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시험 -- > * 76화 *
“그래서? 그래서 그러고 있었단 말이야? 너 진짜 집사 맞아?”
그녀의 이름은 레나타였다. 갈색 머리칼과 조금 붉은 빛이 도는 어두운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비에 젖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는 바츠의 대답을 듣고는, 샤워장을 지나 복도를 걷는 내내 배를 잡고 웃었다. 어찌나 좋아하더니, 안으로 들어서서 방독면을 벗었을 때 그녀의 눈가는 눈물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뒤늦게 바츠가 이곳 집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몸을 튕기고 뒤틀며 발작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좋아했다.
바츠는 그녀와 함께 걷는 동안 대답을 한 것에 대해 계속 후회했다. 얼떨결에 대답을 한 것이 놀림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누군지 알게 된 것은, 함께 벽난로 앞에 앉았을 때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그녀는 마주보고 앉은 바츠의 얼굴이 잔뜩 굳어진 것을 발견하고 나서야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그전까지는 그녀가 헌터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된다는 건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조롱을 받는 것은 아르크에서만으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이미 헤르만을 통해서 스타드의 말이 옳았다는 걸 경험했던 터라 더더욱 후회가 됐다.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던 물에 젖은 몸이 그저 무겁게만 느껴졌다.
“너 그럼 비를 처음 본 거야? 귀엽네.”
바츠는 그럼에도 그녀와 비교적 많은 대화를 나눴다. 몇 마디 나눠보니 그녀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헤르만보다는 스타드 쪽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아델리나가 자란 모습처럼 보였다. 목소리도 크고 흥분한 사람처럼 항상 들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말 한마디 한마디와 표정 하나하나가 적극적이라는 것이 닮아있었다.
그녀는 북동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지연구소라는 곳을 다녀왔는데, 물에 잠겨 안을 살펴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헤러티커를 만나 곤욕을 치른 이야기도 했다. 아르크 눈의 콘솔을 통해 무사히 빠져나올 수는 있었지만, 놈의 발톱으로 턱밑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있는 걸 보면 감염은 없는 것 같다고 즐거워했다. 그녀의 턱밑에는 그때의 상처로 보이는 가늘고 긴 붉은 자국이 아직까지 남아있었다. 바츠는 보답으로 이곳에 언제 왔는지 그리고 비를 맞으며 느낀 기분이 어땠는지를 이야기해주었다. 중간에 그녀가 맵에 표시가 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물을 필요는 없었다. 슬쩍 훔쳐본 그녀의 아르크 눈은 한 눈에도 전원이 꺼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대화가 즐거웠는지 꽤나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츠가 앉은 자리를 가리켰다가, 팔짱을 끼고 몸을 뒤로 기대는 둥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난 집사라고 하면 다 뻣뻣한 얼굴을 하고는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칼처럼 말이야. 그 노인네가 그런 표정으로 거기에 앉아있었다니까. 반응도 없고, 대꾸도 없이 말이야. 대체 그 늙은이는 여기서 뭘 했나 몰라. 들어보니까 저쪽 주민들을 상대로는 나름 친절하게 군 것 같았는데...나한테만 그런 건가? 아유, 아무렴 어때. 어차피 그 늙은이는 이제 없고 네가 있는데. 안 그래?”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말을 아꼈다. 실제 그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그는 나름대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군인들을 대신해서 순찰을 돌기도 했고, 아이기스를 쫓아내기도 했다. 대부분 군인들을 위한 행동들이기는 했지만 집사가 해야 할 일들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그를 모욕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바츠가 대답을 않자, 몸을 배배꼬며 말했다. 꼭 앉은 자리에서 춤이라도 추는 것 같았다. 얼굴에는 야릇하고 도발적인 미소가 걸렸다.
“뭐야, 왜 대답 안 해? 이제라도 집사답게 굴고 싶은 거야? 그러지마. 우리 지금까지 좋았잖아.”
그녀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바츠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진짜 바츠를 자극한 건 그 다음 행동이었다.
“너 그럼 이런 것도 잘 모르겠네? 그렇지?”
그녀가 배배꼬던 몸의 리듬에 맞춰서 자신의 한쪽 가슴을 상의 밖으로 끄집어냈다. 몰래 곁눈질로 훔쳐보았던 주먹만 한 크기의 아델리나와는 달랐다. 그녀의 가슴은 징그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커다랬다. 사람 머리 크기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이 경악스러웠지만 자꾸만 쳐다보게 만들었다.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과 같은 웃음이었다. 동시에 비아냥거리는 듯한 느낌이 얼굴에 묻어났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애틋한 감정이 느껴졌다. 환하고 밝은 표정 속에 불순한 욕구가 숨어있었다. 바츠는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쁠 틈이 없었다. 그녀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움직임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전진기지에 며칠을 머물렀다. 완전히 눌러앉은 사람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가지고 있던 불순한 욕구를 바츠에게 마음껏 해소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기겁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거부감은 점차 사라졌다. 눈을 뜨면 전진기지 어딘가에서 그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가끔은 기대감을 가질 때도 있었다. 분명 그녀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반감이 들었지만 그 표현이 그리 완강하게 나오지는 않았다. 그 반감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강렬한 쾌감 때문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바츠는 그녀와 꼭 달라붙어있는 동안 몇 번이고 저항을 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너무 좋았다. 정확히는 이런 그녀가 좋았다. 한 끼 얻어먹기 위해 무심코 찾아왔던 샤오밍이 놀라서 황급히 돌아가기도 했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며칠 뒤 또 다른 헌터가 방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언제쯤 이런 생활이 끝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문 앞에 서서 방독면을 벗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집사에게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바츠는 그의 등장에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너무 부끄러웠지만, 그녀는 그때까지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엉겨 붙은 몸뚱이를 계속해서 움직이며 교성을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샤오밍처럼 몸을 돌려세웠다면 그나마 좀 나았을 텐데, 그는 바츠와 레나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두르고 있는 검은 망토 위에 안팎의 기온차로 김이 피어오르는 모습은 꼭 그가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레나타는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을 때 비로소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장난스런 말투였다. 놀라거나 긴장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매우 익숙해보였다. 바츠와는 정 반대였다. 바츠는 그녀가 비켜서자마자 몸을 추스르는데 정신이 없었다.
“난 칼을 이야기 한 것인 줄 알았는데?”
“집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에게만 있는 건가?”
그는 그제야 후드를 뒤로 젖히고 방독면을 벗었다. 그러자 그의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그의 눈빛은 칼날만큼 날카로웠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보이는 화난 모습이었다.
“어차피 지금 가려고 했어!”
그녀는 자신의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고, 밖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섰던 그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물었다.
“먹을 건 넉넉히 챙겼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바츠에게 그랬던 것처럼 몸을 살랑살랑 흔들며 그에게 교태를 부렸다.
“스타드, 그래도 내가 걱정이 되긴 하나 보지?”
그녀는 스타드의 관심을 받자 매우 기쁜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찰싹 달라붙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였다.
“가능한 멀리 가서 최대한 오랫동안 돌아오지 마라.”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구겨졌다. 눈빛만으로도 그를 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두 눈에 독기가 가득 서렸다. 그녀는 그에게 침을 뱉고는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의 얼굴에 뱉으려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였지만 정작 그녀의 침이 날아간 곳은 그의 왼쪽 어깨였다. 그녀는 분한지 씩씩거리며 이곳을 떠났다.
스타드는 그녀가 떠나자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아직도 몸을 추스르느라 우왕좌왕하는 바츠를 못 본 채 지나쳤다. 그는 벽난로 앞 자리에 최대한 편안하게 앉았다. 여행이 고되었는지, 몸을 완전히 늘어뜨렸다.
바츠는 맞은편 자리로 서둘러 몸을 옮기며 말했다.
“미, 미안해요. 그러려던 것이 아닌데...”
“알고 있다.”
바츠는 그에게 어떤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변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무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귀찮은지 성의가 없는 말투였다.
“정말 싫었어요. 하지만...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것도 알고 있다.”
바츠는 이번에도 그가 무관심하게 대답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변명을 마저 끝낼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냉담한 태도의 그의 말투에 묘한 동정심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정말로 이해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했던 말을 벌써 잊은 모양이군. 내게 허락을 구하지 마라. 너는 여기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고 도시에 뭐든지 명령을 내릴 수 있지. 내게 미안해하지 마라. 넌 그저 여기서 무엇을 하든 헌터들을 위로하고 도시를 관리하면 그만이다. 너에 대한 평가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나는 네가 요구하면 그렇게 할뿐이다. 그것이 이곳의 룰이다. 네가 잊으라며 잊겠다. 평가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우리들을 하는 것이다. 네 한마디가 이것을 내 공로로서 인정할 수도 있고, 내 과오로 취급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스타드가 주머니에서 헤러티커의 엄지를 세 개나 꺼내 벽난로 안쪽으로 집어던졌다. 바츠는 귀한 물건이 시커먼 재를 뒤집어쓰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지만, 그것을 굳이 밖으로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가 헤러티커 엄지를 그 안으로 던져 넣은 이유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벽난로 안에 버린 것이었다.
“이제 내 이야기를 들어주겠는가?”
바츠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잠을 자려는 것처럼 눈을 감고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에 그가 헌터들이 수다쟁이라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이야기였다. 때때로 말을 하고 있던 본인 스스로가 흐름을 잃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어 붙이기도 했을 만큼 장황한 이야기들이었다. 바츠는 그저 그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으면 됐다.
============================ 작품 후기 ============================
음...사실 이번화 때문에 19금 설정한 것이었는데 막상 쓰다보니 그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고 말았네요...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굳이 필요가 없다고 판단이 됐습니다. 중간에 갑자기 훅 지나쳐지는 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씬이 있는 부분입니다. 그 씬 자체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묘사는 없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시더라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용서해주세요...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