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80화 (80/268)

< --   7. 시험   -- >         * 80화 *

바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반대쪽까지 중앙을 가로지르는 통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열 명이 나란히 지나가도 충분할 만큼 넓은 통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양쪽 벽을 따라서 늘어섰던 것으로 보이는, 각종 집기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어 그 절반도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헤이즈가 그 통로를 따라 어느새 가운데 지점까지 나아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어이! 어디에 있는 거야! 당장 나오라고,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아!”

“입 닥쳐! 내 아들을 욕하지 말란 말이야!”

그 뒤를 따라 이제 막 통로로 들어서던 스텔라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소리칠 힘은 남았지만, 아직 혼자서 걸을 힘은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온갖 장애물들로 복잡한 중앙 통로를 여전히 그레이에게 몸을 기댄 채로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레이는 자신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 그녀 때문에, 자세가 불편해보일 만큼 어정쩡했지만 싫은 소리 한마디 없이 묵묵히 그녀를 데리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바츠는 바로 그들을 쫓지 않고,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중앙 통로의 절반 정도 되는 너비의 복도가 건물 양 끝까지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각각 왼쪽과 오른쪽으로 꺾여 들어가는 코너가 보였는데, 중앙 통로에 비해서 장애물이 적어 훨씬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호수의 물이 차올라 있는 오른쪽 복도는 선태류로 보이는 거뭇거뭇한 것들이 벽과 바닥은 물론 천장까지 덮고 있어 화장실만큼 더러워 보였다. 그쪽으로는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도 풍겨오는 것 같았다.

“아마 4층에 있을 거예요. 그곳에 쉴 만한 공간이 있거든요.”

셀레나가 중앙 통로 반대쪽 끝에 있는 굴절계단을 가리켰다. 바츠는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리자, 헤이즈가 막 그 앞에 도착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계단 위쪽을 향해 또 한 번 소리를 질렀다.

“이 쓰레기 같은 녀석들! 당장 나오지 못해!”

“더러운 놈! 헤러티커에게 찢어발겨질 놈!”

스텔라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누기 힘들어 보였던 몸을 날렵하게 일으켜 세우더니, 헤이즈를 향해 무섭게 달려 나갔다. 그레이가 갑자기 자신의 품을 뛰쳐나가는 그녀를 말려 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길을 피해 달아났다. 그녀는 녹이 슨 금속 로커(locker) 더미를 힘겹게 밟고 올라서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부품들은 옆으로 비켜내며 단숨에 헤이즈의 앞에 다다랐다. 나름 서두른다고 안간힘을 쓴 모양새였지만, 지켜보는 사람 눈에는 그저 앙상하게 마른 한 여인의 눈물겨운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헤이즈는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다가오는 스텔라가 자신의 바로 앞에 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에게는 언제든지 그녀를 따돌리고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달려와 자신의 멱살을 잡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놈! 이 추악한 놈! 나를 욕보인 건 상관없지만, 내 아들은 안 된다! 내 아들 욕을 다시 한 번 해봐라! 다시 한 번 해보라고!”

스텔라가 이번에는 그의 멱살을 단단히 잡은 모양이었다. 헤이즈의 몸이 앞뒤로 크게 흔들렸다. 스텔라가 온몸을 내던지듯이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가 아주 잠깐 균형을 잃게 만든 것이 고작이었다. 헤이즈가 그녀의 손길을 가볍게 뿌리쳤다. 스텔라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다행히 아까처럼 바닥에 내팽겨 쳐지지는 않았다. 헤이즈가 그런 그녀를 잠시 지켜보고는 양손으로 그녀의 가슴팍을 세게 밀쳤다.

“거, 꼴 같지도 않은 몸 한 번 줘 놓고 더럽게 우려먹는군.”

스텔라는 결국 또 한 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엉덩방아를 제대로 찧었다. 그녀의 짧은 비명이 입구까지 들려왔다. 놀란 그레이가 허겁지겁 달려가 그녀 옆에 바짝 달라붙었다. 그러자 헤이즈가 몸을 삐딱하게 서서 그를 한심해하는 태도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참 고생하네. 그 년이 그렇게 탐이 나나? 그 년이 어떻게 해야 다리를 벌리는 지 알려줘? 그렇게 알뜰살뜰 챙겨 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냥 먹다만 물 한 모금이나 감자 한 조각 던져주면 된다고. 아마 아르크에서 나눠주는 패치 식량 하나 주면 하루 온 종일 벌리고 있을 년이야.”

스텔라가 헤이즈를 향해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대체 그 마른 몸으로 어디에서 힘이 솟는지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그를 향한 험한 욕설도 함께였다.

“이 어미 없이 태어났을 망나니 같은 놈! 네 놈이 나를 강제로 범한 것이지 않느냐! 내가 만지는 것을 허락했지, 언제 네 놈에게 몸을 준다고 했느냐!”

헤이즈는 그녀의 발악에 가까운 모습을 콧방귀로 웃어넘겨버렸다. 그녀를 무시하고는 몸을 휙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스텔라가 그런 그의 팔을 잡아챘다. 헤이즈가 놀라 뒤를 돌아보자, 그녀는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렇게 힘이 실린 손찌검은 아니었지만, 느닷없이 얼굴을 얻어맞은 헤이즈로서는 상당히 불쾌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해서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옆에서 그레이가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며 말려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 정신 나가 여자가! 저리 꺼지지 못 해!”

헤이즈의 주먹이 그녀의 안면을 강타했다. 스텔라는 자신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그레이와 함께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직접적으로 얻어맞지 않고, 방독면의 주둥이 부위를 맞았는데도 충격이 꽤 커보였다. 그 사이 통로의 가운데 부분을 막 지나는 바츠의 귀에까지 그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바츠는 그제야 심각성을 알고 그쪽을 향해 달렸다. 셀레나와 바론 역시 뒤를 쫓았다.

“집사님, 그게 아니고요...보셨지 않습니까! 이 더러운 년이!...아니, 죄송합니다. 어쨌든! 이 년이 먼저 덤벼들었지 않습니까? 저도 참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미친년마냥 달려드는데?”

바츠가 도착하자 헤이즈가 억울하다는 말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바츠는 대응은 지나쳤지만, 그의 말이 또 틀린 것이 아니라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스텔라가 적당한 선에서 멈췄다면 헤이즈가 이렇게까지는 반응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이미 그는 자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돌려세우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스텔라 본인이 자초한 일이었다.

바츠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참아내기 위해 고개를 털 듯 좌우로 내둘렀다. 그러자 입구 바로 앞에 좌우로 이어진 복도가 이곳에도 똑같이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앞에서 보았던 코너를 돌아 나오면, 지금 보이는 양 끝을 볼 수 있는 구조 같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다. 오른쪽은 허벅지까지 차오를 정도의 높이로 물이 차있어서,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워 보였지만, 왼쪽은 약간 기울어진 경사만 이겨내면 계단을 이용하는데 무리가 없어 보였다. 경사의 기울기도 그다지 가파르지 않았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조금 충격을 받았고 놀란 것뿐이에요.”

셀레나가 어느 틈에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던 스텔라를 살펴보고 말했다. 헤이즈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바츠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의 당위성을 다시 한 번 증명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에 무안한 감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았다.

“짐승 같은 놈! 천벌을 받을 거야!”

스텔라가 셀레나와 그레이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는 와중에도, 헤이즈에 대한 원망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그를 따끔하게 혼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헤이즈는 콧방귀로 대응했다. 그에게 스텔라의 분노는 어린 아이가 고집을 피우는 것만도 못한 것인 듯 했다. 그는 그녀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그런데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바론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입을 열지 않았다면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던 그였는데, 때마침 다들 입을 닫고 스텔라의 씩씩거리는 소리만 들리는 틈을 타 말을 했다. 오랫동안 말이 없어서 그런지 조심스러운 말투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입을 연 바론의 한마디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목소리가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뭐야, 이 계집애 같은 자식은. 뭐라는 거야?”

헤이즈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그런데 평소라면 헤이즈의 이런 반응에 기가 죽어 고개를 돌려야 할 바론이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단 말이에요. 잘 들어보라고요.”

“당연히 무슨 소리가 들리겠지, 이 멍청아 자식아. 근처에서 그 쓰레기 같은 녀석들이 프레이를 바짝 굽고 있는 소리일 수도 있고.”

헤이즈가 비아냥거리며 바론에게 머물던 시선을 스텔라에게로 옮겼다. 스텔라는 그의 도발에 분을 참지 못하고 또 다시 달려들고 싶은 눈치였지만, 조금 전에 받은 충격이 아직 남았는지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했다. 대신 그를 향해 짧은 욕설을 날렸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레이와 셀레나에게 붙들려있던 터라 더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잠깐만요! 다들 조용해요!”

바츠는 자신의 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걸려든 걸 감지했다. 너무 순간이었던지라 확신은 하지 못하지만, 분명 이질적인 소리임에는 틀림없었다. 바츠의 단호한 목소리가 헤이즈는 물론이고 스텔라마저도 씩씩거리던 흥분을 삽시간에 가라앉히게 만들었다.

“집사님, 왜, 왜 이러세요. 겁주려고 하시는 겁니까?”

“조용!”

헤이즈가 뒤늦게 능글맞은 말투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했지만, 바츠는 그에게 무섭게 말을 해야 했다. 그 사이 자신의 귀에 그 이질적인 소리가 제대로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앞 계단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게다가 호수의 썩은 물과 선태류의 냄새라고 생각했던 지독한 악취가 어느 순간 더욱 진해져 있었다. 입구에서 맡았던 비린내와는 조금 다른 냄새였다. 숨을 깊숙이 들이쉬면 헛구역질이 날만큼 끔찍한 냄새였다. 바츠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하나의 단어가 스쳤다.

‘헤러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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