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접촉 -- > * 62화 *
“자네가 새로운 집사신가?”
그녀는 얇고 하얀 스카프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몸에 두르고 있는 회색 클로크(Cloak)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런 물건이었다. 그녀의 망토는 거적때기에 불과했다. 스카프 역시 낡긴 했지만 그녀가 몸에 두른 망토에 비교하면 사치스러워 보일 정도로 화려했다.
“아, 우리 장로인 로리나입니다.”
시장이 뒤늦게 걸음을 멈추며 그녀를 소개해주었다. 그녀는 그 틈에 바츠의 왼쪽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그럼 칼은 먼 길을 떠났겠어. 고집하고는...아르크에서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도 되는데, 미련하긴...안 그래요? 헌터들은 왜 그리 다들 미련한 거죠?”
그녀는 바츠의 매끄러운 손등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마지막에 눈을 바라보며 묻지 않았다면 그녀가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웠다.
바츠는 그녀의 손길도 난감했지만,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질문은 곤란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마치 자신이 칼을 평가해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츠가 곤란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직한 눈을 가졌군요. 다른 사람들과 달라요. 내가 본 헌터들은 다들 한곳만 응시하죠. 결코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지 않아요. 뭐가 그리 욕심이 나는지, 다들 한 곳만 바라보고 삽니다. 그런데 당신은 다르군요. 혹시...”
“장로님, 집사님은 지금 바쁩니다.”
시장이 그녀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바츠의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입구에서부터 그래왔듯이 그녀의 손길 역시 자신이 막아주려는 듯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츠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집사는 항상 바쁘죠. 그렇죠? 당신은 칼보다도 더 바쁠 거예요. 내 눈은 틀리지 않죠.”
“장로님, 다음에 이야기 하시죠. 집사님은 지금...”
이번에는 바츠가 시장의 말을 가로 막았다. 남은 손을 시장에게 펴 보여 그를 제지하고, 그녀에게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제게 부탁하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어머, 예의까지 바르군요. 좀 더 상냥하게 군다면 많은 사랑을 받을 거예요. 칼이 당신을 보고 만족해했을 표정을 생각하니 내가 다 흐뭇하군요.”
그녀가 바츠의 손을 놓아주며 빙그레 웃었다. 바츠는 그녀의 낯선 미소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지상으로 나온 이후 자주 겪는 묘한 감정이었다. 잠시였지만 그녀의 미소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골똘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칼의 검을 보았을 때처럼 단순한 착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시장의 손길은 저절로 떨어져나갔다.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시장은 자신의 아이에 등을 떠밀었다.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하기 위해 아이에게 신호를 주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필요이상으로 단호했다. 아이가 놀란 나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시장의 손길은 아이를 먼저 보내기 위해 다그치는 손길이었다. 아이는 갑자기 변한 아버지의 손길에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가 어깨를 토닥여주자, 이내 서운한 기색을 얼굴에 내비치고는 앞에 보이는 코너에서 오른쪽으로 먼저 달려 나갔다.
바츠가 안내된 것은 그와 반대쪽이었다. 시장은 바츠가 코너를 돌아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완전히 몸을 돌려서 마주보고 섰다.
“죄송합니다. 다들 절박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일리트시의 주민들이죠. 가끔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도 제법 많습니다. ‘스티그마타’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그리고...”
시장이 잠시 말을 끊더니, 얼굴을 바짝 가져다대고 도둑처럼 속삭였다.
“장로님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연륜에서 나오는 경험은 충분히 도움이 되지만 간혹 이상한 소리를 하시죠.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가끔은 빅애스를 뜯어내야 한다고 말을 하시는 분이니까요. 말이 됩니까? 그 거대한 걸 뜯어내다니. 아마 나이를 먹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한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얼굴만 늙지 않으니까요. 모든 게 다 늙어버리죠.”
바츠는 시장이 그녀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는 것이 못마땅해 저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비록 시장의 목소리에는 안쓰러우면서도 미안한 감정이 묻어났지만, 이런 식으로 뒤에서 몰래 남의 흉을 보는 일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매우 부끄러운 짓이었다. 물론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칼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장 난 톱니처럼 느리고, 배터리가 다 된 것처럼 당장 하려던 일을 잊기도 했었다. 그녀가 너무 늙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니, 그녀는 너무 지쳐 있었다.
“흠, 이쪽입니다.”
시장은 바츠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몸을 돌려 세울 때는 고개를 좌우로 내두르는 행동을 했는데, 그녀의 추락에 대한 안타까움인지 바츠의 태도를 이해 못하겠다는 의사인지 바츠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바츠는 그에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시장이 마지막으로 안내한 곳은 바로 앞으로 보이는 방이었다. 처음부터 문이 없던 곳이라 방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그냥 벽을 뚫어 사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확보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나 길을 따라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같은 모양의 통로가 하나 더 있었는데, 안내된 방으로 들어서기 전에 바츠의 시선을 발견한 시장이 그곳은 식수원이라고 말해주었다.
바츠가 안내된 방은 5명이 눕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이 있더라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가장 안쪽 구석에 쓰레기더미처럼 각종 짐들을 수북하게 쌓아놓았을 정도였다. 군인들의 보급품이나 각종 설비의 부품들로 보였다. 고작해야 세 명이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을 고정할 수 있는 경첩이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방안에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바로 코너 뒤 통로와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들 언제든지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누울 수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이보게들, 인사 하게나. 새로운 집사시네.”
시장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이미 인기척을 통해 시장과 바츠의 존재를 알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시장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전까지 특별한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구석에 쌓아놓은 짐에 기대 앉아있던 사내만 긴장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켰을 뿐이었다. 입구에 가장 가까이에 앉아있던 사내는 처음 그대로 벽에 기댄 채 고개만 돌렸고, 반대쪽 벽에 기대앉아 있던,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 여인은 잠이 들었는지 끝까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역시 칼이 아니군요.”
입구에 가장 가까이 있던 사내가 말했다. 그는 방 중앙을 향해 다리를 엇갈려 뻗고 있었는데, 그 위에 매우 커다란 총을 올려두고 있었다. 다른 두 사람 옆에 M16A4소총이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의 총은 한눈에도 더 길고, 무게도 더 나가보였다. 무엇보다도 다른 두 총기에는 없는 스코프(Scope)가 달려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더그에게 이미 들었습니다. 지난번에 헌터 한 명과 집사를 태우고 왔다고 했거든요.”
그가 방안에서 유일하게 긴장하고 있던 사내를 향해, 양옆으로 찢어진 것처럼 보이는 작은 눈으로 슬쩍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가 눈치를 준 사내의 얼굴이 낯설었다. 동그란 얼굴에 커다란 눈.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창백하게 굳은 얼굴과 깜빡임 없는 눈으로 바츠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바츠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시 헌터 슈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던 터라 바츠로서는 그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방독면 때문에 얼굴도 드러나지 않았었다.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아무것도 없었다. 바츠가 그때 그를 기억하는 건 불안으로 초조해하던 목소리뿐이었다.
“샤오밍이네. 그리고 저쪽은 셀레나.”
샤오밍이 자리에 앉은 채로 바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츠는 그 손을 잡으며 벽에 등을 대고 잠들어있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세운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움직임은 없었다. 앞으로 완전히 꺾인 고개가 그녀의 상태를 대변했다.
“바츠입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죠?”
바츠는 그녀가 깊이 잠들어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샤오밍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바츠의 물음에 헤러티커라도 본 것처럼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했다. 작은 눈 사이로 눈동자가 훤히 드러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손을 거두며 웃음을 터뜨렸다. 호탕하고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에 셀레나가 잠에서 깼다. 그녀는 시장과 바츠를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더니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조용히 지켜보았다.
“헌터들은 다 그런 건가? 아니면 자네가 특별한 건가?”
“샤오밍, 입 조심하게.”
샤오밍이 즐거운 얼굴로 빈정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장이 놀란 프레이마냥 불쑥 튀어나오며 바츠를 대신해서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차피 어린 애 아닙니까? 뭘 그렇게 긴장하십니까?”
샤오밍이 억울한 지 시장에게 애걸하는 말투로 말했다. 웃음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몰라서 묻는 건가? 기본적인 예를 갖추란 말이네. 게다가 헌터를...몰라서 하는 말인가?”
시장이 한 차례 바츠의 눈치를 보며 대꾸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이 전진기지에서 그의 아들이 멋대로 나섰을 때처럼 변했다. 나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지만, 그 감정을 전부 감추지는 못했다. 샤오밍의 표정은 그제야 변했다. 전과 다르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처음과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 나아졌을 뿐이었다.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말투에 묻어났다.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그게 뭐 대수입니까?”
시장이 샤오밍을 향해 비명에 가까운 외마디 고함을 질렀다. 그를 겁주려고 했다기보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온 행동 같았다. 안쪽에 있던 더그 역시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반쯤 일어난 것을 보니 적잖이 놀란 듯 했다. 엉거주춤한 채 중간에 멈춰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셀레나만 처음 모습 그대로를 고수했다.
바츠는 그가 고깝게 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모습에서 신뢰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거 칼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떠난 칼에 대한 아쉬운 감정도 느껴졌다. 이전에 보여주었던, 시장의 이상한 태도도 설명이 됐다. 그 역시 몇 번이나 불신에 찬 시선을 보였었다. 본인 스스로는 모르는 듯 했지만 바츠는 그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바츠로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최소한의 기회도 아직 없었다.
“저를 편하게 대하는 건 상관 않겠습니다. 전 그런 것에 크게 개의치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만은 기억해주셨으면 하네요. 전 18살이거든요. 절대 어리지 않아요.”
샤오밍이 잠시 바츠를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깍듯이 하고 싶네요. 조금 전 행동들은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랬습니다. 아마 반가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칼을 대했던 것과 똑같이 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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