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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85화 (85/268)

< --   7. 시험   -- >         * 85화 *

어릴 때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고는 했다. 멋모른 풋내기의 무모함일 수도 있고, 어린 마음이 가진 치기어린 망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크의 빅애스가 개방된 1월1일, 그들이 플랫폼에 들이닥치는 것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초라한 엔지니어들의 등 뒤를 습격하기 위해서다. 무자비한 괴물들! 놈들의 광란이 뿌연 얼음 안개 속에서 펼쳐진다. 허락을 구하지 않은 난동이다. 플랫폼은 가엽은 영혼들의 절규로 뒤덮이고, 놈들은 풍요로운 향연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기실에서 오열하는 엔지니어들의 마지막 정체성까지 탐낸다. 플랫폼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바로 그때이다. 천천히 느릿한 걸음으로, 허리까지 차오른 수증기들을 헤치며 나아간다. 놈들의 민감한 감각은 플랫폼에 가득한 자신들의 울음소리 사이에서도 이질적인 소리를 감지한다. 바닥을 스치듯 아무리 심열을 기울여도 그들의 귀를 속이지 못한다. 놈들은 플랫폼으로 들어서는 발소리를 정확하게 잡아낸다. 그리고는 더 쉽고 가까운 곳에 먹이가 있음을 느낀다. 그 양이 턱없이 부족해 경쟁적으로 몰려든다. 그 앞에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초연한 모습으로 선다. 절대 패배할리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실루엣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사람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지만 사람이기도 한, 그 기이하고도 묘한 생김새, 헤러티커! 그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최소한 그때만큼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위험에 대해서는 인지하지만 두려움을 느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항상 원하는 데로 움직여주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넋 놓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런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숨도 차오른 적이 없었다.

바츠는 이런 상상을 수업시간마다 한 번쯤 하고는 했다. 불과 2, 3년 전 일이었다. 그로인해 느낄 수 있는 통쾌함은 혼자 하는 놀이치고 만족감이 꽤 높았다. 때때로 지루하기 까지 한 그들의 무력한 모습이 시시하기도 했지만, 결코 다시는 하지 않겠다며 딱 잘라 단락을 지을 수 없었다.

바츠는 그때가 떠오르자 헛웃음이 입가에 미소로 변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몸은 그와는 정반대로 반응했다. 그 즐거운 상상은 현실과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붉게 물든 양팔로 벽을 지지하며 들어서는 놈을 피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물러났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종아리에 바짝 힘을 주며 억지로 걸음을 세워야 했다. 왼쪽 구석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의 불안감이 망토를 꿰뚫고 슈트 안으로 차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놈의 손톱 곳곳에 덩어리진 고기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바츠는 외쳤다.

“당장 뒷문으로 달아나요!”

바츠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지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헤이즈를 필두로 바론과 스텔라가 너부러진 책상들을 헤치며 뒷문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고, 셀레나가 그 뒤를 쫓았다. 그 사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선 헤러티커는 바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대한 체구가 만들어내는 움직임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빠른 움직임이었다. 교실 안이 온갖 소음으로 가득했다.

바츠는 옆으로 몸을 날려 가까스로 놈의 돌진을 피해냈다. 놈은 뚫고 나갈 것처럼 바츠를 스쳐 지나며, 뒤쪽 벽을 저돌적으로 들이받았다. 그로인해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지만, 종이처럼 구겨지며 그 충격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바츠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놈이 들어온 문을 향해 달렸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검은 물체가 발에 채였지만 생각한대로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바츠는 그 물체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낡고 오래된 방독면. 입 밖으로 절로 볼멘소리가 나왔다.

“제길, 스텔라!”

방독면은 분명 스텔라의 것이 분명했다. 바츠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빠져나오자마자 왼쪽으로 달렸다. 뒷문으로 빠져나왔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멀리 달아난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복도를 따라 맞은편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교실 안의 책상들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던져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놈의 분노에 찬 울음소리도 함께였다. 바츠는 복도를 따라 달리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발견했다. 중앙 계단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복도였다. 좌우로 늘어선 금속 캐비닛들이 눈에 띄었다.

바츠는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다시 달렸다. 꽤 거리가 있었지만 놈에게 잡히기 전에 계단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놈은 아직 교실을 빠져나와 코너를 돌지도 못했다. 그런데 복도를 따라 중간쯤에 이를 때였다. 갑자기 왼쪽 어깨가 무엇인가에 걸린 것처럼 뒤로 확 잡아당겨졌다. 바츠는 순간 휘청하며 넘어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집사님!”

바츠가 머뭇거리는 사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는 벽 사이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바츠는 믿기지 않았지만, 시선을 그리로 옮겼다. 금속 캐비닛 중 일부가 복도 쪽으로 쓰러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틈이 있었는데,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한 공간이었다. 그 안에서 셀레나가 손짓하고 있었다. 바츠는 둘이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좁은 공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민도 없이 그녀의 손짓을 향해 움직였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놈의 거칠고 빠른 기척이 막 코너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쉿!”

셀레나가 틈 사이로 몸을 구겨 넣는 바츠를 향해 주의를 주었다. 바츠의 거친 호흡을 말하는 것이었다. 바츠는 가뜩이나 가쁜 호흡이 좁은 공간에 마주보고 선 셀레나 때문에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녀와 벽 사이에서 완전히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가슴이 압박하는 것도 한몫했다.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도 나름 조심하고 있는 듯 했지만, 둘이 얼굴을 동시에 정면으로 할 수 없을 만큼 좁은 공간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바츠는 호흡을 내쉰 뒤, 다음 숨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런 바츠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놀라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바츠는 그녀의 눈길을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바츠의 신경은 온 통 헤러티커의 기척을 쫓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놈의 급한 발걸음이 느릿하고 투박하게 변하고 있었다. 갑자기 코앞에서 사라진 자신의 기척에 의아해하고 있는 듯 했다.

바츠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발각되면 자신은 둘째 치고 셀레나까지 죽음 목숨이었다. 애써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 수 없었다. 하지만 미친 듯이 뛰는 심장으로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숨 쉴 때마다 압박해오는 가슴이 자꾸만 머금은 호흡을 내뱉도록 자극했다. 이대로 숨이 멎어 죽겠다는 각오로 숨을 참아야만 했다.

놈의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셀레나의 가슴이 압박하는 정도가 점차 강해졌다. 바츠는 흘낏 살핀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했는지 미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단히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위해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둘 모두를 위해서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죽은 사람처럼 온 몸이 굳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몸을 압박하는 그녀의 호흡으로,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헤러티커는 다행스럽게도 바츠와 셀레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흉측한 코를 킁킁거리며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듯 보였지만, 놈이 가진 제대로 된 감각은 청각뿐이었다. 놈은 결국 필사적으로 숨을 죽인 바츠의 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놈의 발소리가 멀어지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바츠는 그제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필터를 통과해서 들어오는 산소에서 단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다시 숨을 내뱉고 호흡을 참아야만 했다. 셀레나가 외마디 비명을 질러왔기 때문이었다. 숨을 들이마시며 부푼 몸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가 순간적으로 느꼈을 갑갑함을 생각하자 민망해졌다.

“괜찮아요?”

바츠는 몸을 빼내기 위해 옆걸음질 쳤다. 그런데 그런 바츠의 허리를 그녀의 오른팔이 감싸왔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이 바츠의 허리를 붙잡은 것이었다. 놀란 바츠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말했다.

“놈의 기척이 이제 막 사라졌을 뿐이에요. 아직 가까이에 있을 거예요. 우리 조금...조금만 더 있다 가도록 해요.”

바츠는 자신의 감각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았다. 놈은 이미 멀리 자리를 떠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그녀를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약간의 두려움이 보였다. 바츠는 그녀를 위해서 불편한 곳으로 다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숨을 쉬는 것이 너무 힘들지 않길 바랄뿐이었다.

바츠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그녀가 물었다.

“우리가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요?”

“이대로라면 모두 무사하기는 힘들겠죠.”

바츠는 이미 놈의 희생양이 된 그레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어제 전진기지를 다녀간 스타드도 생각났다.

“헌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어차피 놈을 잡아야 하니까요.”

바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스텔라의 방독면을 허리춤에 고정한 뒤, 왼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아르크 눈을 조작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양팔을 위로 치켜들지 않고서는 손이 맞닿기란 어려웠다. 심지어 오른손에는 검까지 들려 있었다. 검을 다시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말했다.

“헌터들을 호출하시려는 거죠?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녀의 비교적 자유로운 오른쪽 손은 바츠의 왼쪽 팔을 만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운이 좋게도 그녀는 자신의 소총을 왼쪽에 들고 있었다.

“그래줄래요? 보면 지도를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헌터들의 코드가 보일 텐데, 아마 하나 밖에 없을 거예요. 그 코드를 눌러서 메시지를 보내주세요.”

바츠는 아르크 눈을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을 그녀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며, 자신의 왼팔을 그녀의 오른쪽 손에 가까이 가져다댔다.

“음...잘 안 보이는데요. 이쪽으로 올리는 게 더 낫겠어요.”

셀레나가 자신의 턱밑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요구대로 했다.

“좀 만 내려주세요. 좀 만 더...네, 됐어요.”

그녀는 다행히 아르크 눈을 조작하는 것에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막힘없이 조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런데 코드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바츠는 그제야 아르크 눈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그녀의 말대로 지도에는 아무것도 표시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이미 꽤나 멀리 이동한 모양이었다. 아르크 눈을 꺼두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바츠는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해볼래요? 메시지를 등록된 헌터 모두에게 보낼 수 있거든요? 모두 5명이 등록되어 있을 건데, 그들에게 전부 보내보세요. 거리가 멀면 제대로 가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셀레나가 바츠의 지시를 착실하게 따랐다. 그녀는 침착하게 헌터들에게 이곳의 좌표와 함께 상황을 설명한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저...집사님? 그런데...팔...”

바츠는 처음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그녀가 메시지를 보내는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어색한 눈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나자,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그녀의 가슴 위에 얹혀 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바츠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서둘러 팔을 밑으로 치웠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바츠는 놀란 나머지 한껏 격앙된 목소리가 나왔다.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며 눈치를 주지 않았더라면, 헤러티커가 듣고 다시 돌아올지도 모를 만큼 큰 목소리였다. 바츠는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그러자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어색하고 묘한 침묵이었다. 바츠는 정화통을 타고 들어오는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그녀의 숨결이 고스란히 안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말했다.

“그런데 의외네요?”

“네?”

“헌터도 그렇고 집사도 그렇게 감정적으로 구는 경우는 본 적이 없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대부분 무뚝뚝하거나 극단적으로 굴잖아요. 물론 집사님도 말투가 좀 딱딱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정말 달라요. 전혀 집사 같지 않아요.”

“미안해요...내가 한심하죠?”

바츠는 그녀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다. 변명거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인 모습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았던 헌터나 집사와는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믿음을 갖지 못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매우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대답은 의심이나 불만이 있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웃음기가 담긴 흐뭇한 목소리였다. 방독면을 벗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더라면, 그녀의 미소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아뇨. 그냥...듣던 대로라서 보기 좋았어요.”

바츠는 그녀의 대답에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려, 서둘러 몸을 빼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는 충분하겠죠? 빨리 다른 사람들을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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