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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66화 (66/268)

< --   6. 접촉   -- >         * 66화 *

“뭐하는 겁니까?”

샤오밍은 자신의 뒤통수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길을 멈추지는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고 하던 일에 열중한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하는 걸로 보입니까?”

바츠는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당당하게 되묻는 그의 태도가 황당했다. 그는 시신이 가지고 있던 물품들을 하나 둘 챙기고 있었다. 신고 있던 부츠와 장갑부터 벨트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들이 입고 있던 겉옷도 챙기려는 시도를 했다. 혈흔이 묻었거나 지나치게 낡은 것들까지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안쪽 주머니까지 샅샅이 뒤지는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5.56mm탄 두 발을 발견했을 때에는 짧은 환호성을 질렀을 만큼 기뻐했다. 다른 물건들과는 다르게 바로 자신의 품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 중에는 칼리에가 없군요. 녀석들은 붉은색 케찰이 표시되어 있어요. 근데 이 녀석들 중에는 그런 문장이 없습니다. 아마도 놈들만 먼저 돌아간 모양입니다.”

샤오밍이 고개를 까딱여 자신의 발 앞에 시신들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정확히는 그들 상의에 그려진 녹색 새들이었다.

바츠는 그의 고약한 행동을 나무라고 싶었지만, 그의 태연한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려버렸다.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질책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저들을 그냥 나둔다면 어차피 누군가가 약탈해갈 것이 뻔했다. 그게 샤오밍이 아닐 뿐이었다. 그의 행동은 분명 받아드리기 힘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너무 척박했고, 살아남는 건 어려웠다. 그를 추궁하려던 마음을 접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대신 그 바로 옆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병을 가리켰다. 안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병이었는데 유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건 뭐죠?”

샤오밍이 용케 알아듣고 그 병을 집어 들었다.

“에...플라스틱이군요. 수통 같아요. 보세요. 안에 물도 들어있습니다.”

그가 바츠가 잘 볼 수 있도록 플라스틱 통을 머리 위로 들어보였다. 안에 반쯤 들어있는 내용물이 겉으로 보기에는 투명한 액체였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물인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여기 뭐라고 적혀있네요. 라벨 같군요. 에...에비안...에비언? E.V.I.A.N. 모르겠습니다. 알파벳으로 적혔지만 영어가 아닌 것 같아요.”

샤오밍이 플라스틱 병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갑자기 방독면을 벗어 제쳤다. 바츠는 화들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르크의 눈이 갑자기 정지했을 때보다도 훨씬 당황스러웠다.

“무슨 짓이에요!”

“괜찮아요. 보세요. 저기 약간의 수풀도 있고, 저쪽에는 관목도 듬성듬성 있죠? 이 근처에는 감염이 없다는 겁니다. 잠깐 벗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샤오밍은 흥분한 바츠를 보고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차례 씨익 웃어보이고는 뚜껑을 열어 내용물의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는 거리낌 없이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신선하네요.”

샤오밍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츠를 향해 물병을 내밀었다. 바츠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는 방독면을 벗었고, 확인도 되지 않은 액체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이런 그의 태도는 오염에 완전히 노출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의 말대로 근처에는 수풀과 작은 나무들이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숲을 이룰 만큼 우거진 것은 아니었고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이곳에 죽음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매우 난감했다. 그의 행동은 안일하다 못해 너무 무모했다. 크루엘라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수 없이 들어왔다. 살아가는데 먹고 숨 쉬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질 만큼 강조되던 것이었다. 그것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묘했다.

“마셔보라니까요. 정말 괜찮습니다.”

샤오밍은 바츠의 심정도 모르고 다시 한 번 권했다.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꼭 고집을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 같았다.

바츠는 그가 계속해서 권하자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게 된다는 야릇한 쾌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기분 좋은 스릴의 유혹이었다. 중간에 두 번이나 머뭇거렸을 만큼 여전히 고민스러웠지만,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방독면을 벗고야 말았다. 바람이 고스란히 얼굴에 닿았다. 부드러운 손길처럼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그러자 진한 해방감이 느껴졌고, 머릿속에 가득 찼던 하얀 연기들이 모조리 환기되는 것 같았다. 답답하던 숨통이 완전히 트였다.

바츠는 그가 내밀고 있던 플라스틱 병을 용감하게 받아들었다. 물건을 훔쳐 달아나는 것처럼 낚아채듯 받았다. 그리고는 그와 똑같이 용기 안에 담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썩은 물. 비린내가 진동하는 썩은 물이었다. 기침이 계속되고 반복적으로 헛구역질이 났다. 입안에 머금었던 물을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냈다. 속이 뒤집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바츠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의 장난이 매우 불쾌했다. 단순히 분위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롱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샤오밍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즐거운 표정이었다.

“진정해요. 그 정도면 꽤 신선한 겁니다. 최소한 마실 수 있잖아요. 아르크에서는 상상도 못한 맛이겠지만, 여기서는 그 정도라면 아주 귀한 겁니다. 정말입니다.”

바츠는 그를 향해 물병을 던지다시피 해서 돌려주었다. 여전히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는 그가 너무 못마땅했다. 그의 얼굴을 향해 패대기치고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참아냈다. 대신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그 감정을 에둘러 표현했다.

“...미안합니다.”

샤오밍이 바츠의 뒤통수에 대고 사과를 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진심이 담긴 말투였다. 그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바츠는 고작 이것으로 화가 풀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의 사과를 받아줬다. 쓸데없이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지 않았다.

“됐어요. 장난이었다고 믿죠. 지상에서 물이 귀한 건 사실이니까요.”

“아니요, 그거 말고요. 당신을 믿지 않은 것 말입니다.”

바츠는 고개를 다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당신은...어리숙했으니까요. 내가 군인이 된 건 벌써 십 수 년 전 일입니다.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죠. 내 눈에 당신은 그저 풋내기죠. 기분 나빠하지는 마십시오. 적어도 조금은 진짜였잖아요?”

바츠는 특별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 샤오밍을 비롯해 일리트시의 군인들보다 미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사실을 굳이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모습을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헌터는 역시 헌터군요.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만들어버리다니.”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선 샤오밍이 바츠가 아닌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시신들을 바라보았다.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진짜 놀란 건 단순히 당신이 이놈들을 쉽게 제압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놀란 건, 내가 맞춘 저 녀석이 당신에게 달려들 때였죠. 난 당신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녀석을 맞췄죠. 그런데 당신은 녀석의 칼날을 정확히 피해냈어요. 놈이 실수한 것이 아닙니다. 난 똑똑히 봤습니다. 당신이 잘한 겁니다. 정말 빠른 움직임이었어요.”

바츠는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방독면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왼쪽 뺨에 흉터처럼 가는 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안쪽까지 이어지지 않고 겉면에만 흠집처럼 나 있었다. 계속 사용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대체 헌터들의 정체가 뭡니까? 대체 뭘 배우는 거죠? 내 아이도 당신과 같은 18살입니다. 아직 학교를 다니고 있죠. 나중에는 저처럼 군인이 되거나 엔지니어가 될 겁니다. 그렇다고 창피하지는 않아요. 대견하죠. 뭔가를 해낼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는 소리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정말...정말 대단해요.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샤오밍이 바츠를 바라보며 물었다. 바츠 역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나를 정말 믿는 군요.”

샤오밍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바츠를 한참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입을 연건 둘 사이가 어색하다 못해 민망해질 쯤 이었다.

“...맞습니다. 그래서 한 말입니다. 당신에게 칼만큼의 능력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직은 조금 부족하지만요. 하지만 당신이 그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아니, 믿을 겁니다.”

바츠는 그를 향해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옮겨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펼쳐진 메마른 지표면의 끝이 회색빛 하늘과 닿아있었다. 그곳은 절망과 침묵이 마주치는 곳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고요함만 맴돌았다. 만약 반대로 이쪽을 바라보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했다. 이쪽도 똑같이 외롭게 보일까? 그건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 의문에 대해 고민도 없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사훈련소에서 겨루기에 승리한 것처럼 뿌듯했다.

“아, 그리고...”

샤오밍이 말끝을 흐리며 바츠의 관심을 끌었다. 바츠는 조금 더 승리감을 느끼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내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시장 말입니다. 그 사람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그는 말이 많은 만큼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신뢰를 주지 못하죠.”

그가 자못 진지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바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였던 터라 순간 얼떨떨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시장이 알게 모르게 내비치는 그 특유의 교활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느낌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장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 일렀지만, 곱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자기중심적으로 제법 이기적인 사람 같았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바츠는 지금 이곳에서 그에 태도를 논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렸다. 샤오밍이 한 말은 그저 개인의 생각이라고 받아드리는 데에서 그쳤다.

“그런데 지난번에 더그 말이에요. 전 사실 더그를 그날 처음 봤어요.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죠. 무슨 말인지 알죠? 그런데 더그는 절 알아본 눈치더라고요. 어떻게 된 거죠?”

샤오밍의 진지했던 표정이 방금 내려놓은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은 사람처럼 멍하게 변했다. 특별한 반응을 기대했었던 것 같았다. 전혀 엉뚱한 소리가 돌아오자, 넋이 나간 것처럼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꼭 조금 전 갑자기 방독면을 벗어 놀라게 한 것에 대해 복수를 한 것 같았다. 그도 비슷한 걸 느꼈는지, 이내 픽 하고 웃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꾸했다.

“그랬습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녀석도 집사님을 알아본 게 아닐 겁니다.”

“그럼요?”

“바짝 긴장해서 그 큰 눈을 이렇게 뜨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샤오밍의 눈은 더그에 비하면 한참 작았다. 가이즈카와 비슷한 정도였다. 그는 그런 자신의 눈을 최대한 크게 뜨려고 애썼다. 고장 난 문을 억지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웃음이 날 뻔 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내 대답했다가는 웃음을 참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샤오밍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불쾌하거나 못마땅한 기색이 아니라 덩달아 즐거운 표정이었다.

“겁을 먹은 겁니다. 녀석은 겁이 많거든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녀석이 비클레타 운전수라는 건 아시죠? 아마 그래서 그럴 겁니다. 헤러티커는 소음에 민감한 녀석들이니까요. 총성에 반응해서 멀리서부터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녀석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닙니다. 항상 긴장한 채 다녀야 할 테니까요. 더욱이 혼자서 다녀야 할 때면, 그 공포는 말로 다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까 더그가 헌터를 무서워 한다는 소리인가요?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샤오밍은 바츠의 질문에 잠시 텀을 두고 대답했다.

“...헌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츠는 그를 비롯해서 모두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헌터들도 결국 같은 사람이었고, 다른 것이라고는 조금 특별한 훈련을 받는다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막 열려는 순간, 지난번 스타드가 헌터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은 바츠의 혀와 입술을 단단히 묶어버렸다. 게다가 때마침 엔지니어들이 작업을 마치고 건물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 기회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다 끝났습니다!”

미할리오가 세르히와 함께 의기양양하게 건물을 빠져나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바츠는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억지로 집어삼키고는 조용히 방독면을 다시 뒤집어썼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떻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올 때와는 다르게 돌아가는 길이 나름 화기애애하게 변했다는 것에나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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