많이 시간이 지나서...좀 뻘쭘하네요. 아마 많은 분들이 당선에 대해서 의아해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도 의아하니까요; 정말 기대를 할 수 없었거든요. 중간에 해볼 만 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설마였죠. 게다가 제 작품은 독창성이나 대중성에서 많이 떨어지니까요; 발표 후에는 잠깐이었지만 '얘 불쌍하니까 기회나 한 번 줘 보자'라는 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ㅋ 쓸데없는 소리가 또 길어지네요; 사실 당선 후에 의욕적으로 바로 바로 계속 연재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축분이 많으면 좋겠다고 '그분!' 께서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아마 개인차겠지만 저에게 비축분을 쌓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의욕이 잘 안 생기거든요. 제가 게으른 거겠지만요. 어쨌든 이번화까지 70kb 정도 밖에 못 썼습니다...비밀입니다...'그분'이 알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물론 결말까지 스토리 자체는 잡혀있습니다. 그마나 다행인 일이죠. 이렇게 갑자기 뛰쳐나온 건 그저 뭔가 뻐근한 손가락을 이기기 힘들어서 입니다! 아직 정식 연재 날짜가 제대로 정해져 있지 않거든요. 빨라도 이달 말이나 내달 초에나 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연재 방식은 프리미엄이 아니라 노블레스가 될 것이고. 프리미엄은 사실...개인적으로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쪽이 더 작품 성격을 고려했을 때 맞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거기는 진짜 작가분들이나 가시는 곳 같아서...욕도 두 배로 먹을 것 같고;...본문보다 후기가 더 길죠? 그래서 여기까지...아! 문고리 작가님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예상과 달라서 살짝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작가님하고 이야기 많이 하고 싶었는데...소심한 저는 말도 못 붙였습니다! 아...소설을 써야 하는데 일기를 쓰고 있네요...어쨌든 이렇게 이 이야기를 끝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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