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시험 -- > * 74화 *
“그럼 아이는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바츠는 샤오밍과 말레나의 딸을 데리고 도시 앞까지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이 진짜 도시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전진기지로 향했다. 말레나의 딸은 돌아오는 내내 틈만 나면 테라치에게 보내달라며 떼를 썼지만, 막상 도심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얌전하게 변했다. 자신의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고 억지스러운지를 깨달았다기보다는 진이 빠져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아이에게 간단한 위로조차 건네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로 헛된 희망을 갖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틀렸고, 자신이 옳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물론 바츠는 이런 자신의 행동이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도 알고 있었다. 테라치는 아이에게 있어 마지막 피난처였다. 아이는 모든 것을 잃은 자신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바츠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전진기지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후회가 드는 건 아니었다. 두 번 생각해도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바츠는 심란한 마음을 서쪽으로 멀리 보이는, 크고 높은 건물들의 잔해들을 바라보며 떨치려고 노력했다. 도심지로 막 들어서기 전에 발견한 새로운 광경이었다. 거리상으로 보았을 때 그곳은 아르크 인근이었다. 처음 막 발견했을 때, 샤오밍이 과거에 ‘빈니차’라고 불렸던 도시라고 말해주었다. 이 주변에서 가장 번영했었던 곳이라고 했다.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었던 걸 생각해보면, 그도 어디에선가 들은 이야기라서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아르크가 그 도시의 입구 근처에 위치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샤오밍이 아르크 입구 뒤쪽으로 바로 위치한 곳이라고 말해주었다. 자주 오갔을 테니 이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 자신감도 있었다. 바츠는 처음 아르크에서 나올 때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것이 후회가 됐다. 앞만 살필 것이 아니라 침착하게 뒤도 돌아보았다면, 지금 이렇게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어도 됐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진기지로 돌아온 바츠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눕는 것이었다. 요 근래 일들로 기운이 쏙 빠졌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일리트시를 방문했고, 북쪽 기지국에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처음으로 검을 사용해보았다. 또, 일리트시 밖 경작지를 눈으로 보았고 헌터 헤르만의 방문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를 쫓아 동쪽으로 멀리까지 나아가,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편하게 누워서 천장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처음 느꼈다. 비록 더럽고 냄새나는 담요와 깔개였지만,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긴장감이 풀어지자 몸은 절로 나른해졌다.
바츠는 밀려드는 졸음에 눈을 감기 전에, 아르크의 눈을 한 번 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헤르만과 말레나의 프로필을 폐기했다. 이제 일리트시에 소속된 헌터는 5명이었고, 주민은 62명이 됐다. 설명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하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고,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일어날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그 문제를 가지고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금은 눈을 감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우려와는 다르게 편안한 시간이 이어졌다. 바츠는 대부분의 시간을 벽난로 앞에 앉아서 보냈다. 정말 따분한 시간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전진기지 안에서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하루는 지금 자신이 잠에서 깨어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그나마 축음기의 음악소리가 많은 위안을 주었다. 덕분에 적적할 일은 없었다. 축음기마저 없었더라면 지독할 정도로 무료한 시간을 견뎌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때때로 바닥에 잔뜩 깔려 있는 오래된 종이들도 시간을 보내는데 도움이 됐다. 대부분 과거의 신문들이었는데, 알아볼 수 있는 글은 거의 없었다. 허름한 종이만큼 글자들은 낡아있었고, 언어도 너무 다양했다. 그나마 읽어볼 수 있었던 것은 200년 가까이 된 기사였다. 정확히 2021년으로 기록이 되어있었으니, 정말 오래된 것이었다.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당시 다논이라는 기업이 과감한 MnA를 통해 특정 사업을 확장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는데, MnA라는 말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지문을 읽어볼 수 있으면 조금 나았을 텐데, 지문이 정상적으로 남아있는 신문은 거의 없었다. 그냥 사업의 규모를 더 늘리기 위한 수단 중 하나라고만 생각해볼 수 있었다. 가끔 시장이 방문하는 것도 나름 기분 전환이 됐다. 그는 일리트시에서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고는 했는데, 대부분 중요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의무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항생제를 받아가기 위해 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샤오밍도 이따금씩 찾아왔다.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들르는 것이었다. 그는 찾아올 때마다 불평을 했다. 매번 비슷한 소리들이었다. 바츠는 그럴 때마다 적당한 때를 봐서 화제를 돌리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테이블 앞에 앉아, 반쯤 썩은 사과를 두 개째 집어먹으며 불만을 토해냈다. 바츠는 그의 불만을 벽난로 앞에 앉아서 들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주민들은 곧 굶주리게 될 겁니다. 뭐, 자주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화가 나네요.”
“아르크에서 매년 어느 정도는 지원해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바츠는 샤오밍이 아니라 축음기 위에서 돌아가고 있는, 검은 원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샤오밍 역시 굳이 바츠의 얼굴이나 시선을 찾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바츠의 뒤통수에 대고 대꾸했다.
“그건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은 지원이 거의 없어요. 그때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보급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르크에 있어봐서 알지 않습니까, 레벨1 거주자들도 먹을 것이 넉넉하지 않잖아요.”
“그럼 여기 있는 식재료라도 좀 가져가요. 어차피 혼자서 다 먹기 전에 썩을 것 같아요.”
바츠는 이미 대부분 썩었다는 말은 생략했다.
“바보 같은 소리마세요. 차라리 썩는 게 났습니다. 아예 없다면 굶어 죽어야 하니까요. 집사님이 기계는 아니잖아요. 좋아할 사람은 시장뿐일 겁니다. 주민들의 원성이 줄어들길 가장 바라는 사람이니까요. 아, 그런데 시장에게 태양이 하얗게 보이는 이유가 하늘에 먼지가 낀 것 때문이라고 말했다죠?”
바츠는 그때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저 사람들이 뭘 알겠습니까? 집사님이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사실이 한순간에 부정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기분이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주민들 중에는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알아듣겠습니까? 시장이 그러더군요. 집사님이 좀 독특한 것 같다고. 무슨 말인지 아시죠? 절대 좋은 소리가 아닙니다.”
바츠는 시장이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의 험담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꼭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는 뒤에서 누군가를 평가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 평가에서 자신이 자유로울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바츠는 되도록 그와 말을 많이 섞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샤오밍이 한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시장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아이는 잘 있나요?”
“멘디는 항상 잘 있죠. 어려서 그런지 엄마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에요. 잘 된 일이죠. 모르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때가 있네요.”
바츠는 샤오밍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따로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슬픔은 말 못하는 갓난아이들도 아는 것인데, 4살 된 멘디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멘디는 분명 가슴에 큰 상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바츠는 그것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미안했다. 테라치를 따라가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괴롭기도 했다.
“그만 가봐야겠네요. 주변 순찰을 해야 합니다. 더그가 또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겠네요.”
샤오밍이 식사를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츠는 밖으로 향하는 샤오밍 대신, 때마침 멈춰서는 축음기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문을 나서며 사람이 가는데 배웅도 안 해주냐며 투덜거렸지만, 바츠는 아랑곳 않고 축음기의 태엽을 다시 감아 작동시키기 바빴다. 그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다분히 묻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츠는 방안에 다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칼이 이 음악을 왜 20년이나 듣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렇게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신이 맑아졌다. 불평불만은 물론이고 근심과 걱정 같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착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런 감정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졸음도 쏟아졌다. 이렇게 잠든다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 잠들려던 찰나, 계단을 울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워낙 작은 소리인데다가 방안에는 음악소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어서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주기를 가진 발소리가 엇갈려서 들려왔다. 두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조금 전 자리를 떠난 샤오밍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장이 온 것도 아니었다. 그의 발소리는 지금 들려오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바츠는 감기려는 눈을 바로 뜨고 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들이 헌터일 가능성은 매우 적었다.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헌터들이 둘 이상 모여 다니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들이라면 기척을 남길 리가 없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이곳을 알고 있고, 개별적으로 찾아올 만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지 생각해봐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머지않아 바츠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혼자가 아니라 둘이라서 자신은 없었지만, 그 말고는 이곳에 올 사람이 없었다.
“내가 혹시 방해가 된 건 아닌가요?”
바츠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방독면과 소독액에 젖은 자신의 하얀 스카프를 문 앞 옷걸이에 걸으며 물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장로님.”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꾸하며,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그녀에게 권했다. 그러자 그녀가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소독액이 묻었는지,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이 방안 조명에 반짝였다. 젊었을 때에는 자랑스러웠을 만큼 아름다운, 창백한 금발(Ash blond)이었을 같았다. 얼핏 아직까지도 그 윤기가 남아있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