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접촉 -- > * 64화 *
“불침번은 제가 서도록 하죠. 조금 자두는 게 좋을 겁니다.”
보다 못한 샤오밍이 바츠를 향해 말했다. 엔지니어들은 그의 말에 조용히 몸을 둥글게 말아 바닥에 누웠다. 이런 짙은 어둠과 끔찍한 추위에 다들 익숙해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쉽게 그들을 흉내 낼 수 없었다. 지면은 얼음장같이 차가웠고, 때때로 불어오는 칼날 같은 바람은 잠들지 못하도록 온 몸을 꼬집는 것 같았다. 빛이 다시 생길 때까지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저...샤오밍씨.”
바츠는 처지가 딱해지자 괜히 친구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들이 함께였다면 이런 추위 따위는 웃으면서도 견뎌낼 수 있었다. 항상 완벽한 테라치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지상의 밤을 맞이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집불통 말괄량이 아델리나는 추위와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툴툴거리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을 것이고, 겁쟁이 거인 버니에투와는 그 커다란 덩치로 침묵과 함께 듬직하게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또, 친절하고 상냥한 벨리타는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체온을 나눠주었을 것이고, 늘 곁에 머물러 주었던 붉은 머리 이롤로는...
“시장님 말을 들어보니, 아르크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일리트시를 거쳐서 간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네. 많이들 거쳐 갑니다. 하지만 전부는 아닐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샤오밍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잠시 바츠를 응시하고는 귀찮은지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리는 것을 보면 그도 추위에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3년 전에 15살 된 아이를 본 적 있나요?”
“농담하는 겁니까? 3년 전 일을 다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그렇게 막연하게 말하면 기억하고 있던 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그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격한 반응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못마땅해서 거북한 듯 성난 목소리를 냈지만, 바츠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도 추위와 어둠은 홀로 견뎌내기에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말을 걸어준 것이 은근히 반가운 눈치였다. 바츠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마음을 접고 관심을 거두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붉은 머리에요. 짙은 붉은 색이라 단 번에 눈에 띄죠. 한 번만 봐도 쉽게 기억할 수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모두가 지나가는 건 아니니까요. 서쪽이나 북쪽으로 갔으면 일리트시를 거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은 친절하게 변했지만 건성으로 대답하는 건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떠올려보기 위해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대꾸했다.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마구 내뱉고 있었다. 추위에 얼어붙은 그의 가슴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의 없는 말투였다. 대화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대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조급함이 절박하게 변했는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서 엉뚱하게 격분하기까지 했다.
“젠장! 너무 억울하군요! 엔지니어 녀석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합니다! 놈들은 그래도 3교대로 2년마다 집에 갈 수 있으니까요! 나 같은 놈들은 그런 기회조차 없어요!”
바츠는 그가 짜증을 부리는 이유가 단순히 추위와 어둠 때문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그는 아까 일리트시를 떠나기 직전, 엔지니어들과 나눈 몇 마디로 인한 짜증을 지금까지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위해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 알 수는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어떤 위로도 달갑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제길...내 아들 녀석이 보고 싶은 밤이군요. 지금쯤 많이 컸을 텐데...집사님 또래니까 키가 비슷할 겁니다.”
그는 갑자기 끓어오른 분노를 스스로 억눌렀다. 기분 좋은 과거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 사이 바츠는 이미 잠든 것으로 보이는 엔지니어들이 한 번씩 몸을 뒤척이는 이유가 샤오밍 때문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샤오밍은 바츠가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자, 시선을 떨구고 혼잣말을 이어갔다. 방독면에 가로막히고 바람소리에 차이는 탓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 같았다. 그는 아들과의 기억을 하나 둘 끄집어내며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바츠는 오히려 그보다 먼저 대화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기분 좋은 회상을 하고 있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 눕기 위해 바닥이나 골랐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바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보다 훨씬 침착해진 목소리였다.
“아참! 붉은 머리하니까 생각이 나는 군요. 아마 집사님도 알 겁니다. ‘라파엘’이라고. 일전에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아이기스 녀석들 중에 정말 골칫거리가 생겼다고 했었던 기억이 나는 군요. 어디서 온 녀석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는데, 굉장하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이죠? 뭐가 굉장하다는 거죠?”
“검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이기스 녀석들은 지금까지 우리처럼 개인화기를 사용해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고 탄약도 거의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큰 위협이 아니었죠. 우리도 구하기 힘든 걸 녀석들이 가지고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헌터들에게는 정말 최악이 아닌 이상 우스운 정도였을 겁니다. 헌터들이 총구를 향해 달려들 일은 없을뿐더러, 총알이 넉넉한 놈들이라도 헌터를 향해 달려드는 놈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녀석이 나타난 뒤로는 상황이 조금 변했다고 합니다. ‘라파엘’ 말로는 놈들 지도자가 녀석의 특별한 재능을 알아본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실 칼날을 만드는 것이 총이나 탄약을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쉽지 않습니까? 녀석에게 헌터와 유사한 힘이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알아본 놈들 지도자가 녀석에게 특별한 군대를 만들라고 지시를 한 것 같다고 했었죠.”
“그게 ‘칼리에’군요.”
바츠는 바닥을 고르던 손을 거두고 몸을 바로해서 샤오밍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독면 렌즈에 모닥불이 비쳐지며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는 것처럼 보였다.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바로 맞췄습니다. 굳이 정비하는 것조차 벅찬 무기보다는 금속을 날카롭게 만든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요. 그 때문인지 ‘칼리에’가 생겨난 뒤로는 아이기스 녀석들이 전과 다르게 과감해졌다고 하더군요. 좀 더 호전적으로 변한 모양입니다. 무모한 것일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 이유가 녀석이 정말 잔인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훈련 과정부터 굉장히 모질게 다루는 모양입니다. 훈련 자체도 매우 혹독한데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면 가차 없이 처벌을 한다고 하더군요. ‘라파엘’이 녀석들 영역에서 시신을 발견한 적이 있는데, 그토록 인위적으로 훼손된 시신은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지가 잘리고 배가 갈려 있었는데, 산 채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녀석들의 달라진 행동을 이해 못할 건 아닙니다. 단기간에 헌터 같은 괴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아, 집사님과 우리 헌터들을 비하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닙니다.”
바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재밌네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롤로 일 것 같지는 않네요. 이롤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늘 친절하고 상냥했죠. 물론 강하고 용기도 있었지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리가 없어요. 제가 알고 있는 한 말이죠.”
샤오밍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친구입니까?”
“...네.”
“유감이군요. 친구를 떠나보낼 때 많이 괴로웠겠습니다.”
“아르크에서는...종종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바츠는 바닥으로 몸을 뉘었다. 그리고는 엔지니어들처럼 최대한 몸을 동글게 말았다. 급격히 피로가 밀려들었다. 모닥불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었는데, 이미 한참 전에 꺼진 것처럼 싸늘하기만 했다. 이렇게 광활한 곳에서 이롤로를 과연 다시 만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바로 옆에 샤오밍을 비롯해서 모두 세 명이나 함께 하고 있었는데,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런 바츠를 향해 샤오밍이 한마디 더했다. 하지만 바츠는 크게 신경 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벌써 한 3년은 된 것 같네요.”
다음날, 바츠는 날이 밝자마자 이동했다. 어제보다 걸음의 속도를 더욱 높였다. 지난밤의 엄청난 추위를 또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때 반드시 한 번 더 겪어야 할 일이었지만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밤새도록 바위에 짓눌려있었던 것처럼 모든 관절이 뻐근했던 느낌은 정말 최악이었다. 기름칠이 필요한 오래된 기계의 링크처럼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저기 보이는 군요.”
기지국을 향해 다시 출발한 뒤 얼마 지나자, 샤오밍이 모두를 멈춰 세웠다. 그는 자신의 커다란 총을 번쩍 들어 올려 스코프를 통해 전방을 살폈다. 엔지니어들은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지면으로 바짝 엎드리며 자세를 낮췄다. 마치 헌터 놀이를 하는 헤러티커들처럼 몸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
바츠는 샤오밍이 살펴보는 쪽으로 적어도 1km는 떨어진 곳에서, 하늘로 솟구쳐 있는 높은 철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꼭 나뭇가지를 잘라서 얼기설기 쌓아올린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콘크리트 건물이 있었고, 주위에는 2미터 높이의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다.
“입구 쪽에 한 놈이 보이는 군요. 케찰(Quetzal)이 그려진 걸 보면 틀림없습니다. 아이기스 놈들입니다. 다른 녀석들은 안 보이는 군요. 보십시오.”
샤오밍이 자신의 총을 바츠에게로 건넸다. 바츠는 그가 했던 것과 똑같이 흉내 냈다. 그러자 그냥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아득하게 보이던 것들이 바로 코앞에 와 있는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다. 특히 조금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의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입구 쪽을 서성이던 사람이었는데, 왼쪽 어깨에 그려진 녹색 새까지도 비교적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낡은 소총을 어깨에 걸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들인가요?”
바츠는 샤오밍에게 총을 돌려주며 물었다.
“아닙니다. 녀석들은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은 없는 건가요?”
샤오밍은 돌려받은 총으로 다시 한 번 기지국 쪽을 살폈다.
“글쎄요. 이렇게 봐서는 모르겠군요. 그때는 분명 녀석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건물을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주변을 괜히 돌아다닐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저렇게 일행을 혼자 남겨두고 떠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까이 가봐야겠어요.”
샤오밍이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바츠를 바라보았다.
“제가 가보도록 하죠.”
“잠깐만요!”
바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샤오밍이 그런 바츠의 어깨를 급하게 낚아챘다.
“지금 이대로 그냥 가겠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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