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 접촉 -- > * 70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바츠는 그가 떠난 후로, 아르크의 눈만 계속 들여다보았다. 잠잘 때 빼고는 모든 시간을 아르크의 눈을 들여다보는데 썼다. 얼마 전 전진기지를 방문했던 그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서였다. 그가 신경 쓰여서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폐기물 처리장에 아이를 두고 온 부모라도 된 기분에 그에게서 관심을 떼지 못했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아르크의 눈에는 주변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맵이 있었다. 필요하다면 비교적 자세하게 지형지물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맵을 통해서 헌터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편리했다. 지상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진기지 주변을 비롯해서 일리트시 주변을 살펴보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헌터들의 움직임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코드로 나타났다.
그의 코드는 86-E.E.-38 이었다. 주변에 다른 헌터가 없었고, 처음부터 그를 쫓았던 것이라 틀림없었다. 그의 코드가 표시된 점이 지난번부터 도시 주변을 배회했다.
그의 이름은 헤르만이었다. 나이는 올해 서른셋이었고, 헌터가 된 건 무려 14년 전이었다. 지상에서 10년 넘게 살아남은 베테랑이라는 의미였다. 아르크에 부인과 슬하에 아이 둘이 있었고, 레벨2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아르크를 방문했던 것은 1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는 헌터로서 활동한 기간에 비해 공로가 많지 않았다. 배급표를 얼마나 더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0년 넘도록 헌신한 것에 비해 눈으로 드러나는 혜택이 거의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레벨4로 이주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대기자 목록에도 들어있지 않았다. ‘라파엘’ 스타드의 가족이 레벨4에 머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주지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전진기지를 떠난 이후, 멀리 벗어나지 않고 근처를 맴돌았다. 특히 도시 주변을 맴돌며 서성거렸다. 꼭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의 수상한 움직임에 굉장히 불안했다. 그가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애가 탔다. 그리고 그 걱정은 머지않아 현실이 되었다.
그가 도시를 배회하던 행동을 멈추고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바츠는 그 행적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한 끼 얻어먹으려고 찾아온 샤오밍에 의해서,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츠는 샤오밍에게 얼마 전 헤르만이 가져온 프레이 고기를 대접했다. 지하 창고에 20년 가까이 된 버터를 겉에 발라 오븐을 사용해 조리를 했다. 구수한 냄새와 잘잘 흐르는 기름기가 절로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이렇게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도 표정이 어두웠다. 항상 신경질적이고 거칠게 굴던, 기존의 그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나요?”
그는 대답은커녕 요리에 손도 대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바츠가 재촉하듯이 자꾸만 묻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입을 닫고 살 것처럼 보였다.
“...그...사실 별일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니까요. 제가 군인이 되기도 전부터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전 그저 규칙을 따랐을 뿐입니다. 규칙과 법은 지켜야 하니까요. 그렇죠? 모두가 지켜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츠는 그가 말 한 별일 아니라는 일이 제법 심각한 일임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말하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축 쳐져 있었다. 그가 이렇게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가 맞는지 의심이 될 만큼 낯설었다. 하지만 그는 그 모습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바츠는 그를 향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죠? 헤러티커라도 보았나요? 그것이라면 걱정 마세요. 근처에 헌터가 있으니까요. 주민들을 지키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게 아니면 이제 와서 밖에서 사는 것이 무서워지기라도 했습니까? 그게 사실이면 조금 실망인데요?”
바츠는 일부로 그를 조롱하듯 말했다. 물론 말속에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장난기를 담아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웃음기 전혀 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지상에서 사는 건 이제 익숙합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제게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죠. 헤러티커요? 차라리 그 문제라면 마음이 편할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표가 분명하니까요. 그런데 이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바츠의 물음에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의 두 눈에는 분노와 함께 애처로운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 그 놈의 헌터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바츠를 조금 놀라게 만들 정도로 갑작스런 모습이었으나, 그는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하고 있었다.
“가끔 헌터들이 기지를 방문하지 않습니까? 잠시 쉬었다가 떠나고는 하잖아요. 피로도 풀고요. 이 피로를 푼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냥 편안히 잠을 자거나 물로 씻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바츠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 피로를 풀어주는 것 역시 주민들이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란 말입니다! 제기랄!”
그는 자신의 이를 악물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테이블을 내리친 주먹이 그 위에서 마구 떨렸지만, 그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좀 더 침착하게 변했다.
“헌터들은 돌아오면 바로 떠나지 않습니다. 도시 주변을 맴돌죠. 자신의 피로를 풀어줄 사람을 기다리는 겁니다. 우린 밖에서 기다리는 그들을 발견하면 사람을 내보냅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얌전히 떠날 테니까요. 모두들 헌터를 두려워해요. 그들 중에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요. 정상적인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집사님은 운이 좋은 겁니다. 집사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눈은 조금 다르니까요. 하지만 집사님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태도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집사님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지금 집사님의 말투는 상당히 어색해요. 집사님이 우리에게 정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집사님의 말투는 책을 읽는 것처럼 굉장히 딱딱하단 말입니다.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아요. 웃기지 않습니까? 주민들이 집사님과 헌터가 같은 부류라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요?”
그는 혼자서 한참동안 길게 말을 이어가더니, 갑자기 기운이 빠진 것처럼 말을 멈췄다. 시선은 바닥을 향했고, 고개는 덩달아 밑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그의 어깨도 밑으로 축 처진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바츠는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듣게 되자 기분이 묘했다. 자신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변한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굳이 이런 사실을 가지고 속이려 들 리가 없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바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됐다. 이런 상황에 자신이 딱딱한 말투로 말을 한다면 그가 어떻게 받아드릴지 겁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의 억양보다도 지금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확신이 생기자 입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일리트시에 어떤 일이 벌어진 거죠?”
바츠는 충분히 예상이 됐지만 그의 입을 통해 확실히 듣고 싶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를 위해 봉사할 사람은 말레나였습니다. 그녀로 정해진 겁니다. 집사님도 그녀를 아실 겁니다. 며칠 전 올림푸스 앞에서 보았으니까요. 사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전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종종 있던 일이었고, 주민 대부분이 그 일을 위해 한 번쯤은 경험을 했으니까요. 남자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에 온 그 놈이 이상한 병을 가지고 왔다는 거였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그녀를 그 놈에게 데려다 주는 건 제 몫이었으니까요. 그 놈의 가랑이에는 허벅지까지 처음 보는 수포들로 가득했습니다. 고름이 흘러내릴 정도로 심각했죠. 말레나는 당연히 거부했습니다. 겁을 먹었을 겁니다. 나라도 그랬겠죠. 하지만 놈이 그것을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놈은 그녀를 거칠게 대했어요. 제가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일이 빨리 끝나길 바라며, 그녀의 딸과 함께 기다리는 것뿐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겁을 먹은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가 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더군요. 놈은 자신의 옷을 추스르고 있었고요. 주변에 붉은 피도 발견할 수 있었죠. 놈도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제게 다가와서, 저와 함께 말레나를 기다리던 그녀의 딸을 데리고 갔어요...”
샤오밍이 말을 중간에 끊고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언제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그의 눈에서 넘실거렸다. 하지만 밖으로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가 노련하게 감정을 추스르며,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하소연하듯이 말했다.
“맞아요. 전 그녀는 물론이고 그녀 딸에게도 모질게 굴었습니다. 늘 그랬죠. 그 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전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을 미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게도 가족이 있습니다. 전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죠. 저를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서요. 저로 인해서 제 가족이 다치는 건 볼 수 없습니다. 제게 문제가 생겨서 가족이 힘들게 되는 것도 원치 않고요. 그래서 더 규칙과 법을 지키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가 또 한 번 말을 끊더니 바츠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떤 특별한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를 가만히 지켜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바츠는 그를 헌터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차분히 기다렸다.
“집사님,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 스스로도 바츠가 입을 열지 않은 이유를 눈치 챈 것 같았다. 바츠는 이런 식의 변명이 탐탁지 않았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헌터가 아니었다.
“녀석이 아이를 데려가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이대로 일이 마무리 된다면 전 영원히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저와 함께 놈에게서 아이를 데려와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최소한 어떤 노력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가 의자에서 내려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입술을 깨물었는지, 그의 분한 마음이 애가 타서 앓는 소리로 들려왔다. 바츠는 그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잘못은 그나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를 해온 헌터들에게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이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제는 그만 끝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느꼈다. 바츠는 말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그냥 운이 없던 것뿐이에요. 그녀도 운이 없던 거죠. 때마침 그녀 차례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놈이 왔던 것뿐이죠. 문제는 잘못된 관행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헌터들의 그런 요구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습니다. 이전까지는 어땠는지 몰라도 최소한 제가 집사로 있는 한, 제 도시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만들고 싶지 않네요.”
바츠는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아당겨, 그가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샤오밍씨는 지금 당장 일리트시로 가서 시장님과 장로님은 물론이고 주민들에게 전하세요. 더 이상의 봉사는 없을 거라고 말이죠. 그리고 떠날 채비를 해서 돌아오세요.”
“그게 무슨...”
“아이를 다시 데려오고, 그 놈이 죄 값을 치르도록 만들겠다는 말입니다.”
바츠의 대답을 들은 샤오밍은 그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돌아오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바츠는 그가 전진기지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 테이블 위에 있던 프레이 고기 요리를 들고 욕실 안쪽에 위치한 화장실로 가져갔다.
화장실은 세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었다. 한 사람이 자리 잡고 앉으면 딱 맞는 크기였다. 그 중앙에 어른 몸통 크기의 작은 구멍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지 그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지독한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바츠는 그 안으로 테이블 위에서 가져온 프레이 고기 요리를 미련 없이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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