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5화 (95/268)

< --   8. 전주곡   -- >         * 95화 *

바츠는 미심쩍은 대답에 좀 더 캐묻고 싶었으나, 그녀가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애써 따져 묻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지금은 헤러티커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계획은 이랬다. 주의를 끈 후, 1차적으로 놈의 기동력을 떨어뜨릴 만한 피해를 가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 놈의 기민한 움직임에 그대로 맞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놈을 제대로 상대하는 것은 그 후가 되어야 했다. 최대한 놈을 정적인 상태로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놈을 제압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샤오밍이 먼 곳에서 저격을 통해 놈을 자극하고, 바츠와 아델리나는 흥분한 놈의 이동 경로에 미리 은폐 콘솔을 사용해 기다리고 있다가 놈의 다리를 노릴 생각이었다. 지난번 학교에서처럼 여러 이득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았다.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기지국으로부터 1km 떨어진 지점까지 함께 이동한 후, 바츠와 아델리나는 샤오밍을 떼어놓고 좀 더 접근했다. 중간에 은폐 콘솔로 몸을 감춘 채 기다렸고, 신호를 받은 샤오밍이 기지국 근처를 죽은 영혼처럼 서성이던 헤러티커를 향해 사격을 했다. 주변 전체가 떠들썩할 만큼 커다란 폭발음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총탄은 놈의 왼쪽 눈을 정확히 관통했다. 놈의 고통에 찬 절규가 울려 퍼졌다. 흥분한 놈은 폭음이 사방에서 명향했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샤오밍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놈이 달려가는 길목은 때마침 아델리나가 몸을 감추고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긴장하지 않고 놈이 앞을 지나는 순간, 놈의 오른쪽 다리를 향해 능숙하게 검을 휘둘렀다. 서슬 퍼런 칼날이 텅 빈 허공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놈의 다리를 정확하게 벴다. 완전히 절단될 만큼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지만, 살점이 크게 벌어지며 더 이상의 접근을 막는 데에는 성공적이었다.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서는 놈의 자세가 매우 불편해 보였다. 놈이 달리고 있던 중이었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놈의 단단한 피부와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바츠는 그곳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사실 바츠는 내내 불안으로 초조했다. 어차피 샤오밍은 먼 곳에 있었지만, 아델리나는 자신과 함께 놈에게 근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헤러티커를 상대로 제대로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감히 호언할 수 없었다. 너무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이런 개활지에서는 놈을 상대해본 적이 없던 터라 그 불안이 더 했다. 하지만 우려와 다르게 그녀는 잘해냈다. 침착하게 계획대로 행동했다. 그간의 걱정이 민망할 만큼 당찬 모습이었다.

놈이 아직 반 이상 몸이 드러나지 않은 아델리나를 뒤늦게 발견했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이 그녀를 향해 거친 호흡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의 물러섬도 없었다. 위로 머리 두 개는 더 큰 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전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녀가 은폐 콘솔을 완전히 벗겨내며, 앞에 선 헤러티커를 향해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자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헌터라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됐다. 그녀에게서 약간의 당황스런 기색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무섭게 노려보는 놈의 시선을 온 몸으로 고스란히 받았다.

그런데 그때, 그녀의 몸 전체에서 눈에 보이는 푸른 정전기들이 일기 시작했다. 은폐 콘솔에서 벗어날 때처럼 망토에서 비치는 것들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입고 있는 슈트였다. 바츠는 그녀를 향해 달려가며 생각했다.

‘웜업 콘솔!’

바츠 역시 그녀를 따라 웜업 콘솔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온몸이 따끔거리더니, 순간적으로 꽉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슈트가 눌러 붙었다고 느껴질 만큼 급격히 작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몸은 오히려 더 가벼웠다. 관절에 보조기를 착용한 것처럼 훨씬 편안했다. 무엇보다도 달리던 속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은 거리를 단 번에 좁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근력 자체가 상승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기분은 그녀를 향한 놈의 공격이 3번도 채 되기도 전에, 놈 바로 뒤에 도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녀는 놈의 공격을 모두 유연하게 피해냈다. 그리고 바츠는 그녀에게 휘두르기 위해, 다시 한 번 치켜드는 놈의 팔을 향해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청각이 예민한 놈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다가온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바츠의 칼날이 정확히 놈의 팔뚝을 후려쳤다. 총탄도 막아낼 정도로 단단한 피부가 있는 곳이었다. 큼지막한 상처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휘둘러진 칼날을 간단하게 막아내던 전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쳐낸 방향 쪽으로 상체가 휘청할 만큼 충격이 가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검에 얻어맞은 놈의 팔이 반대쪽으로 홱 돌아갔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놈의 상태가 정상적이 않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아델리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놈이 허우적거리는 사이, 어깨 높이까지 단 번에 뛰어오르더니, 놈의 너풀거리듯 흔들리는 팔의 반대쪽 쇄골을 향해 칼날을 거꾸로 꽂아 넣었다. 놈이 크게 몸부림치는 바람에 깊숙한 상처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몸놀림은 충분히 놀라웠다. 콘솔에 힘을 빌리기는 했으나, 헤러티커와 정면으로 대결해도 민첩함만큼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뿌리치는 놈의 손길을 피해, 뒤로 재주를 넘으며 순식간에 물러났다. 놈이 그녀를 쫓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불편한 다리 때문에 바짝 달려들지는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향만 바꾸었다. 악착같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둘러보는 것으로 답답함을 대신했지만 크게 모자랐다. 그녀는 이미 저만치 달아난 뒤였다. 그 사이 바츠는 놈의 남은 눈을 피해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평소라면 별로 의미 없는 움직임이었을 테지만, 지금의 놈에게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놈이 잔뜩 흥분한 나머지 그녀를 쫓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놈이 불편하게 옮기는 쪽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델리나에 의해서 크게 상처가 난 부위였다. 바츠는 그곳을 정확히 가격했다. 그러자 놈이 비틀거리며 균형을 일었다. 옆으로 쓰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했으나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고, 얻어맞고 부러진 것으로 보이는 다리 쪽을 구부려 앉으며 몸을 지지했다. 동시에 고통에 젖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양팔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댔는데, 놈이 자신의 광기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별히 누군가를 노린 움직임이 아니었다.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놈의 이런 움직임은 여전히 위험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은 허공을 할퀴고 대지를 할퀴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싸늘한 바람소리를 내며, 지면에 치명적인 흉터를 마구 새겨 넣었다. 바츠는 서둘러 멀리 달아났다. 자칫 휘말리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다고 느껴질 만큼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아델리나는 달랐다. 그녀는 오히려 놈에게로 몸을 던졌다. 정신없이 휘두르는 놈의 팔을 피해서 등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조금 전에 노렸던 쇄골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놈의 오른팔이 밑으로 주저앉는 것처럼 축 쳐졌다. 쇄골을 부러뜨리고 어깨를 망가뜨린 것으로 보였다. 그 사이 고통으로 발악하는 놈의 몸부림이 그녀를 미끄러뜨리며 바닥으로 추락하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으나, 바로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면 제법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몸 위로 덮치듯 포개왔다. 그녀를 무섭게 내려다보는 놈의 붉은 눈이 살의로 가득했다. 그녀를 갈기갈기 찢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그 모습을 지켜만 보지 않았다. 같은 실수를 다시 할 수 없었다. 놈을 향해 서둘러 내달렸다. 그리고 놈이 그녀에게 손톱을 휘두르기 직전, 칼끝을 세워 놈의 목을 향해 몸을 던지다시피 달려들었다. 바츠의 칼날이 놈의 목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완전히 꿰뚫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 뺨 가까이 충분히 파고들었다. 놈이 부러진 팔을 휘둘러 바츠를 쳐냈지만, 놈도 달려들며 부딪힌 바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휘청거리며 움직였다. 바츠는 놈의 팔에 얼굴을 얻어맞아 눈앞이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로 일어나 다시 한 번 놈에게로 달려들었다. 놈의 목에서 점성이 짙은 누런 액체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놈은 그때까지도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달려드는 바츠를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내둘렀다. 하지만 바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균형을 잃은 놈의 손길에는 전혀 힘이 실리지 않았다. 바츠는 놈의 손톱을 가볍게 피해내고는, 누런 액체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단단한 막대가 부러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나며 놈의 고개가 상처가 난 쪽으로 홱 꺾였다. 바츠를 향해 휘두른 팔도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삽시간에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츠가 검을 회수하기 위해 놈의 몸통을 걷어차며 팔을 잡아당겼을 때에는, 뒤로 넘어가는 몸뚱이를 따라,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처럼 대롱거리며 함께 쓰러졌다.

바츠는 지면에 쓰러진 놈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지켜보며, 어느새 턱밑까지 차올라 있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멋지게 놈을 쓰러뜨려 놓고도, 이번에도 역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놈은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모두를 몰살시킬 수 있었다. 바츠는 그것을 자신의 거친 호흡으로 느꼈다. 왜 지금까지 헤러티커를 혼자서 살해할 수 있는 헌터가 단 한 명뿐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벌써 두 번이나 놈들과 맞섰지만, 그때마다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셀레나와 레나타가 함께였고, 이번에도 아델리나의 도움이 컸다. 그녀가 어느 틈에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이미 숨통이 끊긴 헤러티커의 사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나름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렌즈를 통해 보여 지는 그녀의 두 눈에 복잡한 심경이 묻어나고 있었다. 바츠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 역시도 고마웠다.

“집사님!”

샤오밍이 저쪽에서부터 천천히 달려왔다. 바츠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야 조금 긴장감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오자마자 헤러티커의 사체를 훑어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댔다. 크기가 크다는 둥, 냄새가 지독하다는 둥 대부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샤오밍이 한참을 떠는 동안, 그때까지도 헤러티커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던 아델리나가 입을 열었다.

“바츠, 이 녀석 엄지 내가 가져가도 돼?”

바츠는 순간 고민이 되었다. 그제야 상황을 인지한 샤오밍의 기대하는 눈빛이 눈에 들어오고, 아르크에서 기다리고 있는 케일리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자신은 차치하더라도 샤오밍에게는 한쪽이라도 챙겨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소리에 힘을 줘 대답했다. 그녀가 말했다.

“...엄마에게 갖다 주고 싶어. 이번 새해에 가서 전해주면 좋아하겠지?”

“물론이지. 그렇게 해.”

샤오밍이 못내 아쉬운 눈길을 보내왔지만, 바츠는 흔들리지 않았다. 직접 놈의 엄지를 잘라 아델리나에게로 건넸다.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바츠와 샤오밍이 기지국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도 모르고, 그 자리에서 손에 들린 그것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바츠와 샤오밍이 기지국 건물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아,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이제 남은 총알은 한 발 뿐입니다. 아직 새해가 되려면 시간이 남았는데 걱정됩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샤오밍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바츠는 그에게 그때까지 별 일 없을 것이고, 부족하지 않은 보급을 받게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위로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질문을 하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엔지니어들은 언제 오나요?”

“내일 오기로 했습니다. 돌아가실 겁니까? 전 어차피 돌아가도 다시 와야 하니, 여기 있어야 합니다.”

“그럼 저도 같이 이곳에 있도록 하죠. 엔지니어들과 같이 돌아가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요. 헤러티커가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잘 됐네요. 혼자 있으려면 심심했을 텐데.”

그의 목소리가 한결 밝아졌다. 뒤늦게 안으로 들어온 아델리나가 자신도 같이 기다려준다고 했을 때에는, 그 전에 있던 어두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 불을 지피기 위해, 밖으로 검불을 모으러 나가는 발걸음이 상당히 가벼웠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손쉽게 검불들을 모아와 불을 지폈다. 바닥에 널린 각종 종이들도 그 양이 꽤나 많아서 땔감으로 유용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