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2화 (92/268)

< --   8. 전주곡   -- >         * 92화 *

그녀는 검은 옷 위에, 온 몸을 감출 수 있을 만큼 커다란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위로 샤워장을 통과하며 묻어난 탁한 소독액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고, 깊숙이 눌러쓴 후드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방독면의 정화통이 기괴하게 보였다. 그녀는 한 눈에도 아르크의 헌터였다. 하지만 안으로 내딛는 그녀의 첫발은 어둠을 걷는 것만큼 매우 조심스러웠다. 시선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을 낯설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그녀에게서는 지금까지 본, 다른 헌터들이 가지고 있던 그 특유의 견고함이 덜했다. 특히 양팔을 휘감으면 완전히 품안에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체구가 위화감보다는 친숙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그녀가 망토를 벗자, 검은색 긴 머리칼이 비처럼 그녀의 등을 스치며 허리까지 쏟아졌다. 목덜미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가볍게 한 번 털어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방독면 너머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방독면을 벗으며 말했다. 짜증이 듬뿍 담긴 신경질적인 말투였다.

“아, 더럽게 멀다!”

그녀는 잔뜩 찌푸린 미간과 다르게, 자신의 방독면과 망토를 옷걸이에 거는 손길은 매우 섬세했다. 아무렇게나 거칠게 내동댕이칠 것과 같은 분위기를 풍긴 것과는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그녀가 바츠를 향해 힘 있게 돌아서더니,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정말로 있네?”

그녀의 얼굴에 묻어있던 짜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약간 뾰로통한 기색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지금 그녀가 얼마나 만족스러워 하는지를 대변했다.

바츠는 그녀를 향해 달려 나가며 외쳤다.

“아델리나!”

바츠는 입구에 선 아델리나를 있는 힘껏 안았다. 그녀가 놀라서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싫은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어깨에 둘러지는 바츠의 팔을 이고, 자리에서 방방 뛰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자신과 전혀 다른 바츠의 반응에 금세 수그러들었다. 바츠는 아델리나를 품 안에 안고는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반가워하며 신이 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바츠?...”

바츠는 그녀의 입에서 자신이 불리자, 더욱더 세게 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울렁거리는 가슴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의 떨림을 그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 묻어있던 지상의 냉기가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가 슬그머니 자신의 양손을 바츠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옷걸이에 방독면과 망토를 걸 때보다도 훨씬 주의를 기울인 손길이었다. 혹시라도 바츠가 놀라지 않을까 굉장히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꼭 안자, 진한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녀의 체온과 뒤섞인 매우 무겁고 짙은 향이었다. 그 때문인지 숨을 쉬기 어렵다고 느낄 만큼 호흡이 불편했다. 마치 아르크의 폐기물처리장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전에는 맡을 수 없었던, 전진기지 내의 온갖 악취가 이제야 마구 풍겨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그녀를 강하게 안았다.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마구 비비대기까지 했다. 그러자 허리에 두른 그녀의 양팔이 점점 더 세게 조여 왔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이대로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사용하지 않으면 헤어 나올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바츠는 결국 입으로 있는 힘껏 숨을 내뱉었다. 몸 안에 갇혀 있던 죽은 산소들이 거칠게 빠져나와 그녀의 머리칼을 적셨다. 그녀는 불쾌해할 법도 한데, 약간의 동요도 없었다. 그 뒤를 따라 신음에 가까운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 이상한 소리가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듣기 거북한 소리였다. 전진기지 내에서는 이런 괴상한 소리가 나올 수 있을 만한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목이 졸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비명소리를 닮아있었다. 하지만 뜨겁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허리에 둘러진 그녀의 팔이, 그 소리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천천히 알려주었다.

바츠는 그제야 답답하던 자신의 가슴이 복잡 미묘한 감정들로 마구 들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폐기물처리장에서 이렇게 둘이 부둥켜안고 있었던 그때처럼 뜨거웠다. 그때의 아델리나처럼 감정을 모두 토해내야 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츠의 오열로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바츠는 지금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쏟아내야 했다.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도중에 몇 번이나 억지로 그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강한 경련이 일어나 더욱더 두드러졌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앗아갔던 기계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곳에는 그때 그 우악스런 기계들은 없었지만, 그녀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츠보다도 더욱 크고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바츠의 복받친 감정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바츠는 그녀가 우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는데 바빠 그녀를 위로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이렇게 슬프게 울었던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그 기억을 더듬어보았을 뿐이었다. 덕분에 그녀를 안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언제였는지는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바츠는 아델리나를 안은 채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가까스로 진정된 이후, 아델리나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된 것과 다르게, 바츠는 눈시울조차 붉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델리나가 그런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배고파.”

둘은 그대로 한참을 웃었다. 숨이 넘어갈까봐 배를 잡고 웃어야 할 만큼 박장대소를 했다. 바츠는 그새 눈이 부어오르는 그녀의 얼굴 때문에 웃음이 터졌고, 그녀는 조금 전 바츠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떠올리고 웃었다. 민망한 가운데 서로에게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놀려댔다. 테이블 앞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둘의 웃음소리는 그녀가 자신이 요리를 하겠다며 나섰을 때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그녀는 바츠를 테이블에 앉히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용케 저장소를 찾아서 재료를 가져왔고, 나름 능숙하게 주방을 이용했다. 메뉴는 상한 양배추 스프와 오래된 돼지 육포였다. 곰팡이가 핀 빵도 있었다. 그녀가 빵을 데우겠다며 오븐에 넣었는데, 불의 세기를 조절하지 않아서 새카맣게 타버렸다. 둘은 그것으로도 또 즐거워했다. 마주보고 앉아서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에도, 서로를 흘깃거리며 실없는 웃음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스프가 절반 정도 남았을 때, 바츠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떻게 왔어?”

아델리나는 단 번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프를 떠먹는 와중에도 웃는 얼굴로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며 시간을 끌었다. 바츠가 몇 번이나 사정하다시피 조르고 나서야 대답했다.

“놀랐지? 사실 나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거든. 난 우리 전진기지 근처를 벗어나면 안 되는 줄 알았어. 오로지 북쪽으로만 가야하는 줄로만 알았지. 제한된 범위 내에서 머물러야만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전진기지로 돌아갔더니, 입구에 덩치가 막 엄청난 헌터가 서 있는 거야. 처음에는 놀랐는데, 그게 버니였지 뭐야. 버니가 나를 먼저 알아봤어. 내 걸음걸이만 봐도 안다나 뭐라나. 너도 그래? 어쨌든 난 목소리를 듣고 버니를 알아봤지. 그래서 너랑 똑같이 물었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아델리나가 바츠의 목소리를 과장되게 흉내 내며 물었다. 바츠를 자극하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그녀에게 자신의 몫으로 남아있던 빵을 던졌다. 크게 힘을 싣지 않은 장난스런 행동이었다. 그녀는 흠칫 놀랐지만, 여유 있게 빵을 잡아내고는 겉에 탄 부위를 감자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슥슥 벗겨내며 말을 이었다.

“버니가 그러더라고, 전진기지를 빠져나온 헌터에게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고. 버니에게 형이 있던 것 기억해? 형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그때 생각했지. 아! 나도 더 멀리 가야겠다! 라고 말이야.”

아델리나가 빵을 남은 스프에 찍어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한쪽 볼이 볼록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다. 그런데도 씹는 데는 무리가 없는지, 억척스럽게 입을 우물거렸다. 바츠가 빤히 바라보자, 괜히 자신의 육포 하나를 바츠의 스프 안으로 집어던졌다. 바츠는 그 육포를 꺼내 입에 물며 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던 거야?”

아델리나가 육포를 질겅거리는 바츠의 표정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살짝 퉁명스런 얼굴로 말했다.

“야, 나 바보 아니야. 우리 떠나는 날, 테라치하고 같이 가게 될 집사가 있다고 했어. 집사 훈련을 받은 게 너 하나였는데, 그럼 누가 있겠어. 게다가 테라치하고 갔다면 당연히 이곳에 네가 있을 수밖에 없지.”

바츠는 그녀가 왜 갑자기 짜증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별로 인 것 같아 보여 화제를 슬쩍 돌렸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화를 불렀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버니도 만났어? 버니는 어때? 잘 지내고 있어?”

“잘 지내겠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두 번 밖에 못 만났어!”

“아, 그래? 근데 왜 화를 내고 그래.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되잖아.”

“몰라! 너 짜증나!”

바츠는 별안간 완전히 태도가 변한 그녀가 무척이나 난감했다. 그녀는 꼭 큰 잘못이라고 한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전에 알고 있던 고집하고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남은 빵으로 스프를 휘젓는 모습이 정말 화난 사람처럼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화를 낼 것 같아서 슬쩍 묻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녀가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말투는 어디에서 배운 거야?”

“어떤 거?”

그녀의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왜, 아까 들어오자마자 한 말 있잖아. 더럽게 멀다고. 이런 말 쓴 적 없었잖아.”

“아, 그거!”

그녀가 갑자기 몸을 들썩거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조금 전 바츠와 함께 웃을 때처럼 박장대소를 했다. 바츠는 그녀가 제대로 앉아있기도 힘들만큼 몸부림치는 동안, 남은 음식이나 먹으며 그 모습을 허무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계속 웃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더 재미난 말 해줄까?”

아델리나가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더니, 테이블 중앙 쪽으로 상체를 바짝 당기고는 말했다.

“존나 재밌다, 존나 웃기다, 존나 맛있다. 존나, 존나! 웃기지?”

“그게 뭐야...기분 나쁘게. 그런 말 대체 어디서 배워 온 거야.”

바츠는 아델리나의 이상한 말투가 왠지 불쾌했지만, 그녀는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 묘한 말투를 틈만 나면 사용했다. 바츠가 치를 떨수록 더욱 즐거워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계속됐다.

“아, 난 그만 씻어야겠다. 뒤를 부탁해. 존나 귀찮겠지만.”

바츠는 씻기 위해 욕실로 향하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그 말을 그만 사용하라며 진심으로 소리를 질렀다. 자꾸 들으니 정말 기분 나쁜 말투였다. 그녀는 그제야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얼굴에는 그 즐거웠던 기분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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