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86화 (86/268)

< --   7. 시험   -- >         * 86화 *

바츠는 셀레나와 함께 중앙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놈의 요란한 발소리가 없으니 건물 안이 고요했다. 가끔 건물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몸이 근질근질한지 자꾸만 꿈틀거리는 소리를 냈다. 분명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동이 못마땅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만 멈추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았다. 바츠는 그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그렇게 불만이면 자신들을 지금 당장 밖으로 내보내주면 된다며 야속하게 생각했다. 그 외는 특별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들 놈을 피해 몸을 안전하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현재의 층에는 놈도, 다른 사람들도 없는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중앙 계단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十 모양의 엇갈린 복도를 앞두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글씨가 바츠의 눈길을 끌었다. 성분을 알 수 없는 염료로 보이는 도료로 쓰여 진 낙서였다.

‘세계 정부는 진실을 밝혀라! UN 타도! 탄티움은 악이다! 우리는 목마르다! 세계 정부 물러가라!’

바츠는 그 앞에 걸음을 멈추고 낙서가 있는 벽을 보고 섰다. 처음 본 낙서 밑으로, 검은색 도료로 쓰인 3분의 1크기의 낙서도 있었다.

‘신이시여, 당신의 눈물이라도 내려주소서.’

바츠는 얼굴을 바짝 대고 낙서를 살펴보았다. 정말 오래 전에 쓰인 글자 같았는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다. 벽의 미세한 구멍을 파고들어 완전히 흡착된 것처럼 보였다.

“왜요?”

셀레나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이런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아르크에서는 글을 쓰는데, 이렇게 색이 있는 액체를 따로 쓰지 않잖아요.”

“그럼 어떻게 글을 쓰죠?”

셀레나가 다시 물었다.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아르크 눈을 사용하죠. 보통 사람들이 뭔가를 적고 쓰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관리자를 비롯해서 몇몇이 하는 일일뿐이잖아요. 물론 필요하다면 배급표를 종이로 교환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이렇게 뭔가를 덧칠하지 않죠. 그냥 손이나 뾰족한 걸로 그 위에 대고 쓰면 되잖아요. 색을 바꾸고 싶으면, 쓰고 난 뒤에 다시 그 위를 손끝으로 문지르면 되고요. 문지른 횟수에 따라서 색이 변하죠. 대신 한 번 변한 색을 다시 바꿀 수는 없고요.”

바츠는 그녀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막상 대답을 하고나자, 전에 헤르만의 방독면과 슈트에도 염료를 사용한 듯한 흰색 해골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 사실을 잊었다. 모두 아르크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만들어낼 수 없다기보다는 그 흔적을 오래 보관할 수 없다는 이유로, 효용성에서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굳이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맨 처음에 비해서 그 색이 분명 바랬을 텐데도 불구하고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색이 변한 이유가 도료의 산화보다도, 콘크리트 벽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풍화한 것이 더 큰 이유 같았다.

“저쪽에도 있어요.”

셀레나가 바로 앞 코너 맞은편을 향해 가리켰다. 그곳에는 글씨가 아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두 다리로 서 있고 양 팔을 가진 것으로 보아 영락없이 사람의 모습이었다. 검은색 도료 때문인지 생김새가 또렷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헤러티커였다면 긴 손톱이 부각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가지런히 모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다. 푸른 액체가 손에서 흘러나와 입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보니 물을 마시고 있는 그림 같았다. 하지만 그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벽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옆에는 같은 모양의 사람이 두 명 더 그려져 있었는데, 어떤 병에 든 물을 마시고 있었다. 지난번 기지국에서 보았던 수통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은 그 병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몸을 기괴한 모양으로 배배꼬고 있었다. 꼭 경련이라도 일어난 모습이었는데, 180도로 돌아간 한쪽 팔에 긴 손톱이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바닥에 엎드린 사람이 고개를 들고 입을 벌리고는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마시고 있었고, 바로 그 밑에는 그 물을 받아 마신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배를 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거나, 완전히 몸을 늘어뜨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죽은 사람 같았다.

바츠는 이런 그림을 대체 누가 그린 것인지 궁금했다. 뭔가를 전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림이었는데,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크루엘라의 위험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좀 더 많은 상황이 나열되어 있어야 했다. 방독면을 쓴 사람이 있다거나, 음식을 나눠 먹는 모습이 있다거나 해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 그려진 그림은 오직 물만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도료가 부족해서 표현이 단편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뿐이었다.

“집사님!”

그때 셀레나가 바츠의 왼쪽 손목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녀의 신호를 바로 알아들었다. 아르크의 눈을 얼른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신자는 스타드가 아니라 레나타였다. 그녀가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에 있다고 알려왔다. 바츠는 그녀에게 바로 답장을 보냈다. 한 시간 뒤에는 영원히 자신을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고작해야 한마디였지만, 꽤나 힘이 되는 말이었다.

‘지금 갈게!’

바츠는 그녀의 답장을 보자 괜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앞에서 셀레나가 빤히 바라보고 있어, 서둘러 미소를 거둬들였지만 한결 가벼워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방독면을 꿰뚫을 만큼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는지 떨떠름한 말투로 물었다.

“...기쁘신가 봐요?”

“이렇게 헌터를 호출해본 건 처음인데, 응답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되네요.”

바츠는 자신을 바라보는 셀레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벌써 레나타가 옆에 도착한 것 같아 마음이 든든했다. 셀레나가 함께 가겠다고 말했을 때 느꼈던 안도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믿음직스러웠다. 헌터라는 이름이 가진 힘인 것 같았다. 물론 실력을 직접본 적이 없는데다가, 막상 오더라도 그녀가 과연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해 우려가 되기는 했지만, 의욕적으로 보이는 그녀의 태도가 묘한 신뢰감을 주었다. 마치 바로 눈앞에서 그녀 특유의 쾌활한 목소리가 직접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들려온 목소리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정신이 번쩍 들만큼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로 진한 상실감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바츠는 그 비명소리가 멀리 위층에서 들려왔다는 것을 느꼈다.

“스텔라인가요?”

“네! 꼭대기 층에서 들린 것 같아요!”

셀레나가 대답과 동시에 계단을 향해 먼저 달려갔다. 바츠는 그 뒤를 바짝 쫓았다. 그녀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올랐고, 3층을 지나 곧장 4층까지 내달렸다.

“저기에요! 저기가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머물고는 하는 장소에요. 저기에서 들려온 것 같아요!”

4층에 도달하자, 셀레나가 바츠를 정면으로 보이는 복도를 따라 우측으로 바로 있는 한 교실로 안내했다. 2층에서 보았던 교실에 거의 두 배에 달하는 크기였는데, 특이하게도 책상들보다는 테이블이 훨씬 많은 공간이었다. 교실 곳곳에 적당히 배치가 되어있어야 했지만, 구석에 마치 벽처럼 빙 둘러 세워져 있었다. 크기가 무려 10여명이 둘러앉아도 될 만큼 널찍한 테이블이어서 벽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다만 지금은 손상이 많이 돼 본래의 모습이 절반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마저도 제멋대로 놓여있어서 전혀 견고해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바로 그 앞에서 프레이 사체 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배가 찢기고 내장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사체였다. 한 눈에도 정교하지 못한 솜씨로 잡아 뜯겨 있었다. 하지만 내장을 밖으로 꺼내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지금이 내장을 꺼내는 데에는 더 탁월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기존에 사람들이 다녀가며 불을 지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있었고, 주인을 알 수 없는 혈흔도 제법 많았다. 최근에 불을 피운 흔적은 없었으나, 혈흔 중 일부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 흔적이었다. 스텔라는 보이지 않았다.

“집사님...”

셀레나가 자리를 훑어보던 바츠를 불렀다. 바츠는 고개를 돌리자, 뒷문을 따라 뭔가가 끌려 나가 자국을 가리키고 있는 셀레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법 묵직한 물건을 바닥에 끌어, 움직인 흔적이었다.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혈액이 흙먼지와 뒤엉켜 남긴 흔적이 그 길을 표시하고 있었다. 혈액에 아직 점성이 남은 걸로 보아서는 테이블 근처의 혈흔과 비슷한 시기의 것이었다.

“들었어요?”

그때였다. 바츠의 귀에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바닥이 비벼진 것처럼 흙이 지글거리는 소리였다. 훨씬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바츠는 셀레나와 눈빛을 한 차례 교환한 후에, 바닥에 흔적을 쫓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중앙 복도를 따라 반대쪽 끝까지 이어진 흔적이 왼쪽으로 코너를 돌아서 계속 되고 있었다. 바츠는 코너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근처에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매우 가까웠다. 코너를 돌아서자마 검을 휘두르기 위한 준비를 했다. 만약 헤러티커라면 실수가 용납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위기나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바츠는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 했다. 코너를 막 돌아서기 직전이었다. 중앙 계단을 따라 불길한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코너 뒤에서 들려오는 기척보다 더 크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사롭지 않은 기척이었다. 셀레나가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그녀 역시 그 기척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척의 주인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두려움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허탈함이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었던 원흉이 이제야 계단을 따라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집사님!”

셀레나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바츠는 그녀의 한쪽 팔을 낚아채며 빠른 속도로 코너를 돌아 달렸다. 놈이 계단에 있다면 코너 뒤에 있는 것은 절대 놈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코너 뒤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방독면도 쓰지 않은 한 여인이, 구석에 앉아 누군가를 품에 안고 몸을 좌우로 흔들거리며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셀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나란히 그쪽을 향해 달리며 동시에 외쳤다.

“스텔라!”

하지만 그녀는 귀가 먹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바츠와 셀레나가 바로 옆까지 다가올 때까지 흔들거리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스텔라! 일어나요! 가야 한다고요!”

“집사님! 이쪽으로 길이 있어요! 반대쪽 계단까지 갈 수 있어요!”

바츠가 스텔라를 추스르는 동안, 셀레나가 복도 끝까지 달려가 반대쪽을 확인했다. 바츠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는 그녀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위로 살짝 잡아당겼다.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역시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바츠에게로 돌리며 말했다.

“내 아들...내 아들이에요...”

바츠는 그제야 그녀의 품 안에 안겨있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검은색 하의에 적갈색 상의를 걸치고 있는 사내였는데, 기운이 없는지 그녀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었다. 바츠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것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품에 안기 위해 두르고 있는 사내의 어깨 위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텔라 그녀는 머리가 없는 시신을 품에 안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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