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6화 (96/268)

< --   8. 전주곡   -- >         * 96화 *

다음날, 엔지니어들은 날이 밝자마자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았던 세르히와 미할리오가 함께 왔다. 그들은 오랜만에 보게 되는 바츠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과거 아르크에서 헌터를 환영해주던 부사령관과 관리자들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조심스러우면서도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바츠가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듯 했다. 특히 미할리오는 아델리나에게도 존재감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붙임성이 좋았다. 그녀에게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보통 사람들이 헌터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아델리나가 살짝 난색을 표했을 정도로 친근하게 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의 행동이 특별히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그나 아델리나 둘 다 결국은 아르크에서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나다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모르고, 가까이에 사는 이웃이었을 수도 있었다.

“자, 그쯤하고 서둘러 주게. 이런 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샤오밍이 엔지니어들을 재촉했다. 미할리오는 못내 아쉬운지 쉽게 돌아서지 못했지만, 아델리나는 그 틈에 바츠 옆으로 슬쩍 다가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꽤나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뒷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집사님, 그나저나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이번에 죽은 노인네 말입니다.”

미할리오가 세르히와 함께 점검을 시작하면서 말을 건넸다. 그는 손과 눈은 기기를 만지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용케 바츠에게 말을 걸어왔다.

“먹을 게 워낙 부족하기도 했지만, 자기가 먹을 몫을 옆에 있는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나눠주었다고 하더군요. 참 기분이 묘합니다. 불쌍하기도 하고, 훈훈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우리 몫을 덜 받을 수 없는 일이잖아. 우리 몫이 적어진다고 해도 크게 나아지지 않을 걸?”

옆에서 세르히가 바츠를 대신해서 대꾸했다. 냉정하게 대답은 했지만, 그도 나름 안타깝게 생각을 하는지 목소리는 많이 어두웠다. 미할리오가 숨이 넘어가듯이 한숨을 쉬고 말했다.

“누가 그걸 모르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솔직히 적어도 아르크에 들어가기만 해도 굶어죽지는 않잖아. 가끔은 전진기지를 운영할 필요가 있나 싶어. 사람들한테 헛된 희망만 주는 꼴이잖아. 그 늙은이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어? 내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수십 년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까? 아무리 못해도 아르크에 대한 서운함은 분명 있었을 걸?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사람들을 아르크로 더 받을 수는 없는 건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아르크에는 수용인원이 정해져 있다고. 그걸 초과하면 어떻게 되겠어? 누군가가 불편을 겪게 되는 거라고. 그게 자네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걸 몰라?”

미할리오가 별 생각 없이 바츠에게 건넨 말이 어느새 세르히와의 언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소극적이던 세르히가 이번만큼은 그답지 않게 굉장히 호전적으로 굴었다. 목소리도 점점 커졌고, 약간의 신경질도 묻어나기 시작했다. 미할리오가 그것을 느꼈는지, 앓는 소리로 그를 달래며 화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나도 알지. 왜 모르겠어. 그냥 그렇다는 거야. 빨리 헌터들이 헤러티커를 전부 섬멸하고, 아이기스 놈들이 더 이상 활개 치지 못하게 해야 할 텐데...아마 내가 죽기 전에는 그런 것은 보지 못하겠지? 빅애스가 영원히 열려있는 것 말이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 우리가 아르크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무조건 가족들만 생각해. 자네나 나나 무슨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끔찍해? 우리 가족이 저들처럼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고. 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겠지. 우린 우리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세르히는 끝까지 차갑게 반응했다. 단단히 화가 난 사람처럼 퉁명스럽게 굴었다.

바츠는 세르히를 보고 있자, 전에 시장이 아르크에서 추방된 사람은 도시에 머물지 못한다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당시 시장은 추방된 그들이 아르크에 대해 부정적인 소리를 늘어놓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 그들이 적응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애초에 도시에서 배척을 하는지는 그들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유가 어찌되었든 세르히의 말대로 더 심각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임은 분명했다. 세르히가 지나치다고 생각될 만큼 매정하게 구는 까닭이었다. 미할리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하던 일에만 집중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덩달아 세르히 역시 조용해졌다. 미할리오가 입을 닫으며 상대가 사라진 탓이었다. 내부에는 그들이 만지는 기계소리만 남았다.

바츠는 저쪽에 있던 샤오밍에게 물었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종이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샤오밍 씨, 혹시 북쪽 발전소의 위치를 알고 있나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옆으로 홱 버리며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전에 올림푸스를 돌아볼 때, 근처에 발전소가 있다고 했었잖아요.”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츠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참을 생각해서 뒤늦게 떠올렸다.

“아, 네! 거기 말이군요. 알고야 있죠. 왜 그러십니까?”

“우리 가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죠.”

“그곳을 살펴보자고요? 갑자기 왜요?”

그가 의아하다 못해 황당한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그곳을 가동하면 전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럼 도시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겠어요?”

바츠는 시장이 찾아와 발전소를 가동시키고 싶다며 말했던 일이 기억났다. 그의 말대로라면 발전소를 가동하게만 된다면 작물 재배에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분명 수확량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어쩌면 더 많은 종류의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불확실성이 문제였다.

“글쎄요...칼은 물론이고 그 전 집사들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가봐야겠어요.”

바츠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가동되던 발전소가 멈췄다면, 어딘가 고장이 난 것뿐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고장은 원인을 찾아 고치면 그만이었고, 수리에 필요한 자재는 하나씩 구해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당장 가동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만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설마 늙은이 한 명 굶어죽은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이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인지 아십니까? 오히려 올해는 덜한 편입니다. 운이 좋은 건지, 지원이 줄었는데도 이제 겨우 한 명이잖습니까?”

바츠는 고개를 저었다. 굶주림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한 명이든 두 명이든 더 이상 그런 죽음은 원치 않았다.

“시장님이 그러더군요. 발전소만 가동한다면 형편이 크게 나아질 거라고.”

“시장이요?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시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 놈은! 아니, 그 사람은 자기 자신만 위한 사람이라고요. 그가 주민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다고 이야기할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갑자기 발전소 이야기를 하시나 했더니, 그 놈 때문이었군요. 그때 그 놈이 했던 말은 잊으십시오. 그 놈 말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엔지니어들도 그렇게 이야기했다고 하던데요?”

바츠의 대답에 샤오밍이 작업을 거의 끝내가는 세르히와 미할리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해명을 하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자 미할리오가 바츠와 샤오밍의 눈치를 살피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르히는 작업에 열중해서 샤오밍의 시선을 보지 못했는지 계속 하던 일에만 집중했다. 미할리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리에 있지도 않는 시장이 꽤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저도 샤오밍과 같은 생각입니다. 시장님이 하도 닦달을 해서 듣기 좋으라고 말은 했는데,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자꾸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제가 어찌합니까?”

바츠가 말했다.

“어쨌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네요?”

“시장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네요...네. 가능성이야 있죠. 물론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해 봐야겠지만 말이죠.”

미할리오의 대답에 샤오밍이 벌겋게 타오르는 진한 탄식을 내뱉었다. 체념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내둘렀다. 바츠는 그의 탄식에 힘을 얻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되었네요. 한 번 갔다 오기로 하죠. 혹시 모르잖아요.”

샤오밍은 바츠가 확정적으로 말을 하자, 발로 바닥에 종이들을 걷어차며 볼멘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바츠에게 알겠다고 대답은 했다. 비록 마지못한 말투였지만 더 이상 주장을 내세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바츠는 그가 가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시장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것이 고마웠다. 더불어 미할리오에게도 같이 가자고 부탁했다. 발전소를 가동하기 위해 필요한 문제점을 찾기 위해 엔지니어가 필요했다. 대신 세르히는 먼저 도시로 돌아가는 것으로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델리나가 자신도 가겠다며 나섰지만, 그녀의 의지는 거절했다. 함께 간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이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럼 난 이제 갈래.”

아델리나는 그게 또 서운했는지,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쪽에서 바닥을 걷어차고 있는 샤오밍만큼은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똑같이 바닥을 걷어찰 것 같은 거친 발걸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녀의 짜증이 묻어났다.

바츠는 그녀가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그쪽으로 달려가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향해 돌아보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다치지 마.”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놀랐는지 처음에 살짝 움찔하기는 했지만,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 특별한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이런 반응은 바츠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바츠는 슬그머니 그녀를 놓아주며 한 발 물러났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민망했다. 하지만 뒤늦게 그녀의 방독면 렌즈로 비쳐지는 그녀의 눈웃음을 발견했을 때에는, 그 민망함을 완전히 날려버릴 수 있었다. 입꼬리가 절로 말려 올라가는 것이 느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미사훈련소에서 다음 학년으로 승급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 눈웃음을 끝까지 지우지 않고 돌아섰다. 문을 나서는 걸음걸이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헤러티커의 쇄골에 칼날을 꽂아 넣을 때처럼 굉장히 가벼워 보였다. 바츠는 그런 그녀가 문을 나서고, 문이 닫히며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샤오밍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친구입니까?”

바츠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샤오밍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좋아하시죠?”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사하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것이 좋아하는 감정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벨리타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와 같은 그런 만족스러움이 없었다. 그녀는 그냥 편안했다. 그 사이 바츠의 늦어지는 대답이 샤오밍과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었다. 때마침 미할리오가 점검이 끝났다고 하지 않았다면, 뒷목을 긁적여야 했을지도 몰랐다. 바츠는 애써 어색함을 떨쳐내며 말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가죠! 그런데 그 발전소를 뭐라고 부르나요?”

바츠의 물음에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던 세르히가 대답했다.

“체르노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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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시겠지만 소설에 나오는 지명 대부분은 실제 지명들이고, 특정 건물들의 존재와 위치를 제외한 나머지 지명의 위치들은 실제와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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