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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77화 (77/268)

< --   7. 시험   -- >         * 77화 *

스타드가 가장 먼저 꺼내놓은 이야기는 남동쪽으로 열흘 거리에 있는 병원 건물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그곳에 의무기록을 수집하기 위해 갔다고 했다. 하지만 멀쩡한 단말기는 존재하지 않았고, 동력도 없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기록실에 남아있던 문서들 역시 이미 앞선 헌터들에 의해 수거되었거나,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유실되고 훼손된 것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 나오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미련을 두지 않고 돌아섰는데, 때마침 건물 안으로 사람들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들에 대해서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쳐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앞에 섰던 사람의 왼쪽 옆구리에, 익숙한 문장이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그가 황급히 몸을 돌려세우며 뒤로 감췄지만, 그것이 아이기스의 상징인 케찰이라는 걸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그냥 지나쳤다고 말했다. 그들의 수가 무려 다섯이나 됐고 앞에서 두 번째 선 사람에게 실탄이 든 것으로 보이는 화기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그곳은 병원이었고 그들 중 한 명은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심한 기침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스타드는 이야기를 끝내고 바츠에게 용서를 구했다.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사죄였다. 바츠는 그를 용서했다. 그에게 잘했다고 하려던 말은 도로 삼켰다. 불필요한 말이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곳에 과연 기침약이 있었을까?”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도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진기지의 공기가 탁해서 숨을 쉬기 어려운 듯 보였다. 바츠는 생각했다. 전진기지의 공기가 맑았던 적은 없었다고. 그 때문인지 스타드는 한동안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꺼내놓은 이야기는 북쪽으로 정처 없이 걸을 때 이야기였다. 그는 정확히 며칠을 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캄캄한 밤을 두 번 정도 걸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잠을 자지 않은 탓인지 그날따라 날씨는 더 추웠고, 이상한 악취도 맡을 수 있었다고 했다. 문제는 이 악취였다. 이 악취가 그를 계속해서 괴롭혔다고 말했다. 신체 기능을 최대 1.5배까지 상승시켜주는 웜업(Warm-Up) 콘솔을 통해 추위는 어느 정도 이겨냈지만, 악취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혹시 헤러티커라도 따라붙은 것은 아닌지, 몸을 숨기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고 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냄새가 너무 심해져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꼭 그 악취가 자신의 냄새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했다. 그래서 근처 바위 옆으로 몸을 감추고 신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오른쪽 팔꿈치에서 혈흔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날 노상강도들을 만났을 때 묻은 것 같다고 말했다. 게다가 매우 소량이었다고 했다.

노상강도는 먼저 위해를 가해오지만 않는다면 헌터의 척살 대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크루엘라같은 질병을 막을 수 있는 보호 장구는 물론이고 생명을 유지할 만한 최소한의 식량도 허락되지 않은, 잠재적 감염자인 동시에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은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게 취급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약탈을 위해 달려들었었고, 그는 그들을 간단히 살해했다고 했다.

스타드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참는 것처럼 호흡을 멈췄다. 속이 불편한지 헛구역질을 두어 차례 할 것처럼 보였지만 딱히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가슴이 무엇인가로 틀어 막힌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눈을 뜬 것도 그때였다. 평소처럼 빈틈없이 단단해 보이는 회색빛 눈동자가 아닌, 어미를 잃은 짐승처럼 처량하고 힘이 없는 눈이었다. 그가 말했다.

“놈들을 쓰러뜨리고 나니까 멀리서 울음소리가 들려오더군. 내게 그 울음소리를 추적하는 것쯤은 매우 쉬운 일이지. 그 울음소리의 정체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고 난 뒤에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곳에는 낡은 고철과 폐자재로 겨우 윤곽만 갖추고 있는 집이 있었거든. 문도 따로 없고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지경이었으니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지. 그런데 그 안에는 울고 있는 아이 둘이 있었다. 부모는 보이지 않더군...”

그가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입을 닫았다. 바츠는 입을 닫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시선이 허무함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에게 다른 때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아니면 이제라도 집사답게 그냥 가만히 기다려야 하는지 너무 혼란스러웠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앉은 자리가 불편해 자세를 고쳐 앉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이 꼼짝도 하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가 때마침 말을 잇지 않았다면 미쳐버렸을지도 몰랐다.

“대체 왜...대체 왜! 왜 내게 달려든 걸까? 그토록 절망적인 상황이었나? 내가! 내가 누군지 몰랐던 걸까? 그들은 대체 무엇을 바란 것이지?”

스타드는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던 것을 밖으로 토해내듯이 소리쳤다. 잔뜩 흥분해서 화가 난 사람처럼 굴었다. 바츠를 항해 달려들기라도 할 것처럼 상체를 바짝 세우기까지 했다. 바츠는 그런 스타드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이었다. 그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그는 항상 여유롭고 자신만만할 줄만 알았다. 하지만 오늘 그의 모습은 정 반대였다. 절벽 끝에 내몰린 사람처럼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바츠는 순간 과거에 그와 칼의 대화를 엿듣던 중, 그가 칼에게 자신은 최소한의 감성을 지키고 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헌터가 아닌 평범한 다른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최소한 말이다. 하지만 헌터들에게 있어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동안, 눈앞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헌터 본인의 죽음을 마주하도록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이 매년 한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어려울 만큼 혹독한 훈련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그들에게 잠깐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매우 척박했다.

바츠는 그가 자신에게 이곳에서 헌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라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집사로서 그 일을 왜 해야만 하는지 명확하게 납득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헌터의 약점이 집사라고 했던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헌터 그들이 아무리 강하고 차가운 영혼을 가졌다지만, 그들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들도 여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저 혹독한 훈련을 통해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그들에게도 동정심과 인간미가 존재했었다. 그 혹독한 과정이 그들에게서 그 감정들을 억누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토대로 지상에 공포와 고통을 뿌렸다. 아르크를 지키고 인류의 재건을 위한다는 미명을 가지고 있지만, 온갖 악행을 자행하고 당당하게 살인을 저지르는 일이었다. 그로인해 그들의 가슴에 심어지는 악의가 그들을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니도록 만들었다.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감성을 완전히 앗아간 것이다. 그들이 홀로 다니는 것을 즐기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마음속에 스며든 외로움과 공허함은 그 끔찍한 순간들을 모조리 빨아들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가끔 그 안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 감정 표현이 과장되거나 서툴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이 그 악의로부터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헤르만이 그런 경우다. 그는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낯선 곳을 누비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가지고 겨우 살아 돌아오지만 어디하나 환영해주는 곳이 없는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듣고 싶은 사람조차 없을 것이고, 이해를 해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오직 이곳에는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한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떤 이야기라도 묵묵히 들어주는 유일한 존재. 그들이 외로움과 공허함에 담아온 온갖 악의를 받아주는 사람. 집사는 그들에게 있어 마지막 피난처였던 셈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집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에게는 제약이 없는 자유가 있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바츠는 새삼 스타드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다른 헌터들에 비해 자신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말이 많고, 진한 고독을 품고 있었지만 나름 잘 조절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시나 그런 악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테라치와 아델리나 그리고 버니에투와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최근에 보았던 테라치는 그나마 괜찮아 보여서 안심이 되었지만, 지상으로 나온 뒤로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델리나와 버니에투와에 대해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둘은 테라치에 비해서 냉정하지 못했다. 자신을 잘 지켜내고 있을지 너무도 염려스러웠다.

그 사이 스타드가 다시 눈을 감고 몸을 뉘며 말했다. 흥분했던 가슴을 금방 잘 추스렀는지, 많이 진정된 목소리였다.

“난 그 아이들을 데려올 수 없었다. 알다시피 그들은 방독면 없이 지상에서 생활을 하니까 말이야.”

바츠는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가 전부 털어놓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지쳤는지 목소리에 기운이 점점 사라져 갔다. 천천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이미 잠든 사람처럼 잠꼬대를 하듯 말했다.

“모든 사람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 어떤 강제력이 있거나 그럴싸한 포장만 있다면 안 되겠지. 다름과 차별은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아이기스는 물론이고 모든 것이 말이야...하지만 내게는...그럴 용기가...아직...없다...”

바츠는 그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축음기를 작동시켰다. 그를 위한 것이었다. 그가 꿈속에서나마 안식을 찾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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