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3화 (93/268)

< --   8. 전주곡   -- >         * 93화 *

“너도 봤어? 우리 아르크 뒤쪽으로 엄청 큰 건물들? 신기하지 않아? 어떻게 그렇게 높은 데서 살 생각을 했을까? 소름끼쳐. 네모난 구멍들, 구역질나는 이끼...가본 적 없지? 으스스하다니까. 누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어도 절대 찾지 못할 걸? 아마 은폐 콘솔을 사용하기에 그보다 좋은 곳이 없을 거야. 바로 앞에서 돌아나가자마자 작동시켜도 찾기 힘들 걸?”

그 뒤로 아델리나는 꽤 오랫동안 전진기지에 머물렀다. 그녀가 오븐을 두 번이나 태우고, 창고를 어지르고, 이 좁은 공간에서 헌터 놀이를 하겠다면 떼를 쓰기는 했지만 바츠는 꽤 괜찮은 시간들이라고 생각했다. 마주보고 앉으면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한바탕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면 땀에 흠뻑 젖어도 상쾌했다. 밥을 먹는 것도 즐겁고, 괜히 툭툭 건드려대는 것도 신이 났다. 그러다 그녀가 지쳐 잠이 들기라도 하면,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지난 며칠이 마치 3년 전 그날로 완전히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비록 모두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흐뭇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가장 즐거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느꼈다. 오늘도 역시 싹이 난 감자와 간편식으로 만들어진 토끼 뒷다리고기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끊이지 않는 이야기로 마냥 기뻤다.

“과거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겠지? 굶주림 따위는 없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그때는 지금처럼 아이기스나 헤러티커도 없었을 테고, 거추장스럽게 방독면을 쓸 일도 없었을 것 아냐. 방독면이 존재하지도 않았겠다. 쓸 일이 뭐가 있겠어. 다들 배부르고 편안 생활을 하니 행복하기만 했을 걸? 싸울 일도 없고, 도둑이나 강도가 있었겠어? 아, 부럽다. 나도 그때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바츠? 듣고 있어?”

바츠는 아델리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문득 장로 로리나가 하고 간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아델리나 때문에 겨우 잊고 있었던 골칫덩어리가 모순되게도 그녀 때문에 다시 생각난 것이다. 장로 로리나는 그때 분명 아르크의 빅애스를 뜯어내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처럼 말했다.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표정과 말투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확신이 묻어있었다. 바츠는 아델리나에게 그녀의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아델리나의 생각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안에 씹고 있던 감자를 얼굴로 던지는 바람에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녀가 던진 끈적한 감자가 뺨에 정확히 날아와 달라붙었던 것이다. 바츠는 너무 황당해서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졌다.

“뭐야, 내가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야?”

바츠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볼에 붙은 으깨진 감자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그녀에게 보여주며 눈치를 주었는데,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그녀가 잠에서 갑자기 깬 것 마냥 두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얼굴에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바츠는 그것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고 여유롭게 테이블을 벗어났다. 이리저리 달려 다니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는데, 좁은 방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바츠는 용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녀를 잡기 위해서 한참을 쫓아야 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빨랐다. 잡힐 만하면 휙 달아나버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반사 신경까지 대단했다. 도망치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 위를 밝고 뛰어올라 허공에서 재주를 넘고 내려설 정도였다. 마치 흥분한 프레이 같았다. 어릴 때와는 다른 의미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별명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상당히 민첩했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 협소한 대다가 장애물도 많아서 붙들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제도 그랬고, 그저께도 그랬다. 오늘은 벽난로 앞에 의자를 뛰어 넘을 때였다. 의자의 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드러웠는지, 그녀가 의자를 밟는 동시에 휘청하며 균형을 잃었다. 충분히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녀는 굳이 애써서 달아나지 않았다. 그냥 드러눕듯이 바닥에 넘어졌다. 바츠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 위로 덮쳤다. 그녀의 가슴 위에 올라타서는 양팔을 제압했다. 그녀가 몸부림치며 빠져나가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완력은 바츠에게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아델리나, 사과 해. 안 그러면 풀어주지 않을 거야.”

“싫어! 안 해! 네가 먼저 잘못했잖아!”

아델리나가 바츠의 엄포 앞에서도 꿋꿋하게 반항했다. 목소리는 크고 격앙되어 있었지만, 웃음기가 잔뜩 묻어나고 있었다. 바츠의 체중 때문에 답답할 텐데도 생글생글 웃었다.

“너 그럼 이대로 평생 있어야 돼. 그래도 괜찮겠어?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가.”

“마음대로 해! 너도 꼼짝 못할 걸? 그리고 네가 먼저 내 말 안 듣고 딴 생각했잖아!”

바츠는 웃는 얼굴로 신경질을 부리는 그녀의 고집을 꺾기 위해, 체중을 실어 더욱더 압박했다. 그러자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아파!”

“그럼 포기하고 사과하시지!”

“정말 아프다고 바보야!”

바츠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아델리나의 얼굴은 여전히 즐거운 기색으로 가득했지만, 그녀가 엄살을 떠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물러나면 그녀의 고집에 또 지게 된다는 생각에 살짝 망설여졌지만, 그녀가 다시 한 번 얼굴을 구기는 바람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옆으로 비켜줘야만 했다. 진심으로 아픔을 참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에는 고통에 젖은 외마디 신음소리까지 냈다.

바츠가 옆으로 물러나자, 아델리나가 몸을 일으켰다. 몸부림을 치느라 지쳤는지 상체를 세우는 것이 느릿느릿했다. 힘겹게 몸을 세웠을 때에는, 옆에서 눈치를 보던 바츠를 한 번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바츠는 그녀의 따끔한 눈초리보다도 그녀가 한쪽 팔로 감싸고 있는 그녀의 가슴 쪽에 더욱 시선이 갔다. 그녀는 몸을 감추려는 것처럼 한쪽 어깨를 바짝 움츠리고 있었다.

“미안, 괜찮아?”

결국 사과하는 건 바츠의 몫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자, 괜히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그녀가 화를 자초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가 바츠의 미안해하는 표정을 곁눈질로 슬쩍 훔쳐보고는 반대로 돌아앉으며 말했다. 얼굴에는 어느새 고통스런 표정이 전부 사라지고, 활짝 웃는 미소만 남아있었다.

“정말 미안해? 그럼 나랑 재밌는 거 해볼래? 내가 기분 좋은 거 알려줄게, 응?”

바츠는 완전히 변한 그녀의 태도를 지켜보며, 자신이 또 당했다는 걸 느꼈다. 그녀는 정말 영악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선 그녀의 요구를 묵묵히 따랐다. 그녀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떼를 쓰는 꼴까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라도 오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쪽으로 앉아봐. 빨리.”

아델리나가 바츠를 의자에 앉혔다. 바츠가 항상 앉아있는 그 의자였다. 그녀는 바츠를 그곳에 앉히더니, 뒷걸음질로 서너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별안간 그 자리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몸을 배배꼬기 시작했다. 바츠는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했다. 등골이 서늘할 만큼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슬금슬금 다가오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중간 중간 엉덩이를 살랑거리기까지 했다. 바츠는 잔뜩 긴장한 채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불안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그녀가 바츠의 무릎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손을 쭉 뻗어 바츠의 허리춤을 낚아챘다. 놀란 바츠가 손목을 잡아채자, 그녀가 날렵하게 튀어 올라 바닥에 주저앉듯이, 바츠의 허벅지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왜? 걱정하지 마. 날 믿으라고.”

아델리나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다독이듯 말했다. 하지만 바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버렸다.

“이러지마!”

그녀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미처 대비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츠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는 순간에 허공을 휘젓는 그녀의 손마저도 외면했다. 정확히는 옷을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다. 이전에 그녀가 바지를 벗기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아델리나에게서 레나타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녀를 밀어내는 손길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가 충분히 놀랄 만큼 거칠었다.

아델리나가 바닥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저앉은 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바츠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당한 봉변이 믿기지 않는지 혼란스런 얼굴이었다. 바츠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며 외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그녀도 지지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내가 뭘 했다고!”

“누가 너한테 이런 걸 해달라고 했어?”

“뭐가 어때서! 남자들은 이러면 다들 좋아한다고 그랬어!”

“누가! 대체 누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해!”

아델리나가 이마를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예전에 마티프에게 정면으로 대들 때와 꼭 닮은 모습이었다.

“우리 집사가 알려준 거야! 정말 좋아했다고!”

“뭐라고? 너 제정신이야? 그건...!

바츠는 그녀에게 옳지 않은 일이라고 대답하려다가, 대체 뭐가 옳지 않은 건지 알지 못해서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나 갈 거야!”

아델리나가 문 앞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츠는 그 뒤를 황급히 쫓았다.

“아델리나! 잠깐만, 그런 게 아냐! 나는 그저...”

“뭐가 아닌데? 너는 뭐!”

“난 그저...”

바츠는 아델리나에게서 레나타가 보였다. 그녀가 보여준 것들은 분명 엄청난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지만, 그와 비슷한 크기의 죄책감과 불쾌함도 더불어 전해주었다.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반응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것을 아델리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아델리나가 이해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레나타에게 농락당한 것 같다는 수치심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레나타를 떨쳐냈는데, 아델리나마저도 그녀와 비슷한, 어쩌면 똑같은 모습을 보이자 심각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것을 아델리나에게 가감 없이 말할 자신이 없었다. 바츠가 말을 잇지 못하자, 아델리나가 기운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분노도 약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벨리타 때문이지? 그 얘가 메시지를 보냈잖아. 그렇지?”

“아델리나...”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받았어. 너에게 보낸 거더라. 네가 미워.”

바츠는 별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만 반복해서 불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너한테 난 항상 그 자리에만 있는 거지? 그 얘가 그렇게 좋아? 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머리카락도 기르고,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그녀가 감정이 복받치는지 한차례 호흡을 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지만 목소리에 묻어나는 섭섭함을 숨기지는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내가 그렇게 싫어? 그럼 나랑 보낸 시간들은 다 뭔데? 너랑 함께 했던 일들 전부다 기억하고 있어. 내가 마지막 1년을 어떻게 견뎌냈는데!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데! 난! 난 너 아니면 아무대도 의지할 곳이 없단 말이야...너도 알잖아...”

그녀의 감정이 미친 사람처럼 마구 널뛰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차분하게 묻다가, 갑자기 끓어오른 감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마지막에는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인처럼 회한에 잠긴 듯한 목소리였다. 어딘가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모습이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