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시험 -- > * 78화 *
다음날 스타드는 잠에서 깨자마자 바로 전진기지를 떠났다. 다시 떠나는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아무런 망설임 없는 당당한 눈이었다. 모든 것이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는 그런 눈으로 덤덤하게 떠났다. 어제의 기억은 모두 잊은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가 떠나고 나자, 긴 한숨이 쏟아졌다. 커다란 짐을 하나 덜어낸 기분이었다. 먼 길을 떠나갔다 온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축음기도 밤새도록 고생을 했는지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방안에 고요함이 가득했다. 그러자 고음의 가는 사이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전진기지가 이따금씩 신음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고 있는 엄청난 무게의 흙에 고단한 모양이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킬 때나 날 법한 뚜둑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속에서 약간의 진동음도 들렸다. 지하창고에 있는 발전기가 내는 비명소리였다. 바츠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언젠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는 걸 느꼈다. 그때도 이렇게 가만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그때만큼 흥분하거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도리어 훨씬 차분했다. 잠자리에 누운 것처럼 편안했다. 이미 이곳에서 제법 긴 시간들을 지내오며 익숙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츠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지하창고에서 음식들을 꺼내왔다. 완전히 썩은 사과와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 껍데기였다. 바츠는 그것을 둘 다 꼬치에 꿰어 오븐에 넣어 바짝 구웠다. 겉이 새카맣게 탔을 정도로 구웠다. 그리고는 탄 부분은 전부 도려내고 나머지만 먹었다. 수분이 완전히 빠져나간 덕분인지는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았다. 입안이 텁텁하기만 했다. 사과 안쪽에 남은 떨떠름하고 씁쓸한 맛이 뒤늦게 느껴졌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니었다.
바츠는 포만감이 느껴지자, 기분이 나름 좋아졌다. 졸린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노곤했다. 벽난로 앞에 앉아 긴 하품이나 연거푸 해댔다. 하지만 우연히 아르크의 눈에 고정된 눈길이, 그 노곤한 기운을 완전히 날려버리고 정신이 바짝 들게 만들었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이었다. 즐거운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흥분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르크의 눈이 외부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으니 어서 확인해보라고 알리고 있었다.
바츠는 그 메시지가 누구로부터, 어떤 의도로 왔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이미 한껏 들떴다. 가슴이 벅찰 만큼 설렘으로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디론가부터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자신에게 엄연히 가족이 있고,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토록 기쁜 것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헌터들이 자신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무슨 기분을 느낄지 상상이 됐다. 그리고 메시지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 기쁨은 환희로 변했다. 너무 그리웠지만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정말 끔찍한 순간에 놓였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떠오른 그 이름!
“벨리타!”
바츠는 그 이름이 제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눈을 씻고 다시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발신자에 그녀의 이름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틀림없었다. 아르크에서부터 온 벨리타의 메시지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바츠는 웃음이 절로 났다. 입 꼬리가 양 볼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멍청해 보일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옆에 누군가 있었더라면 바보 같다며 놀림감이 되었을 것이다. 상관없었다. 지금은 어떤 놀림을 당해도 웃어넘길 수 있었다. 몸에서 더러운 냄새가 난다고 조롱하던, 다른 레벨 아이들의 구박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츠는 떨리는 가슴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갓난아기의 볼을 어르는 것처럼 아르크 눈의 화면을 터치했다.
‘안녕? 이거 제대로 가게 될지 모르겠네...바츠, 맞지? 제발 네가 맞길 바라. 나야, 나! 벨리타! 설마 나를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럼 정말 슬플 거야. 네가 지상으로 무사히 나갔다고 케일리에게 들었어. 난 우리가 인사라도 하고 헤어질 줄 알았는데 너무 안타깝다. 지상으로 나갈 때에는 케일리에게조차 인사를 하지 않았다면서? 정말 못 됐다! 케일 리가 정말 슬퍼했어. 혼내줄 거야! 물론 농담인 거 알지? 이렇게 만나지도 못할 걸 알았다면, 네가 3학년이 될 때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았을 텐데...미사훈련소에 찾아가 막 떼를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면 믿겠어? 정말이야. 네가 떠난 뒤로 너무 속상해서 한동안은 미사훈련소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어. 네가 너무 보고 싶다. 난 지금 레벨5에 있어.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연구원이 되었다는 뜻이야! 물론 아직은 정식으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만간 나도 다른 연구원들처럼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실험하고 할 것 같아. 그리고 그때쯤이면 우리 가족들이 레벨2에서 레벨4로 이사를 할 수 있겠지? 너도 분명 내 옆에 있을 테고. 그렇지? 그게 언제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그때까지 무사해야 돼. 알겠지? 아...이 메시지가 네게 잘 도착했으면 좋겠다...’
바츠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마구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가 온 몸을 마구 간질이고 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지나치지 않은, 너무 기분 좋은 손길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몸을 좌우로 번갈아 뒤척여야 했다. 의자의 털이 그녀의 머리카락 같았다.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그 간지러운 기분을 더 느끼기 위해 애를 썼다. 그 와중에도 웃음은 계속 됐다. 주변이 요란해질 정도의 박장대소가 아닌,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가볍고도 맑은 웃음이었다.
바츠는 한참을 그렇게 혼자서 뒹굴 거리다가 버뜩 정신을 차렸다. 답장! 답장을 보내야 했다. 그녀에게 아무 일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그리고 너무 보고 싶다고 보냈다. 케일리의 안부를 묻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는 두 무릎을 모아 가슴팍까지 끌어당겨놓고, 아르크 눈의 화면만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다시 보내올 메시지를 기다릴 작정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내내 좀이 쑤셔서 견디기 어려웠다. 괜히 엉덩이를 몇 번이나 들썩거렸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정확히 얼마나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은 틀림없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고 느껴질 만큼 허기가 지는 걸 보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반나절은 흐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바츠는 아르크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세도 여전히 처음 그대로였다. 기분이 침울했다. 보낸 메시지가 제대로 가지 못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녀가 너무 바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메시지가 더 왔으면 좋았겠지만,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일리트시에서 군인이 찾아왔다. 종종 다녀가던 샤오밍이 아니었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던 커다란 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도 훨씬 가늘고, 굴곡이 많았다. 바츠는 그가 방독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줄 때까지 기다렸다.
“셀레나에요.”
그녀는 방독면을 벗는 동시에 바츠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바츠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 했다. 그녀는 말아 올린 자신의 머리카락이 벗어젖히는 방독면에 걸려 헝클어지자, 고개를 한 차례 털어 손도 대지 않고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능숙한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물었다.
“뭡니까!”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슴이 모닥불의 불꽃처럼 사정없이 튀었다. 그녀가 뜬금없는 상황에 검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영문도 모르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바츠는 그제야 자신이 단단히 실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에게 화풀이를 한 것 같아 민망하고 머쓱했다.
“쳇! 별일 아니에요. 무슨 일이죠?”
바츠는 애써 마음을 추스르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벨리타에 대한 야속함이 애꿎은 셀레나에게 퉁명스럽게 굴도록 만들었다. 셀레나가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차분하게 말했다.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프레이를 잡겠다고 나간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어요. 동쪽으로 조금 가면 일부가 물에 잠긴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프레이가 자주 나타나거든요. 그런데 지금쯤이면 사냥 성공여부를 떠나서 돌아왔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오지 않았어요.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 가족들이 확인해야겠다며 소란을 피우고 있거든요.”
바츠는 그녀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기에는 너무 귀찮았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벨리타의 메시지를 그런 곳에서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그럼 확인해보도록 해요. 혼자 가지 말고 더그나 샤오밍과 함께 가도록 해요.”
“네...하지만 지금 둘은 ES2로 순찰을 나가있어요. 남쪽에 있는 기지국 중 하나죠. 거리가 있어서 돌아오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도시에 군인은 현재 저뿐이죠. 가족들은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거예요. 그들끼리 가보겠죠. 그곳에는 특별한 위험이 없거든요. 주민들이 프레이를 잡기 위해 종종 가는 곳이라, 그들에게도 제법 익숙할 거예요. 하지만 아이기스 녀석들을 언제 어떻게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니 조심하는 게 좋죠. 군인이 최소 한명 동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장님이 노발대발하더라고요. 도시에 군인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말이죠. 그래서 집사님께 찾아온 거예요. 제가 그곳을 다녀올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말을 하려고요.”
“그래요.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시장님께는 제가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죠. 대신 늦더라도 결과를 꼭 알려주세요.”
바츠의 대답을 들은 셀레나는 곧바로 몸을 돌려세웠다. 바츠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방독면을 다시 쓰기도 전에 그녀를 불러 세웠다. 화가 날 정도로 피어오른 짜증 때문에, 그녀를 급히 내쫓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그러지 말고 셀레나는 도시로 돌아가도록 해요. 내가 가보도록 하죠.”
셀레나가 놀란 얼굴로 대꾸했다.
“네? 꼭 그러지 않아도 되요. 어차피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일은 없으니까요. 미련이 남아서 오지 않고 있는 걸 거예요. 가끔 이런 일이 있거든요. 게다가 요즘은 주민들이 평소보다 더 굶주리고 있어요. 분명 프레이 사냥에 실패해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걸 거예요.”
“아아, 상관없어요. 바깥 공기도 마시고 싶고, 따분해서 그러는 거니까요. 그러니 셀레나는 돌아가도록 해요.”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셀레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채비를 하는 바츠를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문제가 좀 있어요. 집사님께는 꽤 성가신 문제죠.”
바츠는 그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프레이 사냥을 간 주민들을 찾아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일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셀레나는 말보다 행동으로 그 문제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바츠를 데리고 전진기지를 나서서는 도심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그녀의 말로는 그들 중 둘은 프레이 사냥을 간 주민의 가족이고 남은 두 사람은 프레이 고기를 기다리는 주민들 중 일부라고 했다. 바츠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길을 떠날 것처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비라고 해봤자 방독면을 쓰고 옷을 단단히 여미는 것뿐이었지만, 그들은 전쟁터라도 나가는 사람들처럼 각오가 대단해 보였다. 바츠는 물었다. 이 엉뚱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했다. 그러자 셀레나가 말했다.
“프레이를 사냥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주민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주거든요. 힘을 내라는 응원의 일환이죠. 그런데 지난번 그 프레이 사냥을 하러 간 사람들이 이번처럼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그 이유가 잡은 프레이를 사냥을 갔던 그들끼리 나눠 먹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저 둘이 따라나선 거예요. 그때 프레이 사냥을 간 사람들이 이번에 간 카인과 레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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