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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75화 (75/268)

< --   7. 시험   -- >         * 75화 *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요.”

그녀는 이곳이 낯설지 않은지, 권해진 자리로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한쪽 다리를 절어서 조금 긴장한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거부감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굳이 자리를 권하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찾았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곳이 매우 익숙해보였다.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바츠에게 지그시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지어보였을 정도였다. 바츠는 입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한 분은?...”

문은 이미 닫혔는데, 그녀와 함께 온 다른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서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되돌아가는 발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밖에 서서 기다린다고 해도, 너무 기척이 없었다. 그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 사이 자리에 앉은 장로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질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누굴 찾는 거죠? 여기까지 나 혼자뿐이었어요.”

바츠는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에 호기심이 묻어났다. 그녀는 진심으로 궁금해 하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문제에 관심이 생기는지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이었다.

“장로님, 하지만 방금 전에 분명...”

“로리나에요. 그냥 로자라고 불러요. 사람들은 날 룩셈부르크라고 부르길 좋아하죠. 하지만 난 로자라고 불리는 게 제일 좋아요. 무엇으로 불려도 상관은 없어요. 하지만 로자는 정말 사랑스러운 이름이죠. 그렇지 않아요?”

로리나가 바츠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별명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명을 언급할 때 만족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불쾌해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잡아끌기라고 할 것처럼 바츠를 향해 자신의 손목을 까닥였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다정한 손짓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내게는 당신을 해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것이 없으니까요. 난 혼자서 걷는 것도 불편한 한낱 늙은이일 뿐이고, 당신은 나를 언제든지 문 밖으로 집어던질 수 있는 용맹한 기사에요. 그러니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요. 그리고 나와 이야기해요. 이 늙은이에게 그 정도 즐거움은 선사해줄 수 있잖아요? 당신에게는 그만한 친절함이 있어요. 내 말이 맞죠?”

바츠는 그녀의 곰살궂은 손짓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 앉았다. 의문의 발자국 소리에 대해서는 저쪽으로 던져놓았다. 대신 다른 의구심을 쫓았다.

“룩셈부르크가 무슨 뜻이죠?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건가요?”

그녀는 바츠의 물음에 함박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대답했다. 동시에 자신의 양손을 턱 바로 아래에서 맞잡으며, 그 기쁨을 표현하기도 했다.

“맞아요. 감이 좋군요. 워낙 독특하기도 하죠? 아주 오래 전에 있던 국가의 이름이에요. 국가가 뭔지 아나요?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이익을 위해 만든 단체에요. 지금의 아르크를 떠올리면 되겠군요. 그게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국가들 중 가장 부유했던 나라가 바로 룩셈부르크였죠. 사람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나 봐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특히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말할 때 그랬다. 바츠는 그게 무슨 소용인지 궁금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가 얼굴 한 가득 웃음꽃을 만개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러자 그녀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장난스럽게 노려보았다. 노려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수줍어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 미소가 묻어났다.

“일전에 헌터가 데려간 아이를 구해온 적이 있었죠? 너무 고마워요. 역시 내 예상이 전혀 틀리지 않았어요.”

“그 말을 하러 오신 건가요? 그거라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따로 제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어머, 다정해라. 안심이 되는 군요. 집사가 이렇게 우리를 그러니까 주민들을 생각해준다면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답니다. 딱딱한 말투가 조금 무섭지만 괜찮아요.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죠?”

“노력해보도록 하죠.”

바츠는 그녀가 미움 받지 않을 수 있도록 교활하게 묻는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이었다. 그녀의 요구가 그리 와 닿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샤오밍이 언급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문제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이들이 테라치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민망한지 손을 내둘렀다.

“농담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요. 겨우 그런 걸로 주민들이 등을 돌리지는 않을 거예요. 주민들이 집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어요? 칼조차도 이런 반응을 얻지 못했어요. 샤오밍이 틈만 나면 당신에 대해 늘어놓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가 그토록 누군가를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믿고 따랐던 칼에게도 그러지 않았죠. 그는 항상 정해진 범위를 크게 넘지 않았으니까요. 당신만큼은 아니었죠. 지금쯤 시장이 매우 질투하고 있을 거예요.”

그녀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시장이 괴로워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매우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재미난 오락거리를 마주한 듯 했다. 그가 정말 곤경에 처하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바츠도 시장이 곤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로인해 그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가 맡은 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름 괜찮은 시장이었다. 바츠는 즐겁게 웃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따로 있으신가요?”

그녀가 웃음을 그치고,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았다.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좀 전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바츠는 그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정말로 꺼내게 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사람마다 각자 하나씩 비밀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요. 비밀이 뭔지 알고 있나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이죠.”

바츠는 대답을 하고나자 테라치가 떠올랐다. 그날 그가 꺼내놓은 프리샤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어떻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그녀가 바로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똑똑하군요. 맞아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많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그건 비밀에서 멀어지는 거죠. 하지만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는 해요. 입 밖으로 꺼내지지만 않는다면 비밀스럽다고 말이에요. 그건 틀려요. 100명이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게 과연 비밀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비밀을 최대한 감추려고 하죠. 비밀이 가진 힘이 음흉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비밀의 진짜 힘은 그것이 밖으로 드러났을 때 가지는 파급력이죠. 비밀은 한 명이 알면 놀라움(surprise)이고, 열 명이 알면 소란(fuss)이며 백 명이 알면 논란(Issue)이지만 만 명이 알게 된다면 혼란(chaos)이에요.”

바츠는 그녀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얼굴 가득 머금은 미소가 단순한 미소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그 뒤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소름끼치는 시선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내게도 그런 비밀이 있죠. 난 당신에게 그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지만 당신이 그 비밀을 나와 안전하게 나눌 수 있는지 알 필요가 있는 거죠. 신뢰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제가 그 비밀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믿어요. 그럴 필요가 있을 거라고 말이죠.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이 그 비밀에 대해서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말이죠.”

그녀는 자신이 할 말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처녀처럼 조신하고 우아한 몸짓이었다. 한쪽 다리만 절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젊은 여자들과 견줘도 될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가슴을 설레게 만들 젊음이 이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기품이 있었다. 바츠는 밖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그녀에 대해 느꼈던 감정과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불편한 몸이 힘들지는 않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생각이 많은지 잠시 텀을 두더니, 고개만 살짝 돌려 대답했다. 바츠는 가까스로 비치는 그녀의 한쪽 눈가가 묘하게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주저함이 드러나지 않던 그녀였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수고는 해야지요.”

그녀는 그렇게 떠났다. 바츠는 그녀의 발소리를 쫓기 위해 노력했다. 문밖 복도에 그녀의 발소리가 울렸다. 샤워장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특별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 느꼈던 또 다른 걸음은 없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샤워장을 빠져나가면 닫히는 문이, 자연스럽게 닫히지 않고 한 차례 머뭇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이미 앞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 말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바츠는 그녀가 떠나가고 나자 마음이 심란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대체 무엇일지 매우 궁금해졌다. 그녀가 일리트시의 시장자리라도 노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스티그마타에 대한 집착이 늦게라도 생긴 걸까? 또한 그녀와 함께 동행한 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일리트시의 군인은 아니었다. 그들은 저만큼 기민하지 못했다. 그럼 헌터였을까? 바츠는 아르크 눈을 작동시켰다. 인근에서 헌터의 코드는 발견되지 않았다. 장로의 방문이 생각을 많아지게 만들었다. 따분한 일상에 균열을 만들어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바츠는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밖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총성과 비슷하다고 하는 게 옳았다. 뭔가 폭발하는 소리였는데, 총성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더 뭉툭하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방 전체가 진동했다. 그 파동이 지축을 뒤흔드는 것 같았다.

바츠는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처음 겪는 경험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방독면 밖으로 호흡이 거칠게 빠져나갔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상으로 가기 위한 계단에 다다랐을 때에는 그 폭발음이 연속해서 들려왔다. 방 안에서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우렁찬 소리였다. 바츠는 깜짝 놀라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정신이 없어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 폭발음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반복됐다. 바츠는 한참동안이나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눈앞에 계단을 두고도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폭발음은 계속해서 들리는데, 그 다음이 없었다. 누군가의 비명소리나 무엇이든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바츠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서 조심스럽게 계단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하늘에서 뭔가가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츠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방독면의 렌즈에 알알이 투명한 액체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지상에 올라섰을 때에는 렌즈를 타고 흘러내릴 정도였다. 바츠는 그것을 손으로 닦아 문질러보았다.

“물...”

그것은 물이었다. 하늘에서 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물이 온 몸을 적셔왔다. 머지않아 거칠게 부는 바람소리를 내며 세상을 희뿌옇게 만들었다. 그 폭발음도 간헐적으로 계속 됐다. 바츠는 그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지만, 몇 번 더 들었을 때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린 물로 흠뻑 젖는 몸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다. 물에 젖으면 젖을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슴이 부풀며 날숨을 뜨겁게 만들었다. 바츠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벽에 가로막혀 하늘이 원형으로 보였다. 그 틈바구니로 물이 계속 쏟아졌다.

“비...”

바츠는 아르크에서 배웠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이라고 했다. 그 축복을 온 몸으로 받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터질 듯이 뛰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켜야 했다. 바츠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슬픈 건 아니었다. 젖은 몸이 무겁고, 습기로 찝찝했지만 묘하게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질렀다. 목에 힘이 풀려 나중에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니?”

바츠는 치켜든 고개를 다시 바로 했다. 그러자 눈앞에 검은 망토로 온 몸을 두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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