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89화 (89/268)

< --   8. 전주곡   -- >         * 89화 *

일리트시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바람이라도 불면 안개처럼 흩날리는 습하고 끈적한 비였다. 바츠는 망토 위로 아름아름 내려앉는 빗방울이 달갑지 않았다. 팔을 타고 손끝으로 흘러내려가는 빗물이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다.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느꼈던 약간의 해방감이 방독면 렌즈에 묻어나는 작은 물방울처럼 기억 속에서 자꾸만 밑으로 떠내려갔다. 셀레나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유일하게 말을 하는 건 레나타뿐이었다. 그녀는 시종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앞을 기웃거렸다. 어떻게든 바츠가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굳어진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레나타는 전진기지까지 함께 했다. 떠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오랜만에 돌아온 것처럼 기쁜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옆에 선 바츠를 껴안으며 매우 즐거워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아양을 무시해버렸다. 도무지 그녀를 상대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지친 몸을 자리로 옮겨 축 늘어뜨렸을 뿐이었다. 그녀가 그 위로 마주보고 올라와 앉으며 말했다. 적절하게 말끝을 가볍게 올리거나 늘리는 애교스런 목소리였다.

“왜 그래? 내가 아까 그 사람 팔을 자르자고 무섭게 굴어서 그래? 미안해, 응? 다음부터는 고집 절대 부리지 않을게.”

그녀가 바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볼에, 코에, 눈에 연속적으로 입을 맞췄다. 바츠는 그녀의 입술을 피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다시 입술로 돌아오려던 그녀의 얼굴이 중간에 멈췄다.

“내가 늦게 와서 화난 건 아니지? 그러지마, 그럼 나 슬플지도 몰라. 아! 거기서 사람들이 죽어서 그런 거야? 맞지?”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여러 차례 변했다. 처음에는 잔뜩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더니, 중간에는 처량한 표정으로 애원하듯 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활짝 웃으며 물었는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실종되거나 죽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프레이 둥지 근처에서 관계를 갖다가 프레이에게 물려 죽는 사람도 있다니까? 재밌지?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 헤러티커에게 죽는 사람이 겨우 서너 명일 거라고 생각해? 그만큼 또 새로운 사람들이 도시로 올 거야. 세상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도시가 여기뿐인 줄 알아? 북쪽으로 멀리가면 죽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도 있고, 또 어딘가에는 우리 같은 헌터를 흉내 내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도시도 있어. 아이기스 녀석들이 사는 도시도 있지. 부랑자들의 도시도 있고, 강도들이 사는 도시도 있어. 네가 그 사람들을 다 돌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가 바츠의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강제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바츠는 말했다.

“집사는 이곳에 신이야. 뭐든지 할 수 있어야만 해...”

“맞아!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얼른 맞장구쳤다. 하지만 바츠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무슨 일을 했지? 아무도 구하지 못했잖아. 사람들이 내 앞에서 죽어가는 동안에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오히려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체념하기나 했지. 무슨 말인지 알아?”

“아니, 몰라. 난 그런 건 관심 없어. 나는 지금 살아있고, 내 앞에는 네가 있어.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 아냐? 저들은 그냥...그냥 주민일 뿐이야. 여기가 아니더라도 어딘가에서 살아갈 그냥 그런 사람들 말이야. 그들이 죽거나 다치는 게 슬퍼? 잊어. 그게 저들의 삶이야. 그러니까 잊어. 내가 기분 좋게 해줄게.”

레나타가 바츠 위에서 내려가 바로 앞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바츠의 바지를 멋대로 끄르고는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바츠는 그녀의 손길이 닿자, 그녀 안에서 느꼈었던 그 엄청난 쾌감이 떠올랐다. 그 안에 머물고만 있어도 굉장히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던 기억이었다. 격렬한 마찰과 그녀의 야릇한 목소리가 더해지면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황홀했었다. 그녀가 무릎으로 일어서서 얼굴을 아랫배 쪽으로 가져왔다. 시선은 바츠의 얼굴이 아닌 아랫배보다 더 밑을 향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이마를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뒤로 밀어냈다. 바츠는 말했다.

“레나타, 난 당신이 좋아. 나를 무조건 살갑게 대하는 당신의 그 상냥함이 정말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 상냥함이 항상 내키는 건 아니야. 기분 나빠하지 마. 당신을 경험했던 일은 놀라울 만큼 좋았으니까. 나도 모르게 당신을 원한 적도 있었어. 지금도 당신 안에 들어가게 된다면 난 당신을 있는 힘껏 안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반대로 그런 당신이 싫어. 이런 당신이 싫다고.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 나도 그 감정들이 대체 어떻게 함께 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당신이 좋지만 싫은 건 사실이야.”

바츠의 말을 들은 레나타의 얼굴에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상체를 세우고는 바츠에게 말했다. 전과 같은 애교스러움이 전혀 없는, 메마른 말투였다.

“그러니까 내 몸을 보고, 만지는 건 좋지만 나는 싫다는 거지? 뭘 그렇게 어렵게 말을 해. 괜찮아. 남자들은 항상 그랬으니까.”

바츠는 그녀의 대답을 듣자, 샤오밍을 비롯해서 일리트시의 사람들이 자신의 억양이 이상하다고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책을 읽는 것처럼 또박또박 그리고 딱딱하게 말을 했다.

“레나타, 그런 게 아니야. 난 지금...”

"뭐가 달라? 결국 나랑 몸을 섞는 게 좋았던 것뿐이잖아.”

그녀는 바츠의 말을 가로막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는데, 애써 태연한 척 굴었지만 서운한 기색이 내비쳤다. 눈치 채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나, 바츠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일으켜 그녀를 쫓았다.

“당신이 다치는 걸 원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야. 단지 난 지금...”

그녀는 이번에도 바츠의 말을 가로막았다.

“걱정하지 마. 난 상처 입지 않았으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변하거나 하지는 않아. 알아,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네가 신이라고 했지? 맞아, 넌 신이야. 내게 유일한 신이지. 넌 집사잖아. 뭐든지 할 수 있어. 언제든지 나를 가질 수 있단 말이야. 그러니 내게 미안해하지 마. 그래도 칼보다는 네가 더 좋으니까. 최소한 그 늙은이처럼 내 안에 다른 걸 집어넣지는 않잖아.”

“레나타...”

“됐어. 어차피 금방 떠나려고 했어. 이렇게 일찍 돌아왔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가서 아이기스 녀석들을 찾아서 몇 놈 죽이고, 뭔가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수집해올게. 그게 내가 할 일이잖아. 게다가 며칠 전에 왔을 때 빈손이었지? 이번에는 네가 좋아할 만한 걸로 가져오도록 할게.”

바츠는 짐을 챙겨 떠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녀는 헌터답게 문을 열고 나가는 걸음걸이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런 그녀의 앞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무사히 돌아와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품에 안아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마저도 들었다. 그녀의 슬프면서 당당한 뒷모습이 지친 마음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두통이 생겨났다. 자리로 돌아가는 걸음이 너무도 힘겨웠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지금의 기분을 어떻게든 삭이기 위해 한참을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샤워장을 통과하고 복도를 지나는 동안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전진기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기척을 전혀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헌터는 아니었다. 그들이라면 바츠가 눈치 채기도 전에 문을 열었을 것이다.

“시장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일리트시의 시장이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바츠의 시선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문 앞에서 우물쭈물 거리며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 앞에서 방독면만 벗고 바츠가 묻기도 전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조금 긴장했는지 중간에 몇 번이나 말을 머뭇거렸다.

“젊은 부부가...일리트시로 전입하고 싶어 합니다...떠돌이들이라는데...감염도 없고, 식인을 한 적도 없는...사람들이죠...집사님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그가 바츠의 눈치를 몇 번이나 살폈다. 바츠는 그에게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했다.

“시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맞겠죠. 그렇게 하세요. 프로필을 작성해야 하니까, 다음에 제가 가면 그들을 소개해주세요. 제가 온 뒤로 처음 있는 전입이죠? 기분이 좋네요.”

“네...그래서 말인데...긴히 부탁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북쪽에 오래된 발전소가 있는 것을 아십니까?”

바츠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얼핏 한 번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발전소를 가동시킬 수만 있다면 일리트시는 물론이고, 이 일대에 충분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송전탑과 근처 변전소 그리고 전신주와 도선도 확인하고 손을 봐야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편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작물을 재배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도시 주민들의 굶주림을 조금은 덜 수 있을 겁니다.”

시장은 당연한 소리를 자신만 알고 있는 것처럼 늘어놓았다. 바츠는 우스웠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인가요?”

“일리트시에 있는 엔지니어들과 이야기해 보았는데, 발전소만 다시 가동이 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기지국이랑 닮은 철탑들이 주변에 아직 많이 있습니다. 전신주들이죠. 대부분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간 중간 심하게 훼손된 곳도 있는데, 도선을 연결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도선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있죠. 어딘가 완전히 부서진 곳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수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엔지니어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가능성이 있는 거군요. 제가 해드릴 일이 무엇인가요?”

시장이 바츠의 안색을 슬며시 살핀 후에 대답했다.

“집사님께서는 엔지니어들과 발전소의 상태를 살펴봐 주셨으면 좋겠고, 헌터들에게는 별도로 필요한 부품들을 찾아달라고 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발전소를 가동할 수 있다하더라도 수리가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바츠는 시장의 대답을 듣고는 잠시 생각했다. 시장이 가볍게 말해서 너무 쉬운 일처럼 느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발전소의 수리 가능 여부는 전혀 확인이 안 됐고, 부품 역시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부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르크에서 지원받을 수 없는 부분이다 보니, 헌터들에게 의지해 따로 구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엔지니어들의 추측에 가까운 말만 있었다.

“그럼 부품도 없고, 아무런 진행이 안 된 상태라는 말이군요.”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도시에 엄청난 편리가 제공될 겁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 불확실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어요. 게다가 헌터들까지 따로 동원하면서 말이죠. 그들은 심부름꾼이 아니에요.”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올림푸스의 감자를 가져다 먹자고 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다들 도시를 떠나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단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분명 좋은 이야기지만 어쩔 수 없어요. 사사로이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사사로운!...”

시장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황급히 자신의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바츠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발끈했다. 주제 넘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무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듯 몸을 막 돌려세운 그가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는, 처음 만났을 때 느낄 수 있었던 그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말했다. 업신여기며 무시하는 듯한 그 기색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바츠는 그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지만, 그때처럼 그가 일부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에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았더군요. 셀레나 말이 사실인가요? 그런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일입니다. 집사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함께 간 바론이 이제 겨우 16살이라는 걸 말입니다.”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내놓은 의도를 찾느라 바빴다. 시장은 바츠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 사이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는 올 때보다 훨씬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떠났다. 샤워장의 문이 강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츠는 애써 삭힌 답답한 가슴이 다시 또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두통이 생길 만큼 짜증이 일었다. 아르크 눈에 등록된 그들의 프로필을 뒤늦게나마 지우며,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바론의 프로필을 지우며 그의 나이가 21살로 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허공에 대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답답한 가슴을 털어내야만 했다. 등록된 사진과 직접 그를 보고 느꼈던 기억들이, 떠나가던 칼의 지친 마지막 모습과 동시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칼은 너무 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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