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0화 (90/268)

< --   8. 전주곡   -- >         * 90화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바츠는 잠을 자는 시간 외에는 깊은 생각을 하며 보냈다.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뿐이었다. 누군가가 찾을 때까지 입을 닫고 며칠이든 그냥 있으면 되는 그런 일상. 시간을 보낸다 라는 말보다 시간을 견딘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런 일상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 시간들이 따분하거나 싫증이 나지는 않았다. 시간을 이런 식으로 보내는 데에는 너무나 익숙했다. 단지 지난번 헤러티커를 만났던 날이 자꾸만 원통하게 느껴져서 신경 쓰일 뿐이었다. 중간에 벨리타로부터 답장이 온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연구실에서 몰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 자주 보내기는 힘들다고 했다. 지난번 메시지도 그곳에 같이 있는 다른 연구원의 도움을 통해서, 관리자 몰래 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히 그곳에서 헌터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는데, 바츠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헌터를 친구로 둔 사람이 자신뿐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당당하게 밝혔다고 말했다.

‘내 남자친구가 헌터에요!’

그 때문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고, 그들 중 가장 가깝게 지내던 여자 연구원이 도와주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바츠를 찾는 것만으로도 매우 힘들었다고 말했다. 중앙단말기에 몰래 접속해서 아르크의 헌터들을 찾아봤는데, 바츠의 프로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외부로 메시지를 무작위로 보냈고, 다행히 바츠에게도 보내졌던 것이었다.

그녀는 이번 메시지의 대부분을 의문으로 채웠다. 특히 바츠가 헌터와 다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녀가 테라치에게서 한 번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녀는 집사에 대해 그곳에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기껏해야 헌터들과 다르게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바츠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에게 답장을 하는 것이 자꾸만 망설여졌다. 정확히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면 그녀가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매일 걱정으로 어두운 얼굴을 하고 다닐 것 같았다. 지난 시간동안 전진기지에서 겪었던 일들은 아르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고 꿈에도 몰랐다. 그녀가 그것들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따로 좀 더 안전한 단말기 코드를 보낼 테니, 기다려달라는 말이 있었다. 그녀와 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잠시 미뤄둘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뒤로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바츠는 새로 전입 온 부부의 프로필을 등록하기 위해서 도시에 다녀온 것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들은 동쪽에서 왔다고 했다. 나이는 각각 25살이었고, 떠돌이 생활을 한 것치고는 몸이 깨끗하고 살집도 제법 있었다.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건강한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샤오밍이 몇 번 다녀가기도 했다. 그가 요즘도 가끔 와서 식사를 하고 가고는 했다. 그는 올 때마다 여전히 불만을 터뜨렸다. 전에는 처지에 대한 불평이었다면, 지금은 대부분 시장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탐욕과 야망이 자신들을 너무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근래 들어 빈도가 부쩍 늘었다고 했다. 시시콜콜 잔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욕을 실컷 해주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이해가 돼서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은 어떻게 해서든 스티그마타를 얻고 싶어 합니다. 처음에는 집사님에게도 잘 보이려고 노력했죠. 칼에게 그랬던 것처럼 요. 집사의 추천을 받는 것만큼, 스티그마타를 얻는 쉬운 기회는 없으니까요. 2년인가, 3년 전에 한 가족이 아르크에 온 적이 있을 겁니다. 그때 ‘라파엘’과 함께 갔는데, 칼을 찾아가서 얼마나 우는소리로 하소연을 했는지 모릅니다. 집사의 추천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아르크의 수요가 있어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 기다림은 기약이 없지 않습니까. 억울했겠죠. 그런데 덜컥 집사는 바뀌었고...사실 집사님과 시장이 친하지는 않잖습니까? 그 야꼼한 사람이 그걸 모를 리 없죠. 그래서 더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집사님의 추천 없이, 성과를 올려서 직접 아르크의 눈에 띄고 싶은 거죠. 부사령관에게 말입니다.”

바츠는 샤오밍에게 도시의 식량 상태는 어떤지 물었다. 지난번 시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뭐...썩 좋지는 않습니다. 항상 그랬습니다. 전에도 한 번 이야기한 적 있지 않습니까? 요 몇 년 사이에 아르크의 지원이 부쩍 줄어서 어쩔 수 없죠. 아! 시장이 집사님께 북쪽 발전소 이야기를 했다죠? 기억납니다. 도시에 와서 집사님 험담을 실컷 늘어놓은 적이 있었죠. 그때 무슨 욕을 했는지 들어보시겠습니까?”

바츠는 샤오밍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뒤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할 때에는 진중한 모습이었다.

“시장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화가 날 만도 하죠. 신경 쓰지 마십시오.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순수한 의도도 아니고 말입니다.”

바츠는 샤오밍이 돌아가고 나자, 괜히 기분이 어수선했다. 그의 위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시장의 의도가 어떻든지 주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수선하게 만드는 일은 다음날 일어났다. 발전소 문제로 고심했던 사실을 완전히 잊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장로 로리나, 그녀의 방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하얀색 스카프를 머리에 쓰고 왔다. 소중한 물건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스카프를 특별하게 다루지 않았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소독액에 젖은 스카프를 방독면과 함께 입구 옷걸이에 걸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인데도, 그녀에게는 그다지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로 와 앉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면 당신에게 줄게요. 언제든지 말만 하세요.”

그녀의 말투는 언제 들어도 우아했다. 애정이 넘쳐났고, 매우 상냥했다. 바츠는 그녀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녀의 스카프가 탐이 난 적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지난번 일로 상심이 컸죠? 셀레나에게 들었어요. 당신이라면 분명 자책했을 거예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죠. 하지만 칼이었다면 달랐을 겁니다. 흔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신이 인간을 부러워했다고 해요. 그들은 영생을 가졌거든요. 그들에게는 시간 자체가 무의미했을 거예요. 모든 것에 허무가 깃들었겠죠.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렇지 않아요. 항상 뭔가를 갈망하고 쟁취하려고 하죠.”

바츠는 겨우 잊은 일이 다시 또 꺼내지자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불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녀가 바츠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그 감정을 노련하게 찾아냈다.

“미안해요. 당신을 힘들게 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비가 오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내가 칼을 이곳에서 만났을 때도 비가 내리고 있었죠. 기지국을 수리하러 간 엔지니어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죠. 그가 밖에 나와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사실 그를 발견한 건 당시 젊은 내게는 특별한 일이었어요. 비가 내리는 날, 커다란 바위틈으로 보이는 낯선 사내. 뭔가 로맨틱하지 않나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처음부터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였지만, 지금은 확연히 눈에 띌 만큼 드러나 있었다. 바츠는 그녀에게 말했다.

“장로님, 하고 싶은 말을 간단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게는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말이에요.”

바츠는 그녀가 당시의 비극을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매우 언짢았다. 바츠에게 있어 그때의 일은 가능하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앞으로도 절대 없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는 바츠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히려 자신의 강한 의지를 담아 대꾸했다.

“내가 당신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죠.”

바츠는 기분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나긋나긋하고 고결해보이던 평소의 그녀와 너무 달랐다. 마치 마티프가 그랬던 것처럼 무섭게 으름장을 늘어놓고 있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부드러운 인상에 온화한 얼굴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북쪽 기지국에서 아이기스를 살해한 적이 있었죠? 지난번에는 헌터를 살해하기도 했고요. 그들의 죽음은 어땠나요? 그들의 죽음은 일리트시 주민들의 죽음과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바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혹시 자신의 감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요? 상황을 판단할 때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결론이 나면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긍하지 않나요? 한없이 초연하다가도 어느 순간 강력한 의지가 생기거나, 지나치게 슬픈 와중에도 돌아서면 잊는, 그런 경우 없었나요?”

바츠는 헤르만을 상대로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 패배를 망설임 없이 받아드렸던 것이 떠올랐다. 또, 헤러티커와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역시나 죽음 앞에서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저항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어도 금방 잊고는 했다. 북쪽 기지국에서 아이기스를 상대로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가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어진 그녀의 말들이었다. 바츠는 그것에 더 놀라야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궁지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변하죠. 아무리 나약한 사람이라도 말이에요.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악을 씁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사이에서 자꾸만 혼란을 느꼈을 거예요. 정확히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때마다 이상한 기분은 들었을 거예요. 사실 나르의 방에 역할이 집사에게 굉장히 깊은 외로움을 남기는 것이거든요. 외로움 그 자체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고통이 고통을 느낄까요? 집사들이 한 결 같이 무뚝뚝한 이유가 바로 그래섭니다. 그들의 가슴은 오직 새카만 어둠뿐이에요. 모든 것을 빨아들이죠. 그렇지 않으면 가장 먼저 미치는 건 헌터가 아닌 집사들일 테니까요. 이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죠? 당신은 특별한 경우에요. 보통의 집사들은 대게 이곳에 남아있기만 한 경우가 많아요. 이렇게 혼자서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것이 언제가 처음이었나요? 기억나나요? 집사들을 선별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감수성이에요. 감수성이 풍부할수록 그 외로움에 더 빨리 녹아들거든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남을 이해하는 능력도 좋죠. 완전한 외로움을 가지고 상대를 받아드린다. 이것만큼 전진기지를 지킬 수 있는 이상적인 것이 어디에 있을까요? 헌터들이 자신을 잃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죠.”

그녀는 집사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체험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의 시선을 통해, 그녀가 아르크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집사는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에요. 나르의 방은 그 외로움 속에 분노를 심어줍니다. 그 분노는 필요할 때면 매우 단호한 모습으로 드러나죠. 매우 냉정해요. 무의식적으로 위협이라고 느끼는 대상에게 반드시 나타나죠. 아르크를 지키고 헌터를 보호하며 자기 스스로를 위한 일이죠. 혹시 나르의 방을 통과하며 감정이 속박된 집사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아르크에서 아주 오랫동안 배우잖아요.”

그녀가 한쪽 손을 들고 주먹을 쥐고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사령관께서 아르크를 세우시고, 아이기스로부터 지켜내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아르크를 지키고, 나와 가족 그리고 사령관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벌써 잊었나요?”

바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허리춤에 검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는 그런 바츠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처음 그대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얼굴에는 어느새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가 드리웠을 정도였다.

“잘했어요.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집사들은 한 결 같이 무뚝뚝해요. 정확한 계산으로 해야 할 일을 하죠. 마치 기계처럼 말이에요. 헌터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은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되죠. 외로움은 지상에 나와서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외로움을 받아드리는데 서툴어요. 그래서 집사가 있는 겁니다. 문제는 가끔 집사들이 그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정반대로 행동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잠이 든 헌터를 살해한 집사도 있고, 자신의 도시 주민들을 학살한 집사도 있죠. 아마 자신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겁니다. 수십 명의 군인들이 총을 겨눴을 때에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헌터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헌터들은 생존과 파괴만 배웁니다. 괴물들이죠. 집사가 없다면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들의 죄책감은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고, 그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이 집사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집사는 그보다도 더 괴물이라는 말이에요. 사람을 죽였을 때 어땠나요? 흥분되지 않던가요? 끓어오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더 잔인하고, 더 파괴적인 행동이 저절로 떠오르지는 않았나요?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죠. 샤오밍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시신을 무섭게 내려다보았다고. 갈기갈기 찢으려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어요. 칼처럼 말이에요.”

바츠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카니지를 뽑아들어야 하는지 아니면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무엇보다도 대체 눈앞에 이토록 태연하게 앉아있는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바츠는 물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녀가 기분 좋게 웃고는 말했다.

“내가 전에 비밀에 대해서 했던 말 기억하나요?”

“네. 잊지 않았습니다.”

바츠는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고 말하려던 것은 생략했다. 그녀가 말했다.

“내게도 그 비밀이 있다고 했었죠? 난 지금 당신에게 그 비밀을 이야기하기 위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죠?”

“난 내 비밀이 놀라움에서 그치지 않고 혼란을 야기하길 바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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