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59화 (59/268)

< --   5. 전진기지   -- >         * 59화 *

“축음기라는 것이네. 물론 한 번도 본 적이 없겠지? 이곳에서 자네를 위로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라네. 난 이 노래를 무려 20년 넘게 들었네. 지금은 이 노래뿐이지만 언젠가 헌터들이 더 많은 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네. 그럴 것이라고 바라네. 그러니 소중히 다뤄주게.”

축음기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칼이 당당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테라치가 떠날 때처럼 의연한 모습이었다. 바츠는 둘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겹쳐 보여 소름이 끼쳤다. 둘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굴었다.

“헤러티커들은 소음에 민감하다고요.”

바츠는 칼의 뒤통수에 대고 서둘러 말했다. 조금 전과 비교하면 많이 진정된 목소리였다. 더 이상 그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까닭이었다.

“그렇지. 후각은 퇴화되었고 시각도 많이 떨어지지만 청각만큼은 대단하지. 너무 걱정하지 말게. 여기서 이 정도 소리는 밖에까지 잘 들리지 않네. 오히려 헌터들이 가진 감각에 더 놀라게 될 것이네.”

칼이 끝까지 친절하게 대답해주며 한쪽 발을 문턱 너머로 옮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타드였다. 스타드가 그를 놓칠세라 한마디 내뱉었다. 바츠처럼 다급하지 않고, 입구에 내려앉아 있는 어둠만큼 잔잔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지옥만큼 고통스러울 겁니다.”

칼이 걸음을 멈추며 약간의 침묵을 만들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숨이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긴장감이 흐르기에는 충분했다.

“지옥이 무엇인지 아는가? 사람은 말이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불편하다면 외면하고 싶어 하는 법이라네. 누구라도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길 바라지 않지. 그게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것이네. 내게도 그 자존심이 있네. 헌터로서의 자존심과는 다른 것이지. ‘라파엘’, 내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아는가? 집사가 되기 위한 1년여 간의 시간 중, 완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썩은 음식을 먹으며 버텨야 할 때였네. 구토와 설사가 반복되고 복통이 멎었던 적이 없었지. 정말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었을 것이네. 하지만 난 이렇게 살아서 아주 오랫동안 삶을 누렸네. 그것도 자네 같은 위대한 헌터 곁에서 말이야. 그러니 내게서 마지막 용기를 빼앗으려고 하지 말아주게.”

칼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그는 이 대답을 끝으로 문턱을 완전히 넘었다. 문이 그의 등 뒤에서 천천히 닫혔다. 그의 발소리가 문 밖 복도에 울렸고, 뒤이어 두 번의 문을 여닫는 소음도 들렸다. 정신을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기 힘들만큼 작은 소리였지만, 방안에 침묵은 그것을 어렵지 않게 실어다 날랐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스타드는 그가 떠난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멍한 눈이었고,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눈을 깜빡이는 횟수마저도 정상적인 사람에 비해서 두 배는 적었다. 바츠도 마찬가지였다. 얼떨떨한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노력하느라 한참동안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야라’. 그것이 분명했다.

바츠는 언제 들었던 것인지 가물가물했다. 일반학교에서였는지, 미사훈련소였는지 기억이 불분명했다. 그러나 헌터들이 자신의 마지막을 스스로 기리기 위해서 칼 한 자루만을 가지고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사실 ‘지야라’는 말이 여행이지 고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걷는 일이다. 단순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일이라면 그들의 용기를 ‘하지’라 부르며 칭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적과 싸우기 위해서 걷는다. 마지막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아르크에 대한 위협을 단 하나라도 더 줄이겠다는 의지였다. 그 시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일찍 시작할 수도 있고, 거동이 불편할 만큼 늙은 나이에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헌터 본인의 몫이었다. 그 때가 되면 저절로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칼은 분명 그때가 지금이라고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모든 헌터가 ‘지야라’를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에 달린 만큼 끝내 하지 않고 달아나는 헌터도 종종 있었다.

“전 이제 무엇을 해야 하죠?”

바츠는 몸을 돌려 스타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는 네가 집사다. 내게 허락을 요구하지 마라. 이곳의 주인은 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칼은 저더러 이곳의 신이 되라고 했어요.”

“신?”

“사람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그런 존재요.”

“그래. 그럼 사람들은 너를 믿고, 너를 위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겠지. 칼은 항상 저 자리에 앉아있었다. 잠도 저곳에서만 잤지.”

바츠는 스타드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벽난로 앞에 놓여 있는 독특한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칼을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몸을 숨기고 앉아있던 커다랗고 둥근 의자였다. 왠지 지금도 숨어있을 것만 같아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제가 칼처럼 하면 된다는 건가요? 이곳에 오는 헌터들을 지키며 보호해주고, 돌보면 되는 건가요?”

“그래, 불안해하지 마라. 칼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이 네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겠지. 다친 상처는 치료해주고, 다시 지상으로 나갈 수 있게 준비해주고,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해주고.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스타드가 말을 끊고 벽난로 앞 의자로 가서 앉았다. 칼이 앉아있었던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칼이 바츠에게 권했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곳에 몸을 편히 기대며 잠시 기다렸다. 바츠는 그가 기다리는 동안, 칼이 앉아있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순간적으로 팔과 허리가 긴장할 정도로, 몸이 쑥 꺼지는 듯한 기분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애써 태연하게 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헌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헌터들은 모두 수다쟁이거든. 그들의 공허함을 들어주는 거야. 그리고 너는 그들이 공허함을 늘어놓는 동안 결코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한다.”

스타드는 기껏 바츠를 기다려놓고, 시선은 벽난로 안쪽에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왜죠?”

“그들의 짙은 공허함에 네가 감염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 우리는 외로운 존재들이지만 그 깊이는 분명 다르다. 절대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지. 간혹 헌터들 중에는 그 선을 넘은 자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거야. 누군가의 정신을 집어삼킬 만큼 치명적이지. 그들은 텅 비어 있는 껍데기들이다. 나는 그런 자들과 절대 함께 하지 않는다. 같이 머물지도 않지. 그들을 가까이에서 상대하는 건 오직 집사들뿐이다.”

“그게 무슨 말이죠?”

바츠의 물음에 스타드가 처음으로 바츠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은 미친 자들이라는 말이다.”

바츠는 스타드가 겁을 주기 위해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가 문 앞에 서서 칼을 마주보고 있었을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그때처럼 느닷없이 웃으며 즐거워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굳은 얼굴과 강렬한 눈빛이 매우 진지했다.

“그래서 집사들은 지상에서 이렇게도 불린다. 신부(Father)라고 말이야.”

바츠는 스타드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먼 쪽 천장을 향해 돌렸다. 천장은 오래돼 낡아있었고, 군데군데 알 수 없는 흠집들이 보였다. 매끈한 얼굴에 손톱자국이 생긴 것처럼 좁고 깊숙한 것들이었다. 시선을 옮겨 바닥을 살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너저분하게 늘어놓아있는 수많은 종이들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바닥에도 그와 비슷한 흔적들이 생채기처럼 제법 많이 보였다. 게다가 그 위를 덮고 있는 종이들 중에는 반듯하게 잘린 것들도 있었다.

바츠는 스타드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느 틈에 잠이 들어있었다. 몸은 완전히 늘어졌고, 눈은 자연스럽게 감겨 있었다. 그의 금속 빛 머리카락이 그가 숨을 쉴 때마다 살랑거렸다. 숨소리는 들리지는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처럼 조용했다. 집안에는 오직 아까 틀어놓은 축음기만 혼자서 떠들었다.

‘...He will my shield and portion be, As long as life endures.

Yes, when this flesh and heart shall fail, And mortal life shall cease.

I shall possess, within the veil,

The earth shall soon dissolve like snow...’

다음날 바츠가 일어났을 때, 스타드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말도 없이 떠났다. 바츠는 그가 떠나는 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곳에서 편히 잠들 수 있었다는 사실로 기분이 묘했다. 바로 옆 테라치의 집도 아니었고 아델리나나 버니에투와의 집도 아니었는데 전혀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혼자가 되었는데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그리 어려운 생활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둘러볼 때도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침실의 더러운 깔개와 담요도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았고, 불안하게 깜빡이는 욕실과 창고의 조명도 무덤덤했다. 지하에 반쯤 썩은 식재료들을 발견했을 때에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불필요한 긴장감으로 주변을 경계하거나 존재하지도 않는 눈치 역시 보지 않았다. 약간의 어색함이 있기는 했지만 큰 지장이 없었다. 자기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는 엄숙한 음악 때문인 것 같았다. 칼이 두고 간 PMP를 들여다볼 때는 아르크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칼이 두고 간 PMP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전진기지에 소속되어 있는 헌터들의 프로필이나 일리트시에 대한 상세한 통계도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맵과 간단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 기능은 매우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음성까지도 전송이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그간에 행적들이 일기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냥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매우 큰 도움이었다. 아주 정교한 지침서 같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기능도 몇 가지 있었다. 아무리 조작을 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심지어 오류 메시지가 출력되기까지 했다.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마음에 의욕이 앞섰지만, 가뜩이나 오래된 물건이 고장이라도 날지 모른다는 우려로 심하게 윽박지르지는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츠는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사실 시간에 대한 개념을 놓아버린 건 이미 어제부터 시작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잠들기 전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아르크를 떠나온 이후, 시간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 기억을 아무리 되뇌어도 소용없었다. 꼭 또 다른 나르의 방에 와있는 것 같아 속이 다 울렁거렸다.

아르크에서는 낮과 밤을 조명의 밝기를 통해 조절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시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세상은 또렷하게 색을 구분할 수 있었지만 하늘은 어두웠다. 정확히는 회색빛으로 어둑어둑했다.

아르크에는 그런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색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 낮에 포함되는 시간이었고, 색을 또렷하게 구분할 수 없지만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정도라면 새벽이나 저녁에 포함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색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야 밤이라 부를 수 있었데, 그때 본 세상은 그 어디에도 포함이 되지 않았다. 하늘은 새벽이나 저녁의 시간이었는데,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낮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의 것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신기한 광경이었다. 지상의 시간은 아르크와 많이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워낙 정신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착각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도 들었다.

바츠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눈으로 확인해 보면 좀 더 정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문 앞으로 향하며 아르크의 눈을 조심스럽게 왼쪽 손목에 착용했다. 그러자 아르크의 눈이 족쇄처럼 손목을 조여 왔다.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이 나왔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신체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착 달라붙는 느낌에 놀랐을 뿐이었다. 매우 찝찝한 기분이었다. 떨어뜨릴 염려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테이블 위에 다시 내려놓았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츠가 찝찝한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며 문 앞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미처 망토와 방독면을 착용하기도 전에 문이 제멋대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몸이 굳어졌을 만큼 화들짝 놀랐다. 거친 손길로 소란스럽게 열렸더라면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섰을 텐데, 슬그머니 조심스럽게 열리는 모습은 되레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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