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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88화 (88/268)

< --   7. 시험   -- >         * 88화 *

바츠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위에서 몸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를 떨어뜨리는 건 언제든지 가능했다. 벌떡 일어난다면 그녀는 옆으로 나뒹굴게 될 만큼 가벼웠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돌봐야 했지만, 뜻대로 하지 못했다. 몸을 움직이게 되면 그녀의 미소가 사라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붉게 흐려진 시야를 통해 보이는 그녀의 더러운 얼굴이 너무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그녀가 위에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포근했다. 마치 지상의 밤을 보내고 돌아와 차갑게 변한 몸에, 두툼한 담요를 두르고 따뜻한 방안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녀가 바츠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중앙에서 벗어난 방독면의 위치를 바로잡아주었다. 또, 엄지를 이용해 방독면의 렌즈를 직접 닦아주기까지 했다. 돌만큼 단단한 렌즈가 혹시라도 상할까 매우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바츠는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얼굴에 묻은 검은 먼지 얼룩 사이로 점차 충혈 되어가는 그녀의 푸른 눈이 보였다.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했지만 가득 담긴 애정 어린 시선은 감출 수 없었다. 등을 뚫고 가슴을 관통한 놈의 손톱은 그녀의 갈빗대를 여러 개 부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렌즈에 자신이 만든 붉은 흔적을 기어이 전부 닦아냈다. 힘든 기색은 중간에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감정이 끓어올라 숨이 막혔다.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러보면 한결 나았을 테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비록 붉은 미소였지만, 입으로 혈전을 가득 쏟아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고 애쓰는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친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녀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았다.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천천히 부유한 것이 아니라, 총알이 튕겨져 나가듯 빠르게 떠올랐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외마디 비명이 토해졌다. 붉은 피가 그녀의 턱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녀의 옷을 흠뻑 적시고, 바츠의 몸에까지 떨어질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달아나듯 멀어지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높이 날아올랐고, 복부에는 또 다른 손톱들이 거침없이 뚫고 나왔다. 정말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몸통이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처럼, 반으로 잘리며 두 동강이 났다.

스텔라의 붉은 혈액이 바닥에 비처럼 뿌려졌다. 분리된 육신은 좌우로 내버려져 졌다. 놈에게는 애초부터 그녀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다. 놈은 그녀를 가볍게 찢어발기고는 바츠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놈의 붉은 눈이 그녀의 피를 머금었는지, 훨씬 더 붉게 보였다.

바츠는 겨우겨우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뿐인데도 허벅지에 경련이 일었다. 바로 옆에 떨어진 카니지도 집어 들었다. 어찌나 무거운지 들어 올리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호흡은 거칠고 가슴은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를 물고 그 감정을 도로 삼키며 애써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다. 끓어오른 감정을 표현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방금 내뱉은 말도 지키지 못한 것이 생각나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죽음 앞에서 너무도 쉽게 끝을 수긍했다는 사실이 너무 괴롭게 만들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필사적이었더라면, 스텔라를 이렇게 잃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슬퍼하지 않았다. 이를 물고 감정을 억누른 이유였다. 아직은 아니었다. 노리고 있던 기회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스텔라를 위해서라도 그 기회를 반드시 마주해야만 했다. 이대로 끝날 수 없었다.

“이 괴물!”

셀레나의 분노에 찬 목소리와 함께 복도에는 그녀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잔뜩 흥분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쪽을 향해 걸어오며 사격을 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답지 않게 정확도가 매우 떨어졌다. 단발로 7발이나 쐈는데, 정작 놈의 몸통에 적중한 총탄은 고작 세 발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놈은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부터 크게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무시를 해버렸다. 뒤를 향해 몸을 돌리며 그녀를 외면해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놈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울음소리를 냈다. 바츠가 그토록 원하던 악에 바친 울음소리였다.

바츠는 놈이 몸을 돌려세우며 내지르는 괴성이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감지했다. 여태껏 분노가 가득 찬 울음소리를 내왔는데. 이번만큼은 그게 조금 달랐다. 누군가를 향해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내뱉는 것이 아닌 허공에 뿌리듯이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마치 사람의 비명소리 같았다. 바츠는 그 느낌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머지않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셀레나의 총탄에 맞으며 몸을 돌려세운 헤러티커의 등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상처가 생겨나 있었다. 등의 절반가량에 거쳐 위에서 아래로 나 있었는데, 칼에 베인 것처럼 살점이 좌우로 크게 벌어져 있었다. 심지어 놈이 꿈틀거릴 때마다 척추가 보일정도로 상처가 매우 깊었다. 그 사이로 고름으로 보이는, 점성이 강한 노란 액체가 주욱 흘러내렸다.

바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있던 그 기회가 지금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남은 힘을 검을 쥐고 있던 손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놈의 척추가 상처 사이로 드러나는 순간, 그 틈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찔러 넣었다. 칼끝이 정확히 상처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손에는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를 꿰뚫었을 때와 같은 느낌이 전해졌다. 통쾌하고도 허무한 느낌이었다. 놈은 놀랐는지 미동도 없이 움직임을 멈췄다. 온 몸이 얼어붙은 듯 완전히 경직된 모습이었다. 바츠는 놈이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검을 회수했다. 고름 같은 액체가 길게 늘어지며 칼날을 따라 나왔다. 놈은 중심을 잃은 듯 휘청거렸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기 위해 한쪽 발을 내딛는 순간, 상체가 앞으로 확 꺾이더니 지난번 하늘에서 들려왔던 폭발음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며 그대로 꼬꾸라졌다. 바닥에 정수리가 먼저 닿았을 만큼 몸이 완전히 구부러진 상태였다. 바츠는 그런 놈을 향해 말했다.

“내가 말했지...자꾸만 막아서면 베어버릴 거라고...”

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발악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신체 일부를 부르르 떠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이 보였다. 그는 한 손에 노란 액체가 묻어있는 붉은 카니지를 들고 있었다. 그가 바츠를 발견하더니, 쓰러진 놈의 시체를 돌아서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다.

“놀래라! 내가 늦지 않았지? 나 진짜 빨리 달려온 거라고!”

바츠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발랄한 목소리. 레나타, 그녀였다. 몸에 딱 맞는 슈트 위로 또렷하게 드러나는 거대한 가슴의 윤곽을 보면 틀림없었다. 그녀는 정말 기뻐하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꽤나 기뻐보였다. 다가오자마자 다짜고짜 바츠를 양팔로 안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가 달려와 부둥켜안으며 즐거워하는 동안 전혀 웃을 수 없었다. 바츠의 시선은 구석에 버려진, 머리가 있는 스텔라의 시신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잠이 든 것처럼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머리가 없는 그녀의 아들이 누워있었다.

“너 근데 생각보다 대단한데?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저 놈 허리를 부러뜨린 거 맞지? 굉장하다! 나 사실 엄청 긴장하고 있었다고. 몰래 다가와서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는데, 놈이 멀쩡하지 뭐야. 정말 깊숙이 제대로 벴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충격이 없는 것 같더라. 그래서 막, 와, 어떻게 하나 하고 있었는데, 너 정말 대단하다!”

“레나타군요.”

레나타가 바츠를 붙들고 야단스럽게 구는 동안, 셀레나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바츠를 안고 즐거워하는 레나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둘은 초면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레나타는 셀레나의 손을 잡지 않았다. 콧방귀를 뀌고는 그냥 외면해 버렸다. 그녀는 오로지 바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다친 데는 없지? 어디 보자. 음, 먼지만 조금 털어내면 되겠다. 어라? 이건 뭐야? 피 아냐! 다친 거야? 아니네? 대체 왜 묻어 있는 거야...어쨌든 다친 데는 없는 것 같네. 이제 집에 갈까?”

레나타가 바츠의 몸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망토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가슴과 복부에 잔뜩 묻어있던 스텔라의 혈흔을 자신의 망토로 쓱쓱 닦아주었다. 셀레나는 옆에서 민망해진 자신의 손만 괜히 한번 쥐락펴락해야만 했다.

바츠는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계속 남아있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스텔라는 죽었다. 이제 더 이상 떼를 쓰지도 못하고,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 어딘가에 남아있을 헤이즈와 바론을 찾아 돌아가야만 할 때였다.

“사람을 찾아야 해. 남자 둘이야. 그들을 찾아봐줘.”

바츠는 레나타에게 그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고는 셀레나와 함께 먼저 입구로 가서 기다렸다. 그곳에서 지친 몸을 조금 쉬고 싶었다. 셀레나 역시 휴식이 필요했다.

레나타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좀 지난 뒤였다. 그녀는 혼자서 돌아왔다. 3층에서 키가 작은 남자를 발견했는데, 그냥 두고 왔다고 했다. 일리트시의 주민인 것은 확인했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두었다고 했다. 바츠는 한숨이 나왔지만 그녀에게 핀잔을 주는 대신, 몸을 일으켜 그녀와 함께 그 남자에게로 갔다. 그는 3층 오른쪽 구석 끝에 위치한 교실 안에 있었는데, 다름 아닌 바론이었다. 그는 정말 레나타의 말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바츠는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그 옆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시신 한 구와 바론의 손에 들린, 붉게 물들어있는 커다란 돌을 발견하고 어렴풋이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바론이 말했다.

“제가 여기 온 건 동생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헤이즈를 죽이기 위해서이기도 했어요. 헤이즈는 틈만 나면 우리 형제를 조롱하고는 했거든요. 동생이 카인과 함께 프레이를 자신들끼리만 먹고 온 다음에는 더더욱 심해졌죠. 정말 견딜 수 없었어요. 체격이 작고 겁이 많은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모두가 용감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헤이즈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스텔라를 겁탈했고, 도시에서도 종종 말썽을 일으키고는 했어요. 대부분 아녀자들을 희롱하는 것이었죠.”

바론의 말을 들은 레나타가 뒤늦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살인을 저질렀으니,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론이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도시로 돌아가면 주민을 살해한 죄를 물어야 했다. 시장과 장로에 의해서 재판이 이루어지고, 이를 토대로 집사가 처벌 수위를 결정한다. 주민을 살해한 죄의 처벌 수위는 최소한 추방이었고, 보통은 사형이었다. 레나타가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아든 까닭이었다. 바츠는 물었다.

“동생은 찾았나요?”

바론은 대답대신 교실 반대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미 오래 전에 싸늘하게 변한 주검이 가지런히 누워있었다. 그 주검은 스텔라의 아들처럼 머리가 없었다. 바론이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동생과 함께 여기에 남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바츠는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그에게 일리트시에서 추방을 명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레나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바론의 한쪽 팔이라도 자르자고 했다. 바츠는 그런 그녀에게 그가 온전히 이곳에 남을 수 있도록 하자고 타일렀다. 그녀가 돌아오는 길에 물었다.

“왜 그런 거야? 어차피 놈은 범죄자라고.”

바츠는 대답했다.

“레나타, 사람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는 해. 그건 용서받을 수 없을 심각한 범죄일수도 있고, 경악할 만큼 끔찍한 일일수도 있어. 하지만 그건 결코 비난 받을 수 없는 일이야. 왜냐하면 그 소중한 사람이 없으면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 그들에게 그런 일들은 결코 위험하거나 무서운 일이 아니야.”

대답을 들은 레나타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금방 실없이 웃으며 바츠에게 팔짱을 껴왔다. 바츠가 스텔라는 물론이고 케일리를 떠올리며 우울하게 변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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