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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87화 (87/268)

< --   7. 시험   -- >         * 87화 *

“스텔라...가야 합니다...”

바츠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외면하면 상대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 자신의 푸른 눈을 바츠의 시선을 피해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숨겼다. 그리고는 몰래 달아나듯 옆으로 조금씩 고개를 돌리더니, 허공 어딘가를 향해 멍하니 고정했다. 바츠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전 셀레나와 함께 벽 틈에 숨어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의 표정이 딱 지금 그녀의 얼굴과 똑같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본 건 굉장히 짧은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호흡을 두 번 정도 했을 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허공에 잠시 머물고는 이내 자신의 품 안에 시신을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인, 어떻게 된 거니? 여기서 뭘 하고 있니? 엄마 기다린다고 빨리 오겠다고 했잖아...엄마 위해서 꼭 프레이를 잡아온다고 했잖니...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거니...”

바츠는 머리도 없는 시신과 대화를 하는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놈의 발자국 소리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바츠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자리에서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저쪽에서 셀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몇 번이나 재촉했다.

“스텔라...!”

바츠는 그녀를 일으키기 위해 다시 한 번 더 그녀의 팔뚝을 잡아 당겼다. 그러자 그녀가 갑자기 바츠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더니, 자신의 팔뚝을 붙잡고 있던 바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집사님! 집사님, 어떻게 해주세요! 어떻게든 해주세요!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 엄마 배고프지 않게 해주겠다고 나섰어요! 내 아들이 날 위해서 나섰다고요!”

스텔라의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쪽에서 지켜보던 셀레나가 안절부절 하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지, 그녀는 목청껏 소리를 높이며 바츠에게 애걸복걸했다.

“집사님! 내 아들을 살려주세요! 집사님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렇죠? 맞죠? 그렇잖아요!”

바츠는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는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복잡한 심경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 그녀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테라치라면 그녀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까?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있었고, 바로 뒤 코너 앞에서는 소름끼치는 짐승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강제로 그녀를 끌고라도 가야만 하는 것일까? 무엇하나 쉽게 결정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금 전 그녀의 시선만큼 머릿속이 허공에 뿌려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집사님! 스텔라는 틀렸어요! 우선 우리라도 피해야 해요!”

셀레나의 급하고 긴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바츠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스텔라의 팔뚝을 잡고 있던 손에서 저절로 힘이 빠졌다. 대신 손을 잡아당기기 위한 팔의 힘은 더욱더 강해졌다. 그녀의 팔뚝을 잡아끌기 위해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힘이었다. 셀레나 쪽으로 가기 위한 걸음걸이도 슬그머니 시작됐다. 그러자 스텔라가 바츠의 손길이 점차 떠나간다는 것을 느끼고는, 바츠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늘어지며 소리쳤다.

“집사님! 내 아들을 버리지 마세요! 제발요! 제발! 내 아들을 구해주세요!”

그녀의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용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의 눈물은 순식간에 바닥을 얼룩덜룩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도 품 안에 시신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바츠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그리고는 뒤쪽 코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포기를 모르고 기어이 여기까지 찾아와, 붉은 눈을 들이밀기 시작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놈은 악랄한 성격만큼 근성도 대단했다. 그 사이 스텔라는 울며불며 바츠의 손을 떠나 바짓가랑이로 옮겨갔다. 바츠는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이 머릿속에 너무도 또렷하게 각인이 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죽는다.’

바츠는 사지가 벌써부터 빳빳하게 굳어지기 시작하고 오금은 이미 감각을 잃었다는 것을 느꼈다. 정상적으로 남아있는 감각은 두 눈 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공포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불안하거나 겁이 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억울하거나 분한 기분도 전혀 없었다. 놈이 지금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바로 코앞에서 괴성을 내지른다 하더라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초연했다. 허무함! 그래, 허무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바츠는 자신의 감정이 정리가 되자, 아르크에서 기다리고 있을 케일리가 머릿속을 스쳤다. 이롤로도 떠올랐다. 벨리타나 테라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앞선 둘을 굳이 곱씹은 이유는 그들에게 특히 미안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들고 있던 검이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이 물건을 어떻게 들고 다녔는지 스스로가 대견했다. 스텔라는 바츠가 검을 세우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내비치자,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순간 애걸복걸하던 그녀의 울음소리가 삽시간에 비명소리로 변하며 울려 퍼졌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위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앉아, 눈높이를 맞추고는 자지러지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스텔라, 셀라나에게로 달려가요. 그녀가 복도를 따라 반대쪽 계단까지 안내해줄 거예요. 그 계단을 따라 내려가세요. 그 계단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내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계단이 끝나면 물을 피해서 오른쪽으로 달리세요. 그럼 우리가 처음에 보았던, 이곳의 중앙 복도가 왼쪽으로 보일 겁니다. 거기서부터는 말해주지 않아도 집으로 갈 수 있죠?”

스텔라가 목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중간에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바츠를 향해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잔뜩 더럽혀진데다 겁에 질려 허옇게 질려있어서 너무도 추했다. 그녀는 이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더듬었다.

“지, 집사님?”

“괜찮아요.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냥 지나는 시간이에요. 나중에 떠올리면 몸서리나 한 번 쳐질, 그런 악몽일 뿐입니다.”

“지, 집사님...”

“미안해요. 아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스텔라가 바츠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겨왔다. 바츠는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그녀 몸에서 풍겨나는 악취와 끈적이는 땀 때문인지, 평안하거나 안락하지 않고 찝찝한 온기였다. 그녀 품 안에 있던 시신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지진 오래였다.

“이제 가요.”

바츠는 스텔라를 강제로 떼어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허리춤에 있던 방독면을 건네는 걸 잊지 않았다. 그녀는 방독면을 쓰기는커녕, 바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동안 바닥을 기어서 이동했다. 셀레나가 달려와 부축해줬을 때에야 비로소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그때는 바츠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겨난 뒤였다. 셀레나는 그녀가 일어나자 함께 복도의 끝을 향해 달렸다. 바츠는 그 모습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놈을 마주보고 섰다. 어느새 놈은 코너를 빠져나와 그 거대한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츠는 마치 자신이 돌아서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느꼈다. 혼잣말을 늘어놓듯 작은 목소리로 놈에게 말했다.

“난 지금까지 죽음이 앞에 나타나면 쉽게 받아드리고는 했어. 모르겠어. 나르의 방 때문일까? 감각이 무뎌져 버린 걸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 난 할 일이 많거든. 주민들도 돌보고, 헌터들도 돌봐야 하지. 케일리...그래, 케일리도 만나야 해. 벨리타도...다른 친구들도 만나야 하지. 그런데 자꾸만 죽음이 내 앞에 나타나 앞을 막아서. 이유를 모르겠어. 하지만 궁금하지 않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거든. 내가 잊고 있었나봐. 난 죽음이 자꾸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 죽음마저도 벨 생각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헤러티커가 바츠를 향해 잔뜩 성난 울음소리를 길게 내뱉었다. 꼭 바츠의 물음에 응답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말했다.

“그래, 너. 너 말이야, 이 괴물아.”

헤러티커가 바츠를 향해 덤벼들었다. 얼마나 저돌적인지 놈이 달려들며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한 움큼씩 깊게 파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고작해야 바닥 위에 널브러진 크고 작은 콘크리트 파편들이 튈뿐이었다.

바츠는 때를 맞춰 몸을 옆으로 빼내며 놈의 옆구리를 정확히 벴다. 여전히 놈의 피부는 벽돌처럼 단단해, 칼날이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돌아서는 놈이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내며, 손톱을 세운 양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걸 보면, 놈도 조금은 충격을 받기는 하는 것 같았다. 놈이 쓰러질 정도로 피해를 입히려면 얼마나 같은 것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바츠는 놈의 손톱을 일일이 검으로 받아내며 다시 기회를 노렸다. 놈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힘을 쓰는 순간을 기다릴 셈이었다. 놈이 그 공격을 가하는 순간, 그때는 받지 않고 옆으로 흘린 뒤 가슴을 노려볼 속셈이었다.

복도에는 바츠의 칼날과 헤러티커의 손톱이 맞부딪칠 때마다, 굉장히 특이한 파찰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금속끼리 부딪히며 내는 까랑까랑한 소리도 아니었고, 뭉툭한 물건끼리 부딪히며 내는 투박한 소리도 아니었다. 어떤 때는 날카로운 금속이 부딪힌 것 같은 쇳소리가, 또 어떤 때는 나무로 만들어진 허수아비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필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게 정말 지루한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지루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의 공방 역시도 매우 지루하게 흘러갔다. 특별한 기술을 앞세운 치열하고 화려한 싸움이 아닌, 같은 것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따분한 상황이 이어졌다. 놈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을 내세워 바츠를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동안, 바츠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버티고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다른 것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것 같았고, 바츠는 기회만 노리며 버티는 데만 급급했다. 이대로 계속된다면 결국 체력이 다한 바츠가 무너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놈이 단순하지만 영리한 것이었다. 먹잇감에 무리하게 달려들다 상처를 입지 않고, 지치길 기다리는 효율적인 사냥을 하고 있었다. 놈은 정말 타고난 사냥꾼이자 맹수였다. 먹잇감이 지쳐 제풀에 쓰러지면 여유롭게 목덜미를 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놈이 휘두른 손톱을 막아내던 바츠가 순간적으로 힘이 풀려 검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일에 놀란 나머지 발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헤러티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놈의 손등이 정확히 바츠의 안면을 가격했다. 바츠는 뒤로 크게 넘어졌고, 놈은 날카로운 손톱을 치켜들며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다가왔다.

바츠는 눈을 감았다. 놈의 기합소리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복부에는 묵직한 느낌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놈이 온 몸을 내던졌는지, 체중이 단단히 실린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바츠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지 못할 만큼 지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독면 위로 빗방울처럼 무엇인가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하고 숨이 막힌 앓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는, 자신에게 그보다 훨씬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츠는 눈을 떴다. 그러자 방독면의 렌즈에 붉은 액체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붉은 피를 입가에 머금은 푸른 눈을 가진 더러운 여자의 얼굴이 보였고,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나와 있는 차갑고 뾰족한 물건도 보였다. 바츠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스텔라!”

어느 틈에 달려온 스텔라가 바츠의 복부 위에 앉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가 바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엄마는 괜찮아. 그러니 어서 달아나렴, 내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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