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시험 -- > * 72화 *
바츠는 전에 아르크에서 새로운 전학생들이 지상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던 때가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거나 들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고는 했다. 그 이야기들은 전학생마다 크고 작은 차이를 보였지만, 매번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야기도 있었다. 바츠는 그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용서가 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것은 쉽게 납득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항상 화제의 중심이 되고는 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너무 놀라웠을 뿐이었다. 그래서 어릴 적 어둠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면,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에 지레 겁먹고는 하는 것처럼 환상으로 취급되고는 했다. 그런데 그 환상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 이야기가 사실로써 다가오자 분노가 치밀었다. 호기심으로 듣는 것과 직접 마주한 현실은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호기심이 가볍게 치부되는 흥밋거리였다면 현실은 폐기물 처리장의 고약한 냄새처럼 역겹고 끔찍했다. 한 때나마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즐겼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바츠는 검을 뽑아들어 그를 겨눴다. 그의 입에서 진실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에게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할 셈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단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헤르만은 바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아랑곳없이 모닥불 위에,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고기를 음미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처량한 목소리로 우는 소리를 했지만 오랫동안 굶주렸는지, 고기를 게걸스럽게 입안으로 집어넣는데 바빴다.
“왜 자꾸 내게 아이를 찾는 거야. 아이는 사라졌다고, 사라졌어.”
“그렇겠지, 이 미친 자식아!”
바츠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를 향해 검을 든 팔을 쭉 뻗었다. 검은 모닥불 위를 지나 그의 가슴을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그의 갈빗대를 부수고 폐까지 찔러 들어가기에 모자람이 없는 거리였다. 바츠는 그의 숨통을 단 번에 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칼날에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급한 볼 일이라도 생겼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짐승처럼 보였다. 바츠의 칼끝이 그의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스쳤지만, 그는 매우 여유 있는 모습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에게는 전혀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에 묻은 기름기를 소매로 닦아내는 일이 더 중요해보였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말했지,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고. 네가 겁을 먹고 있다는 건 이미 전부터 알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들은 늘 지독한 냄새를 풍기거든. 난 그게 너무도 화가나.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집사가 그런 냄새를 풍기다니, 믿을 수가 없군.”
바츠는 그의 두 눈에서 섬찍한 기운을 느꼈다. 순간 그의 시선이 온 몸을 옭아맨다는 착각이 들었다.
“정말 매우 실망스럽군.”
그가 장난을 치듯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칼날은 어둠을 잔뜩 머금었는지, 검은색과 혼동이 될 만큼 붉은 빛이 진했다. 바츠는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신의 검은 그에 비하면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해도 믿어질 만큼 말끔했다. 금속의 얼룩덜룩한 하얀 빛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모닥불의 불길을 고스란히 반사시켰다.
그는 바츠의 칼날을 눈으로 확인하더니 뒷걸음질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아르크의 눈에 콘솔을 통해 몸을 감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은 단 하나의 단어만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괴물!’
그는 정말 괴물 같았다. 숨결은 냉랭한 밤공기로 교묘하게 실어 날랐고, 기척은 휘몰아치는 거친 바람과 함께 떠나보냈다. 그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오로지 답답하게 꽉 막힌 듯한 그의 목소리만이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카니지를 들고 있는 녀석을 상대해 본적이 없었지. 상상조차도 해본 적이 없었어. 흥미로운 밤이로군.”
그의 목소리는 즐거움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바츠는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매번 자세를 고쳐 섰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 자체는 두렵지 않았다. 이와 흡사한 곳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었다. 그곳은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곳이었다. 그리고 고요하고 비교적 안전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그때와는 다르게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는 불꽃이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협은 진짜였다. 그 위협이 두려웠다. 조금 전 그의 눈에서 빛났던 섬찍한 기운이 주변 곳곳에 기다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츠는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뜨거운 콧김이 뿌연 연기를 만들었다. 한쪽 콧구멍이 막혔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입을 벌려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뿌연 연기가 더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 연기가 바츠의 입을 떠나 멀리 사라질 쯤, 섬뜩한 금속이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바츠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었다. 황급히 곧추 세운 칼날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동시에 귀가 아플 정도로 따가운 소음이 터져 나왔다. 소름끼칠 만큼 끔찍한 소리였다.
바츠는 고작 한 번 맞부딪쳤을 뿐인데, 승산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의 힘은 자신보다 배는 강했고, 움직임은 도저히 쫓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위태위태하게 그의 공격을 견뎌내는 것뿐이었다. 그의 공격은 어둠 속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고, 바츠는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의 즐거움은 점점 커져갔다. 바츠가 피곤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바츠는 자신감을 잃어갔다. 용케 아직까지 특별한 상처를 입지 않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바츠가 그의 칼날에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는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적당히 하며 맘껏 즐기고 있었다. 처음으로 느끼는 유쾌한 장난을 쉽게 끝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조차도 오래 견디지 못했다. 바보같이 검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그를 쫓아 자세를 바꾸기 위해 움직이다가 그만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바츠는 눈앞이 아찔했다. 서둘러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검을 꼭 쥐고 있는 손을 제외하고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 부위가 없었다. 이를 물고 악을 쓰면 심한 경련만 일어날 뿐이었다. 끝이었다. 이제 그의 마지막 일격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도 그것을 아는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바츠 앞에 우두커니 섰다. 그의 칼끝이 바츠의 가슴을 조준했다.
“잡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어둠을 뒤집어 쓴 채 얼굴만 드러내고는 환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어쨌다고?”
바츠는 그의 물음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와의 대화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대답대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그에게 전했다.
“넌 그저 미친놈이야, 이!...”
“조용!”
그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더니, 두 눈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바츠는 그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다. 냄새가 나.”
그는 바츠가 아닌 허공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더니 눈동자를 좌우로 굴렸다. 마치 술래를 찾기 위한 사람처럼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눈이 아닌 귀를 이용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어앉으며 바츠의 눈높이와 똑같은 위치까지 몸을 숙였다. 바츠는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어깨를 움찔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가 칼끝을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으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유지한 채, 때를 기다렸다. 아주 짧고 빠른 시간이었다. 동시에 그 짧은 시간을 꿰뚫는 길고 날카로운 총성이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어둠을 가르고 날아온 납덩이가 반대쪽 지면을 할퀴듯 따갑게 스치고 지났다. 그가 몸을 세우고 있었더라면 그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했을 궤적이었다.
“뭐야, 아르크의 군인이었나?”
그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심각했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졌다. 조금씩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를 죽이지는 않아. 넌 집사잖아. 헌터에게 살해당한 집사! 전진기지의 운명은? 어때 그때 본 전단지와 비슷한 것 같지 않아?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대신 놈을 죽이겠다. 방금 내게 사격을 한 녀석을 찾아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서, 놈의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 놈의 눈앞에서 먹어주겠어.”
바츠는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미쳤다’라는 것밖에 없다는 걸 확신했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그냥 마구잡이로 내뱉는 것 같았다. 순서가 있다가도 제멋대로 날뛰었다. 그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사이코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졌다. 천천히 피어나던 미소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라?”
붉은 검을 들고 있던 그의 팔이 갑자기 옆으로 뚝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그의 팔이 깨끗이 잘린 채로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지, 잘려나간 자신의 팔에 상처를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어떤 감정의 동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잘려나간 상처로 붉은 피가 쏟아지는데도 매우 침착했다. 표정에 작은 변화조차 없었다. 오로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쏟아지는 피를 지켜봤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 딱딱한 얼굴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네 놈이었군. 네 놈의 냄새였어.”
바츠는 그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서 마치 정전기가 춤을 추든 허공에서 몇 차례 번쩍거리더니, 차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검은 실루엣을 볼 수 있었다. 스타드보다는 조금 작은 몸집이었지만, 그에 뒤지지 않는 단단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운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모닥불의 불빛을 머금었는지 붉은색을 발산하고 있는 카니지가 들려있었는데, 방금 헤르만의 팔을 자르며 묻어났어야 할 붉은 얼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카니지는 핏빛 그 자체였다.
그가 말했다. 차분하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너무 크군, 바츠. 집사가 너무 멀리까지 온 것 아니야?”
바츠는 모닥불이 좌우로 크게 흔들릴 만큼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친숙한 억양을 구분하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절제된 감정 속에서 내뱉어지는 차가운 음성. 바츠는 그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테라치!”
바츠는 그 이름을 소리 내 불렀다. 마치 마법 같은 이름이었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그러자 헤르만이 말했다.
“네 놈 이름이었냐? 제길...소문만 들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실컷 즐겨 봐라.”
헤르만이 테라치를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 같은 미소였다. 그러자 불어오던 밤바람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불어왔다. 더 작고 좁았지만 더 빠르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바츠는 그 바람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쫓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헤르만의 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목에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한 붉은 선이 보였다. 그 선은 점차 굵어지고 진해졌고, 그 선이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헤르만의 고개는 반대쪽으로 기울어졌다. 나중에는 완전히 90도로 꺾여서 그의 뺨이 그의 어깨에 닿았는데, 뼈가 드러날 정도로 벌어진 상처로, 검붉은 피가 쏟아지며 그의 몸을 적셨다.
테라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자, 그의 복부를 강하게 발로 걷어찼다. 그의 몸뚱이는 내던져진 구슬처럼 바닥을 뒹굴었고, 그의 머리는 몸을 떠나 어둠 속 저편으로 데굴데굴 사라져 버렸다.
테라치가 바츠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집에 갈 시간이야, 바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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