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60화 (60/268)

< --   5. 전진기지   -- >         * 60화 *

바츠는 뻣뻣한 몸을 잘 통제해서 빠르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문이 완전히 열리길 기다리며 칼끝을 문 쪽으로 겨눴다. 서서히 문 뒤로 들어나는 검은 그림자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지만 침착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오금이 짜릿짜릿하게 자꾸만 꼬집으며 당장이라도 달려들라고 재촉했다. 마음을 냉정하게 가다듬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성급한 판단으로 실수를 야기할 수 없었다. 정체를 확인하고 나서도 늦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든지 문과 함께 무엇이든 통째로 베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림자는 바츠보다도 훨씬 놀란 것처럼 보였다. 칼끝을 마주하자 굵고 걸쭉한 목소리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가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바츠는 정말로 그의 가슴팍에 칼날을 꽂아 넣었을지도 몰랐다.

“누구...”

“새, 새로운 집사시죠?”

바츠의 밋밋한 물음에 그가 자신의 방독면을 벗으며 되물었다. 그도 어지간히 놀랐는지, 방독면을 벗기 위한 손길이 허공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일리트시 시(市)의 시장입니다. 이쪽은 제 아들이고요.”

그는 제법 많이 마른 체구의 사내였다. 아델리나보다도 어깨가 더 좁아보였다. 다행히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많이 흉하지는 않았지만, 테라치나 스타드 정도의 체구였다면 아사 직전에 몸으로 보였을 것이다.

바츠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그의 얼굴과 그가 소개하는 그의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4, 5살 정도로 보였다. 마찬가지로 크게 놀랐는지, 시장의 등 뒤에 숨은 채 그의 허벅지를 꼭 붙들고 있었다.

“집사님에게는 이미 들었습니다. 칼 말입니다. 며칠 전부터 새로운 집사가 올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을 하셨죠. 그런데...생각보다 어리...아니, 젊으시군요.”

시장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으며 어색한 말투를 이어갔다. 특히 불안한 눈빛으로 바츠를 위 아래로 살피며 말할 때 더욱 그랬다. 말하는 것이 서툴러 보이지는 않았는데, 딱히 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누구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검을 거두며 좀 더 편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서둘지 않고 느린 동작으로, 경계를 완전히 푼 것은 아니라는 말을 대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저 호의일 뿐이라고 행동으로 말했다. 그의 불안한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알 수 없는 불신으로 가득했다. 칼날을 앞에 둔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시선은 신뢰하기 어려웠다. 물론 그가 훨씬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적어도 마흔 살은 족히 되어보였다.

“일리트시라면...저쪽에 있는 마을 말씀이신가요?”

“네...정확히는 집사...님의 마을이죠.”

그가 대답하며 아이의 방독면도 벗겨보였다. 아이의 크고 동그란 눈이 호기심 반 두려운 반으로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가 바츠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읽은 모양이었다.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최대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바츠는 그제야 경계를 풀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행동했다. 왼쪽 어깨를 벽에 슬며시 기대며 여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느끼기에도 몸은 여전히 뻣뻣했다. 시장의 눈에도 결코 편안해보일 리가 없었다. 시선에 의아한 빛을 띄는 걸 보면 확실했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괜히 분위기만 더 어색해질 것이 뻔했다.

“그...북쪽에 있는 기지국을...수리해야 합니다.”

시장이 자신의 아이를 앞으로 당기더니, 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대답했다. 겁을 먹은 자신의 아이를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츠를 살피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이를 보면 그의 위로는 그다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도 분명 그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바츠를 외면하는 이유는 조금 무안한 분위기를 본인 스스로 이겨내기 위한 행동인 듯 했다.

“기지국이요?”

“네. 저희는 그곳을 EN1이라고 부릅니다. 아르크의 눈을 사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곳이죠.”

“헤러티커라도 있는 건가요?”

시장이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입니다. 아이기스 녀석들일 겁니다. 가끔씩 녀석들이 곤란하게 만들고 있죠.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사실 기지국은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아르크의 보호를 받는 대가 중 하나일 뿐이죠. 기지국을 관리하는 군인들에게 협조하는 것 말이죠. 그런데 한동안 녀석들이 나타나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부쩍 다시 나타나고 있어요. 2, 3년 사이에 말이죠.”

“그런데 왜 제게 온 거죠? 군인들과 엔지니어들이 시(市)에 있을 텐데요?”

“물론입니다. 항시 서너 명의 군인과 10여명의 엔지니어들이 있죠. 그런데 군인들이 헌터가 함께 가지 않는다면 가지 않겠다고 하고 있어요. 군인들이 가지 않으면 엔지니어들은 당연히 가지 않습니다. 아르크에서 기지국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일 뿐이죠.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요. 물론 헌터들도, 집사...님도 불편하겠죠. 아르크의 눈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헌터들에게 불편함을 끼쳤다는 걸 아르크에서 알면 우린 정말 곤란하게 될 겁니다.”

“군인들이 왜 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시장이 멋쩍게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헤러티커였다면 이해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 헤러티커는 분명 아니었어요. 주민 중에 근처를 다녀온 사람이 있었거든요. 헤러티커가 있었다면 반드시 헌터가 함께 가야 하죠. 그들이 게으른 것일지도 모르죠. 어쨌든 현재 일리트시에는 헌터가 없습니다. 다들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겠죠. 물론 아르크의 눈을 가지고 계신 집사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아르크의 눈은 근처 헌터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죠?”

“물론이죠. 그래서 제게 찾아오신 거군요.”

바츠는 아르크의 눈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새로운 사실에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그리고 시장의 불신에 찬 시선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다시 불안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약간은 못마땅한 것처럼도 보였다. 때마침 시장의 아들이 앞으로 몸을 돌려세우며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긴장된 분위기가 또 한 번 연출되었을지도 모를 만큼 어색했다. 물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사님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잖아요!”

시장이 아이의 입에 서둘러 손을 가져다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시장은 황급히 아이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겨 숨기는데 급급했다. 조금 전, 아이를 애써 자신의 앞에 내놓으려고 했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바츠는 시장이 저렇게까지 난색을 표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태도는 마치 아이가 무례한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내비쳤던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하면 아이의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겁을 먹은 것처럼 말했다. 아랫입술이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절대 기분 나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바츠는 시장을 안심시킨 후에, 그의 등 뒤에서 한쪽 눈만 내놓고 눈치를 살피는 아이를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맞아.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 걱정하지 마.”

바츠는 칼이 하고 떠난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아르크의 눈에는 칼이 마을을 위해 했던, 많은 헌신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군인을 대신해서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마을의 경비를 선 적도 있었다.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시장은 앞장서서 바츠를 밖으로 안내했다. 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뒷모습이 바츠의 가슴을 괜히 뭉클하게 만들었다. 바츠는 방독면의 좁고 불편한 시야로 비춰지는 그 둘의 모습으로 묘한 애틋함을 느꼈다. 그대로 멈춰 서,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고 싶었다. 정말로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시장의 아들이 틈틈이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동향을 확인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츠는 자신의 사소한 감정보다 무엇이 더 먼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어제, 정확히는 잠들기 전처럼 여전히 흐릿한 세상으로나 관심을 돌렸다.

세상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밤처럼 어둑어둑하지만 색은 또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앞서 걷는 시장의 상의와 그의 아들이 입고 있는 바지가 각각 얼룩이 많은 흰색과 옅은 파란색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이 낮이 아니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안됐다. 둘의 색깔은 그저 검거나 더 검게 보여야만 했다. 가끔 제대로 구분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지금처럼 또렷할 수는 없었다.

“저기에 보이는 것이 태양입니다. 하얀색 말입니다. 옛날에는 태양이 노랗거나 붉었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상징적으로 비유하기 위해서 그랬을 겁니다. 태양을 두 눈으로 바라 볼 수 없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태양은 분명 하얀색입니다. 똑똑히 두 눈으로 볼 수도 있죠.”

바츠는 시장이 고개를 돌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회색빛 하늘 뒤로 난생 처음 보는 불빛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뭔가 따뜻한 것 같으면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빛이었다. 정확히는 눈동자가 간지러운 것 같았다.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눈이 제법 피로했다.

“아니에요. 태양은 노랗거나 붉은 것이 맞아요. 지금은 하늘에 낀 먼지 때문에 저렇게 보이는 것이죠.”

바츠는 아르크에서 배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태양이 담긴 사진도 여러 차례 보았다. 가만히 그 열기를 쬐면 기분까지 뜨겁게 데워진다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시장이 바츠를 조금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눈빛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굳이 그를 위해 따로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도 특별히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 덕분에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그 어색함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을 만큼 짙은 침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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