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전주곡 -- > * 94화 *
“아델리나,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바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도록 돌려세웠다.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 위로를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츠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손길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악에 바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벨리타는 여기에 없어! 여기에 없다고!”
아델리나의 눈에 눈물이 급격히 차올랐다. 어찌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바츠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그 손길을 피해 달아났다. 자신의 짐을 챙기더니 작별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바츠는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목 놓아 부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그날처럼, 그녀와 뜨겁게 포옹을 했던 그날처럼, 그녀가 벨리타에게는 비밀로 하겠다고 말하며 유유히 떠나가던 그날처럼 그녀를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걸음이 너무도 빨랐다. 그녀가 이미 사라진 뒤에, 혼자 서운한 목소리로 넋두리나 늘어놓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델리나...이 바보야...그런 것이 아니라고...”
바츠는 지난 며칠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정말 꿈이라고 생각될 만큼, 기억이 산산 조각나며 뿔뿔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짙은 고요와 싸늘한 침묵이 방안으로 거침없이 몰아쳤다. 돌아서서 텅 빈 방안을 둘러볼 때에는 마음 한쪽 어딘가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활짝 열린 문으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바츠는 서둘러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 문을 닫기 위해 다시 돌아서는 바츠 앞으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숨이 막힐 만큼 단단하게 느껴지는 사내였다. 그의 망토에 묻어나는 어둠들이 그를 더욱더 견고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는 바츠가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노련했다. 그가 말했다.
“올해는 유독 소란스럽군.”
바츠는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짓누르는,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바츠는 그가 안으로 들어와 방독면을 벗기도 전에 이름을 불렀다.
“스타드.”
“메시지는 받았다. 무사한 걸 보니, 잘 처리가 된 모양이군.”
바츠는 옆으로 비켜서며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어둠은 밖에 둔 채, 몸만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가 방독면을 벗으며 물었다.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은 알고 있나? 어린 아이였는데, 나를 보고도 겁먹지 않더군. 따라가겠냐고 묻는 말에 갈 수 없다는 대답을 하던데, 이곳에 주민이었나?”
바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마치 질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입을 열지는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한심해하는 목소리로 크게 꾸짖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바츠를 바라본 것은 그저 대화를 하는 상대에 대한 예의였는지, 바로 고개를 돌리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남겨진 아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바츠는 불현 듯 쏟아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내일이 오기 전에 떠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단지 본래 계획에 차질이 생겨 돌아왔을 뿐이다.”
바츠는 뒤늦게 앉은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자신 때문에 그가 되돌아오게 된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서 괜히 그에게 물었다. 무안한 분위기를 옆으로 밀어내고 싶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었나요?”
그가 바츠를 이상한 눈으로 한 차례 흘기고는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스톡홀름 시티.”
“네?”
바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말했다.
“낮에도 밤만큼 추워질 때까지 북쪽으로 계속 가면 있다. 200명 정도가 모여 사는 곳이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추운 도시일 것이다. 그리고 매우 높은 수준의 의학이 있는 곳이지.”
“의학이라면 치료하고 고치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물론 그것도 포함이 되지.”
그가 지난번처럼 몸을 뒤로 완전히 기울이며 대답했다.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그 반대로 너무 깊숙한 곳에 있는 기억이라서 떠올리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또 잠을 자는 사람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바츠는 그가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곳에는 왜 가려고 한 건가요?”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시간을 두고 답했다. 바츠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 침묵을 기다리기 힘들었다. 그 전에 착잡했던 기분을 잊을 만큼 급한 호기심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실제로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앞선 약간의 침묵이 그렇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르크에 다녀왔을 때, 부사령관이 그곳의 의학기술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왜죠?”
“의학은 사람의 생명을 결정할 수 있으니 그럴 테지. 누구에게나 똑같이.”
바츠는 그의 대답을 듣자, 혹시나 사령관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그는 200년 넘게 생존해 있는 것이었다. 사령관 말고는 그토록 오랫동안 산 사람이 없었다. 부사령관이 몇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사령관은 항상 그대로였다. 물론 부사령관이 바뀌는 것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최소한 부사령관이 꾸준히 바뀌어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때가 되면 죽음을 맞이했다. 생각해보면 사령관의 생존은 정말 믿기 힘든 일들이었다. 아무리 헤러티커의 엄지가 영약이라지만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바츠는 이런 의문을 놔두고, 문득 엉뚱한 곳에서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똑같다’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는지, 눈을 떠서 바츠를 바라보았다.
“내게 하는 질문인가?”
“모두가 똑같다면 전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바츠는 그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질문을 계속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모두가 아르크의 관리자와 같은 삶을 산다면,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덜 할까요?”
바츠는 전에 착잡했던 기분은 잊었지만 아델리나까지 잊지는 않았다.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널뛰는 감정으로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레벨4에 거주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이토록 미워했을까? 스타드가 그런 바츠의 얼굴을 눈동자만 굴려, 한참동안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의심스런 눈초리였다. 하지만 대답을 거르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
“글쎄, 어려운 질문이군. 하지만 이건 확실한 것 같다. 모두가 똑같다면 그것만큼 혼란스러운 일은 없을 거라는 것 말이지.”
“당신도 장로를 알고 있죠?”
바츠는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생각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 때문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츠는 그에게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그녀가 말하더군요.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똑같은 권리를 갖게 하고 싶다고. 스타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혼란 다음에는 뭐가 있을 것 같나요?”
“...질문이 너무 많군.”
그가 다시 눈을 감았다.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가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가 불안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해 봐요. 그때 칼과 나눈 이야기가 무슨 뜻이었죠? 내가 들을 수 있도록 일부로 그랬잖아요. 아닌가요?”
그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이 든 것처럼 고요했다. 바츠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그가 만들어내는 침묵에 녹아들며, 그가 스스로 이 침묵을 깨뜨리길 바랐다. 그는 바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눈은 그대로 감고 있었지만,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졌다. 바츠는 그가 다시 대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곳곳에 갈등한 흔적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집사는 집사로군. 용케 그때를 기억하고 있어. 칼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군. 하긴 그녀가 접촉을 해온 것도 빨랐지."
“그녀를 신뢰했나요?”
“그녀를 알게 된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은 모양이지? 혼란스러울 거야. 나도, 칼도 그랬지. 그녀는 참 대단하지 않나? 그녀는 정말 용감한 여자야.”
“그녀는 칼에게 겁쟁이라고 했어요. 왜 그런 거죠?”
스타드가 대답을 질문으로 대신했다.
“내가 그녀를 알고 있을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똑같다’라는 말은 아르크에서 관리자들이나 쓰는 말이니까요. 그들은 항상 말하죠. 똑같이 기회가 주어진다고 말이에요. 그 외는 절대 똑같다는 말을 쓰지 않아요. 우리가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단지 우리에게도 똑같아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있을 뿐이죠. 하지만 당신은 그 말을 사용했어요. 그들 이외에 그런 말을 쓴 사람은 장로뿐이었죠. 물론 그 의미는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말한 것은 장로가 말한 것과 같았죠.”
“내가 그랬나? 영리하군.”
그가 짧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여전히 눈은 감고 있었다.
“칼과 나는 그녀를 신뢰했다. 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서로에게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우리는 알게 되었지. 나는 너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가진 것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정확히 무슨 말이죠? 내가 그녀를 신뢰하게 될 거라는 건가요? 나는 그녀를 신뢰하지 않아요.”
“신뢰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나. 너는 이미 그녀를 믿고 있어. 내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지. 최소한 그녀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고 알게 된 것이니까. 나는 여전히 그녀를 신뢰한다."
바츠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와 칼은 이미 그녀에게 협조를 했어야 했다. 둘이 그녀에게 협조를 했다면, 아르크는 이미 큰 봉변을 치렀을 것이다. 아르크를 지켜냈더라도 그 피해는 막심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빅애스가 뜯겨나갔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혀 앞뒤가 맞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가 말했다.
“그녀가 서두르는 것 같지는 않나? 칼이 떠나고 나서 조급해 하는 것 같더군. 그녀에게도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겼거든.”
바츠는 그녀가 전에 골칫거리가 있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신경 쓰였던 것은 사실 같았다. 하지만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후 시장이 찾아왔고, 피티어스가 기아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가져왔다. 그는 올해 70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음날은 샤오밍이 찾아왔다. EN1을 점검하기 위해 엔지니어들과 갔는데, 헤러티커가 있어서 그냥 돌아와야 했다고 했다. 전에 그곳에서 자신이 사격을 했던 것이 화근인 것 같다고 했다. 헤러티커가 그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고 했다. 바츠는 아르크 눈의 지도를 확인해서, 근처에 헌터를 찾아보았지만 확인되는 코드는 하나도 없었다. 스타드 역시 이미 멀리 떠난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작위로 메시지를 보내야 했다. 기지국의 상황과 2km 떨어진 인근 좌표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샤오밍과 함께 그 좌표를 향해 이동했고, 그곳에서 헌터를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를 꼬박 보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을 거라고 예상되는 스타드마저도 오지 않았다. 대신 놀랍게도 벌써 자신의 구역으로 돌아갔어야 하는 아델리나가 왔다. 그녀는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에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우연히 메시지를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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