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7화 (97/268)

< --   8. 전주곡   -- >         * 97화 *

바츠는 세르히의 대답을 듣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참 어려운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지훈이 알려주었던 고대어인 한국어로 ‘안녕 하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비슷했다. 그보다는 발음하는 것도 쉽고 보다 더 친숙했지만, 낯선 것은 큰 차이가 없었다. 지난번 스타드가 말했던 높은 수준의 의학기술을 가졌다는, 그 도시의 이름만큼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때 그 도시의 이름은 지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으로 든 생각은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약간의 후회였다. 기지국을 빠져나와 막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을 때, 샤오밍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갔다 오는 동안 별 일 없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지금 가진 총알이 한 발 뿐이거든요.”

바츠는 그의 말을 듣자 괜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불안이 고스란히 전염되는 기분이었다. 어스름한 하늘 아래로 바람소리만 존재하는 세상이, 벌써부터 마음 한 켠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미할리오가 옆에서 숨이 막힌 것처럼 놀라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낸 것도 한몫했다. 그는 샤오밍의 고백을 듣고는 벌써 큰 일이 난 것처럼 기겁했다. 정작 당사자보다도 훨씬 긴장한 모습이었다. 샤오밍에게 그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바츠는 샤오밍을 안심시키기 이전에, 미할리오를 진정시켜야 했다. 그는 입에서 돌아가겠다며 우는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샤오밍이 당황해서 애써 무마시키기 위해, 한 발이면 충분하다며 태도를 확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

“내 사격 솜씨를 몰라서 그래? 단발에 상대 머리를 부수는 건 내게 일도 아니라고.”

미할리오는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하겠는지, 바츠에게까지 매달렸다. 바츠의 입에서 별 일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대답대신 샤오밍에게 물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걸리나요?”

“저기 저것이 보이십니까? 오래되어서 많이 망가졌지만, 잘 보시면 뭔가로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있습니다. 저걸 따라서 3일 꼬박 걸으면 됩니다.”

샤오밍이 먼지만 가득한 회색 벌판 위로 이상한 흔적을 가리켰다. 바츠와 일행 오른쪽으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묘한 자국이, 삭막한 지면을 가로질러 쭉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상처의 딱지처럼 지면 위에 눌러앉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크고 작은 균열이 많아서 쩍쩍 갈라져 있었다. 일부는 완전히 조각나 부서지거나,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기존에 길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측을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리트시에서 보았던 어느 정도 다듬어진 길만큼은 아니었지만, 훨씬 넓고 긴 도로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츠가 고개를 돌려 미할리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딱 하나에요. 길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바츠는 그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남에게 의지해야 했다. 그런 그로서는 벌써부터 겁을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을 지켜줘야 할 사람이 불안에 떨고 있는데, 놀라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샤오밍의 불안이 바츠에게 찝찝함을 느끼게 했다면, 그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미할리오는 여전히 불안감이 남아있는 눈치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바츠를 향해 힘을 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애써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집사님, 저기 보이십니까? 저곳이 EN2입니다. 저기 언덕 위에 있는 것 말입니다.”

그때 샤오밍이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붉은 철탑을 가리켰다.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 높이로 보이는 작은 철탑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아무리 작아도 성인 서너 명의 키는 거뜬히 넘어보였다. 샤오밍은 그 철탑을 ‘피의 탑’이라고 불렀다.

“과거에 아이기스 놈들이 아르크의 군인들이나 전진기지의 주민들을 납치해서, 저곳에 걸어놓고는 했다고 합니다. 일부로 숨통을 끊지 않고, 복부에 가로로 깊숙한 상처만 내고는 말이죠. 그럼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몸부림으로, 몸 안에 내장이 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겁니다. 바닥은 물론이고 철탑까지 붉게 물들고는 했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이 저 철탑이 붉은 이유가 그래서라고 말합니다. 철탑이 그때 흘린 피를 뒤집어썼다는 것이죠.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도 그 때문인지 주위에 썩은 내가 진동을 합니다. 프레이들이 자주 나타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냄새를 맡고 오는 것이죠. 과거에 신선한 먹이를 먹을 수 있었다는 기억도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덕분에 저곳에서는 언제든지 프레이를 볼 수 있습니다. 주민들도 종종 찾는 곳이죠. 문제는 프레이만 몰려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헤러티커도 그만큼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근처에서 헤러티커와 프레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일 겁니다. 프레이는 놈들의 귀한 먹이니까요. 그나마 지금은 그 수가 줄어서 많이 보이지 않는 거라고 하더군요.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헤러티커가 나타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프레이를 잡으러 가거나, 기지국을 점검하러 간 엔지니어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많을 때는 네댓씩 나타나고는 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니...”

바츠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는 그 철탑을 바라보았다. 정말 샤오밍의 말대로 혈흔이 남아있는지, 다시 보니 이상하게 더 붉게 보였다. 심각한 악취도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완전히 없었던 일은 아니겠지만 과장되어 부풀려진 것이 틀림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고, 잦은 사고를 겪은 곳이었기 때문에 주의를 상기시키기 위해 공포심을 조장했을 것이다. 철탑이 붉게 변한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이 만든 변화에 불구했다. 그냥 녹이 슨 것이다.

“괴물 이야기를 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군.”

미할리오가 샤오밍의 말을 받았다. 겨우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는지 목소리에 떨림이 심했다.

“체르노빌에 괴물이 잠들어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바츠는 그의 변화가 재미있으면서도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전에도 몇 번 발전소를 가동시키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고요.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고 했죠. 한 번은 발전소를 살펴보기 위해 갔던 군인 둘과 엔지니어 둘이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길을 잃었을 지도 모르고, 아이기스나 노상강도에게 당했을 거라는 말도 있었죠. 하지만 나중에 헌터가 그들을 찾기 위해 갔을 때에는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발전소 깊숙한 곳 여기저기에서 따로따로 발견된 겁니다. 물론 다들 이미 숨은 거둔 상태였죠. 발전소를 가동시키기 위해 살펴본 흔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 시체들이 마치 병에 걸린 것처럼 피부가 울긋불긋하고, 일부는 고름도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몸이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다고 했죠. 게다가 그곳을 다녀온 그 헌터마저도 얼마 뒤에 갑작스레 사망했습니다. 이유도 없이 말이죠. 당시 집사와 주민들이 아르크에 원인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아르크에서조차 이유를 모른다고 했답니다. 그저 땅속 깊숙이 묻어야 한다고 말했죠.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 말라고 경고했답니다.”

미할리오가 입을 닫자, 갑자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조용해졌다. 불어오던 바람만 신이 나서 계속 수다스럽게 떠들 뿐이었다. 바츠는 그 바람소리가 비명소리로 변한 것 같아 음산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샤오밍을 살펴보았을 때는 그의 복잡한 시선을 볼 수 있었다. 그가 긴장한 눈빛으로 미할리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 뚱한 눈빛이었다. 바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미할리오에게 물었다.

“어제 발전소 가동이 불가능할 거라고 말한 이유가 지금 말한 이야기 때문입니까? 거기에 괴물이 있어서?”

샤오밍이 그가 대답할 틈도 없이 끼어들며 말했다.

“어이, 나도 솔직히 발전소에 가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자네 좀 지나친 거 아니야? 괴물이 잠들어 있다고? 그냥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말을 해.”

“집사님, 아닙니다. 아니, 아니라고는 말은 못하지만, 벌써 수백 년이 지난 발전소를 다시 가동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미 기계들은 다 고철이 되었을 겁니다. 게다가 가동하기 위한 문제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아르크의 엔지니어들 중에는 그런 발전소를 다뤄본 사람이 없단 말입니다.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시장님이 자꾸만 애원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대답한 것뿐이라고요. 아마 시장님도 알고 있을 겁니다.”

미할리오가 억울한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샤오밍의 화만 더 돋우었다. 그가 매우 불쾌한지 목소리에 분노를 담아내며 이를 갈았다.

“그럼 그 놈은 소문을 알고도 집사님에게 발전소를 가동시키자고 말한 거야?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군.”

바츠는 샤오밍의 말을 듣자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어서 특별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미할리오에게 물었다.

“그들이 사망한 진짜 원인은 뭐랍니까? 크루엘라 같은 감염이 있었던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아르크에서조차 모른다는데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 뒤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지금처럼 아르크 몰래 접근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전과 똑같이 그곳에서 죽었을 거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죠. 그저 그곳에 숨어사는 괴물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만 할 뿐입니다. 지금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나이든 사람들이나 엔지니어들 사이에서만 도는 이야기이거든요.”

듣고 있던 샤오밍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을 하듯 내뱉었는데, 바츠와 미할리오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혼잣말을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것처럼 했다.

“정말 한심하군. 그런 말을 믿고 겁을 먹다니. 기껏해야 헤러티커에게 공격을 받았거나, 뭔가에 감염이 되었겠지. 그런데 뭐 괴물? 이래서 엔지니어들은 안 된다니까.”

미할리오가 그의 빈정거림을 더 이상 참기 힘든지 발끈하며 나섰다.

“자네가 방금 ‘피의 탑’ 이야기를 하면서 겁을 먹은 건 생각도 안 나나 보지?”

“내가? 내가 겁을 먹었다고? 난 단지 지금 가진 탄약이 부족해서 걱정이 될 뿐이지 무언가에 겁을 먹거나 하지 않아. 특히 자네처럼 괴담 따위에 말이지. ‘피의 탑’? 솔직히 피는 무슨 피야. 오래된 철근이 녹슬어서 붉게 변한거지.”

“그럼 거기에서 지금까지도 나는 피비린내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물론 그런 일들이 없었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분명 과장되었을 거라는 거지. 피비린내? 그냥 역한 냄새가 나는 거라고. 프레이의 배설물일 수도 있고, 주민들이 프레이를 잡고 내장을 꺼내 던져둔 것이 썩은 걸 수도 있지. 거기서 헤러티커에게 당한 주민들의 시체가 썩은 걸 수도 있고. 자네가 지금 얼마나 비약적인 말을 하는지 모르지? 겁에 질려서 그래, 그러니 좀 진정하라고. 집사님이 있는데 뭐가 불안해.”

바츠는 샤오밍의 말을 듣고 있자 괜한 웃음이 났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때 분명 상황이 나빠지면 언제든지 달아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묘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게 됐다. 그러자 샤오밍이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조금 퉁명스러웠다.

“왜요? 왜 그렇게 쳐다봅니까?”

바츠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게 되면 조심하도록 하죠. 헤러티커라면 몰라도 알 수 없는 감염이 있다면, 그건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요.”

바츠는 샤오밍은 물론이고 미할리오에게도 따로 당부를 했다. 둘이 소리 내어 하는 대답을 두 번이나 들었을 정도로 단단히 일렀다. 미할리오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발전소에서 사람들이 사망한 것까지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정말 헤러티커에게 공격을 당한 것일 수도 있고, 병에 걸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을 무사히 다녀온 헌터가 사망하고, 아르크에서 별다른 답을 내놓지 못한 채 그냥 지나친 것이 사실이라면 절대 안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헤러티커라면 나은 일이었다. 만약 크루엘라 같은 감염이 있는 것이라면 정말 최악이었다. 방독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다. 바츠는 심각함을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밀려든 비바람이 불안한 기분을 조금은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바츠는 근처에 보이는 건물로 몸을 피해야 했다. 반쯤 무너진 건물이었는데, 다행히 남아있는 벽이 바람이 불어오는 쪽이라 비를 피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샤오밍이 주변에 너부러진 폐자재들을 주어다가 불을 지폈다. 비도 많이 내렸지만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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