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접촉 -- > * 65화 *
바츠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외에 다른 방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두 다리로 걸어가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하늘을 날아가거나 땅속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그냥 가면 녀석들에게 들킬 것 아닙니까? 칼리에 녀석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모한 거 아닙니까?”
샤오밍이 긴 한숨을 내뱉고는 추궁하듯이 물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츠가 의아한 모습을 보이자,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고는 총을 들고 있던 반대쪽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몸을 숨겨야 할 것 아닙니까!”
샤오밍의 손짓이 그의 머리는 물론이고 몸통을 쓰다듬듯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당장에라도 고함을 지르고 싶은 모습이었으나, 격앙된 목소리와 큰 움직임과는 다르게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에 나누던 목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바츠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태도를 보이자, 결국에는 아르크의 눈이 채워진 바츠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고는 마구 흔들며 말했다.
“칼은 이걸 조작해서 몸을 숨기고는 했다고요!”
바츠는 그제야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지난번에 제법 오랫동안 조작을 해보았는데, 그런 기능이 있을 것 같아보이지는 않았다. 대부분 통신과 기록을 할 수 있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 하지만 문뜩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작동을 시키면 오류 메시지가 출력되거나 아무런 반응도 없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기능들 중 일부가 지금은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은폐(Conceal)라는 기능이 돋보였다. 바츠는 그 기능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갑자기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세르히와 미할리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바츠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샤오밍이 손가락으로 눈치를 주는 덕분에 뒤늦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신체 일부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확히는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가 사라진 것이었다. 놀랍게도 완전히 사라진 망토가 신체를 투명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완전히 몸을 감싼다면, 주위를 지나는 사람이 모른 채 지나치기 충분했다.
“자, 이제 알았으면 그만 가보라고요.”
샤오밍이 바츠의 등을 떠밀었다. 바츠는 놀랍고 신기한 기능에 한껏 들떴지만, 이곳까지 온 이유를 금방 상기하고는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눈앞에서 사라진 자신의 망토로 온몸을 휘감았다. 그리고는 설레는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기지국을 향해 다가갔다. 발소리만 조심한다면 정면으로 걸어가더라도 전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샤오밍과 엔지니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바츠가 기지국 입구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 앞을 서성이던 사내를 지나 뒤쪽을 향해 움직이려는 순간, 갑자기 아르크의 눈이 단음의 경고음을 내기 시작했다. 엄청난 소음은 아니었지만, 바츠는 물론이고 바로 옆에 섰던 사내가 듣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소리였다.
바츠는 서둘러 아르크의 눈을 살펴보았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화면이 정신없이 깜빡였다. 그러다가 결국 지상의 밤처럼 까맣게 변해버렸는데, 어떤 버튼을 누르더라도 화면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옆에 섰던 사내가 바츠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크의 눈이 작동을 멈추며 모든 기능이 정지해버린 탓이었다. 바츠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렸고, 손발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달려드는, 낯선 사내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사내는 자신이 어깨에 걸고 있던 총기를 머리끝까지 들어 올리고는 바츠를 향해 휘둘렀다. 바츠의 머리는 물론이고 주변에 널린 바위도 깨부술 기세였다. 하지만 바츠의 움직임은 그의 공격을 피해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바츠는 잽싸게 몸을 돌려 옆으로 몸을 빼낸 뒤, 허리춤에 있던 검을 뽑는 동시에 아래서 위로 힘껏 휘둘렀다. 바츠가 휘두른 칼날은 달려들던 사내의 오른쪽 팔을 정확히 잘랐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가슴까지 길게 상처를 냈고, 오른쪽 턱을 따라 얼굴까지 깊숙이 베어버렸다. 사내는 꽉 막힌 수도꼭지처럼 꾸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바츠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최대한 크게 반복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이 너무 가빴다. 붉은 피가 사방에 튀긴 탓인지, 급작스럽게 몸을 놀린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엄청난 긴장감으로 방독면을 벗어던지고 싶은 생각으로 간절했다. 하지만 그대로 넋을 놓고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양쪽에서 각각 작은 칼과 쇠몽둥이를 든 사내 둘이 요란한 기합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들고 있었다.
바츠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몸을 뒤로 빼내 자리에서 빠져나와 그들의 목표에서 잠시 달아났다. 그리고는 자세를 고쳐 잡는 그 둘의 복부를 차례로 벴다. 그들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을 만큼 빠르고 정확했다. 손에 프레이를 벨 때보다 훨씬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칼날이 충분히 깊숙하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거는 칼에 베인 사내들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지면에 머리를 처박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츠는 숨을 고르며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벤 사내와 작은 칼을 쥐고 있던 사내는 이미 숨을 거뒀는지 미동이 없었으나, 쇠몽둥이를 들고 달려든 사내는 걸쭉한 목소리로 우는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바츠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아르크에서 프레이의 숨통을 끊을 때처럼 그의 가슴팍에 검을 거꾸로 내리꽂았다. 그가 상처를 부여잡고 있던 양손으로 칼날을 붙들었지만, 망설이지 않고 검을 빠르게 뽑아내 회수했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 몇 개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가슴 속에서 뭔가가 충동적으로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겁고, 달콤한 꿈을 강제로 빼앗겼을 때 느끼는 짜증과 닮은 것이었다. 분노! 틀림없었다. 엄청난 분노가 온몸을 사로잡고 있었다. 바츠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눈앞에 보이는 사내의 시신을 향해 내리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이미 숨통이 끊어진 프레이를 향해 난도질 하던 가이즈카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를 무섭게 혼내던 마티프가 떠오른 것이었다. 마티프는 필요하다면 그의 뺨을 후려쳐서라도 행동을 멈추게 할 것처럼 보였다. 그의 괴물 같이 부리부리한 두 눈이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몸이 서서히 차갑게 변하더니 이내 흥분된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끓어오르던 분노도 함께 가라앉았다. 바츠는 그때의 기억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불길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와는 조금 다른 또 하나의 기운을 느꼈다.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공포심이 분명 아니었다. 한쪽 목덜미가 바늘로 꼭꼭 찔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바츠는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몸을 옆으로 빼냈다. 그러자 눈앞이 크게 흔들리며 몸이 균형을 잃었다. 머리가 심각하게 흔들린 것 같았다. 동시에 농도가 짙은 기름처럼 길게 늘어지는 총성이 들려왔다.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뜩이나 방독면으로 좁은 시야가, 받은 충격에 비해 회복을 더디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눈앞에 시신이 세 구가 아닌 네 구로 변해있는 걸 발견 할 수 있었다. 특히 뭔가에 극심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산산조각 난 시신이 눈에 띄었다. 그 시신의 손에는 날카롭게 날을 세운 길고 넓적한 금속이 쥐어져 있었다. 칼날로써 충분히 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었지만 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투박한 모양이었다.
“괜찮은 겁니까?”
어느 틈에 달려온 샤오밍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물었다.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거죠?”
바츠는 지끈지끈한 머리를 감싸 쥐며 물었다.
“녀석이 뒤에서 달려들었습니다. 집사님 머리를 노리고 말이죠.”
“샤오밍씨가 날 살린 거군요.”
샤오밍의 손에 들린 크고 묵직한 총기의 총구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런 셈이죠.”
“고마워요. 정말입니다. 정말 고마워요.”
바츠는 아직 남은 두통으로 괴로웠지만,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러자 샤오밍이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상당히 멋쩍어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돌리고는 손을 높이 들어, 어딘가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엔지니어들을 부르기 위한 행동이었다. 엔지니어들은 뒤늦게 달려와 바츠에게 걱정스런 목소리로 한마디씩 건넸다. 바츠는 간단하게 응답하고는 그들과 함께 철조망 너머 콘크리트 건물로 향했다. 샤오밍에게 경계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콘크리트 건물 안에는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즐비해 있었다. 버튼도 많았고,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계기판도 많았다. 엔지니어들은 흩어져서 그 기계장치들과 계기판을 빠르게 훑어보며 점검해보더니 한 곳에서 만나, 서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어때요?”
“녀석들이 전원 퓨즈를 망가뜨린 것 같습니다. 자주 있는 일입니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교체를 하는 동안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바츠가 묻자 미할리오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바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이 수리를 마칠 때까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버튼들 때문인지, 조금 전 충격이 아직 남은 탓인지 정신이 조금 산만했다. 머릿속에 하얀 연기가 가득 찬 것만 같았다. 게다가 매우 지저분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아주 오래된 종이들 때문에 더욱더 신경이 날카롭게 섰다. 대부분 새겨진 글씨들이 전부 날아가 버렸을 정도로 낡은 것들이었는데, 일부는 심하게 구겨진 채 검은 얼룩으로 망가져 있었다.
바츠는 그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이었다. 글씨가 빼곡히 남아있었지만 알아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제일 상단 중앙에 큼지막하게 새겨진 글씨만 어렵사리 읽어볼 수 있었다.
‘세계 정부, 생수 판매 중단 2개월 만에 수돗물마저도 공급 중단! 전 세계 혼란을 가중시키다!’
바츠는 종이를 옆으로 휙 던져버리고는 다른 종이를 더 찾아보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너무 훼손이 심해서 더 이상 읽을 수 있을만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몇몇은 전혀 모르는 언어들이었다. 한 때 수많은 언어들을 마음껏 쓸 수 있었던, 그때의 물건들로 보였다. 약간이나마 형태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바츠는 몸을 돌려 엔지니어들을 찾았다. 둘은 부품 몇 개를 손에 쥔 채 아직도 의견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져온 부품에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할리오가 호언한 만큼 작업은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이나 의견을 주고받는 둘의 시선이, 손에 든 부품과 바츠를 자꾸만 오갔다.
바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좀 더 편하게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밖으로 향하는 바츠를 발견한 미할리오가 손에 들고 있던 부품을 내려놓고, 바츠가 버린 종이를 주워 장갑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츠는 그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 서둘러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그들을 재촉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바츠는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서늘한 기온이 나름 상쾌하게 느껴졌다. 산만하던 정신도 점차 호전되고 있었다. 그런데 경계를 부탁했던 샤오밍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건물 근처에 있지 않고, 철조망 입구에 쓰러진 시체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기심에 조심조심 그쪽으로 다가가자, 그가 이미 숨을 거둔 그들의 몸을 뒤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츠는 크게 놀랐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그에게 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성난 마티프처럼 으름장을 놓고 싶었지만 냉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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