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 시험 -- > * 84화 *
바츠는 그녀의 대답을 듣자 왠지 한시름 덜어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에게 먼저 빠져나가라고 말한 것이 머쓱할 정도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그녀가 지금까지 방해가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오히려 매번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방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거취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계단을 뛰어올랐다. 우선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나 만족해야 했다. 이제는 뒤를 바짝 쫓아오는 짐승에게 집중할 때였다.
바츠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방으로 다시 한 번 몸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처럼 좁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놈과 맞선다면 어느 정도 버텨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한 시간은 아니겠지만, 그 사이 셀레나로 하여금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1층으로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만한, 기회를 만들기에는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자신의 처지는 그 다음 문제였다. 장담하지는 못하지만 그게 옳은 일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20개가 넘는 계단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오히려 사람들을 떼어내고 나면 좀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스스로 위로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바츠의 계획은 계단을 다 오르는 순간,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애써 단속한 마음도 헛수고였다. 멀리서부터 그레이의 결의에 찬 목소리가 1층 복도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었다.
“여기다! 여기라고 이 괴물아!”
바츠는 그의 목소리와 더불어,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뒤를 쫓아오던 섬뜩한 기척이 자신을 따라 계단을 오르지 않고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집사님!”
바츠는 셀레나를 뒤로하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층계참까지 한 번에 뛰어내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세우자, 계단을 올라야 할 헤러티커가 코너에서 급격히 방향을 바꿔 왼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점차 계단에서 멀어지는 놈의 모습을 보니 크게 잘못되고 있음이 느껴졌다.
바츠는 느린 걸음으로 하나씩 남은 계단을 내려섰다. 헤러티커의 다급한 발소리와 괴성으로 변해가는 그레이의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간쯤 내려섰을 때, 정면으로 보이는 복도 반대쪽 끄트머리에서 헤러티커가 무엇인가를 덮치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은 뭔가를 깔고 뭉개 앉아서는, 그 무자비한 한 양손을 바닥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땅을 파헤치는 것처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통렬한 휘저음이었다. 그레이의 절망이 악에 바친 비명소리로 들려왔다. 동시에 놈의 어깨너머로 붉은 선혈이 허공으로 흩날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허공에 뿌려지는 것은 새빨간 혈액만이 아니었다. 갈기갈기 찢긴 낡은 옷감과 더불어 희멀건 가죽 조각도 함께였다.
바츠는 몸을 돌려 다시 계단을 올랐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의 비명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뛰어오를 때는 놈이 너무 쉽게 올라올까봐 불안하던 계단이, 지금은 매 칸칸이 무릎높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르는 것이 매우 힘겨웠다. 셀라나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레이 씨는 요?”
바츠는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밀려드는 죄책감이 그녀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사실이 무엇인지 아는 눈치였다. 약간의 기대감이 목소리에 묻어났지만, 그의 마지막을 받아드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찾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텔라는 요?”
“헤이즈 씨가 다행히 붙잡았어요. 저쪽으로 함께 들어갔어요. 바론 씨도 같이 갔고요.”
바츠는 계단을 올라 정면을 바라보자, 1층처럼 반대쪽 끝까지 이어진 복도를 볼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교실들이 늘어서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일정 간격으로 창살이 남아있는 창문이 보였다. 유리는 아주 오래 전에 깨져버렸는지, 그 흔적이 거의 없었다. 빵가루처럼 약간의 조각들만 바닥에 남아있었다. 셀레나는 교실 중, 가장 마지막에 있는 곳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츠는 그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서 헤이즈와 스텔라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어서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둘의 말투가 매우 격앙되어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아들을 찾아야 한다고!”
“방금 못 봤어! 이미 네 아들은 죽었어!”
“내 아들이 왜 죽었다는 거야! 내 아들은 아직 살아있어! 어딘가 숨어서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이야!”
“이 답답한 년아! 제발 멍청한 소리는 그만해! 놈이 건물 안을 활개치고 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네 아들은 죽었어도 이미 한참 전에 죽었다는 뜻이라고! 집사님도 감당하지 못하는 놈을, 네 아들놈이 대체 뭐라고 피해낼 수 있겠어!”
“누가 내 아들이 괴물과 싸웠다고 말했어? 어딘가 숨어 있을 거라는 말이야!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바츠는 셀레나와 함께 교실로 들어서자, 헤이즈와 스텔라가 구석에서 언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헤이즈는 그녀의 양 어깨를 움켜잡고는 그녀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고, 스텔라는 어떻게든 그의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반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회만 된다면 그를 피해 뒷문으로 달아날 것 같았다. 바론은 뒷문 근처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목소리를 낮춰야 합니다. 우린 아직 안전한 것이 아니에요.”
바츠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흉측한 짐승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듯한 지금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헤이즈와 스텔라는 이미 위험에서 멀리 달아난 사람들처럼 굴었다. 바츠의 주의 때문인지 헤이즈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을 뿐이었다. 헤이즈가 말했다.
“이 미친 여자야, 그만 정신 차려. 네 아들이 놈의 감각을 무슨 수로 피해내겠어. 고작해야 송장벌레처럼 숨어서 프레이나 뜯어먹는 놈인데,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네 아들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훔쳐 먹는다고 해야겠군.”
분명 그의 목소리는 한풀 누그러져 있었지만, 스텔라의 흥분을 자극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네가 뭔데 그런 말을 해! 맞아, 항상 네 놈은 내 아들을 무시했어! 나를 겁탈하고 내 아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기 때문이지? 그때 네 놈의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내 아들 놈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 내 가랑이 사이에 사과를 하라고 했더라도 네 놈은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뭐라고! 감자 한 조각에 젖가슴을 판 년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축 쳐져 추해서 구역질이 나는 가슴이었지!”
스텔라의 도발에 헤이즈가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 중 하나를 그녀의 머리채를 잡는데 사용했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고통으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악에 바쳐 저항하려고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네 놈은 그 구역질나는 가슴을 한 번 만져 보기 위해서 그날 한 끼를 굶어야 했고!”
“이 더러운 년!”
헤이즈가 결국 스텔라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의 남은 손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방독면이 벗겨질 만큼 우악스런 손길이었다. 그녀는 다리가 풀려 온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가 머리채를 잡고 있는 통에 바닥에 쓰러지지 못했다. 그의 손에 매달린 것처럼 대롱대롱 늘어졌다.
“또 때려 봐라! 또 때려 봐! 내 아들 놈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더니, 지금은 아주 기고만장 하구나! 네가 나를 겁탈할 때 소리를 지른 것이 네 물건 때문인 줄 아느냐? 난 네 물건이 나를 범하는 줄도 몰랐다!”
그녀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해, 앞이 어딘지 분간도 못하면서 그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셀레나가 다가가 둘을 억지로 떼어놓지 않았더라면, 그에게 또 한 번 몹쓸 짓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셀레나의 손길에 밀려난 헤이즈가 그녀를 향해 욕지거리를 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끓어오르는 분을 감당하기 어려운지, 교실 안 여기저기에 버려진 책상들을 마구 집어던지고 걷어찼다.
바츠는 눈앞이 아찔할 정도의 두통이 밀려들었다. 저쪽에서 조용히 이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바론이 이제는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지금의 소란에 혼란을 더할 것 같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따끔거리기 시작한 뒷목의 감각이 몹시 신경 쓰였다. 귀찮을 정도로 불편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바츠는 그 불편이 복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 복도 바닥에 깔려 있던 작은 유리조각들이 내뱉는 비명소리였다. 바츠는 여전히 서로를 향해 악담을 주고받는 그들에게로 소리쳤다.
“조용!”
헤이즈와 스텔라는 셀레나를 사이에 두고,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는 서로에 대한 비방을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바츠의 힘이 실린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거짓말처럼 동시에 멈췄다. 고개를 돌리고 바츠를 향해 시선을 고정한 것도 똑같았다. 하지만 그건 그 둘 뿐만이 아니었다. 저쪽에서 묵묵히 기다리던 바론은 물론이고, 뒤늦게 심상치 않음을 느낀 셀레나도 마찬가지였다.
바츠는 몸을 돌려세우며 말했다.
“다들 뒷문 쪽으로 가요.”
셀레나가 헤이즈와 스텔라를 바론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둘은 방금까지 서로를 잡아먹을 것처럼 싸웠지만, 지금은 나란히 자리를 이동했다. 중간에 스텔라가 책상을 걷어차며 소음을 만들었지만, 헤이즈가 그녀를 괜찮다며 다독였을 정도였다.
바츠는 그 모습을 눈으로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지만, 그럴 겨를이 없어 헛웃음으로 대신했다. 막 문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불청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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