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8화 (98/268)

< --   8. 전주곡   -- >         * 98화 *

“혹시 걱정되십니까?”

바츠가 모닥불 가까이 자리를 잡자, 샤오밍이 반대편 오른쪽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그가 방독면의 렌즈에 성에가 끼기 시작하는데도 불구하고, 용케 그 사이로 바츠의 눈에 아직 전부 가시지 않은 어두운 기색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무거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주의를 당부할 때 지나칠 정도로 대답을 요구했었으니, 눈치 채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바츠는 애써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겁을 준 것 같아 미안했다. 그러자 미할리오가 반대편 왼쪽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바츠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둘의 시선이 오가는 것을 보았다.

“집사님, 제가 했던 말에는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아까 했던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그냥 이야기일 뿐입니다. 전혀 사실 확인이 안 된 것이죠. 이런 괴담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라파엘’ 스타드가 하늘을 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욕구를 변태적으로 푸는 헌터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죠. 심지어 아르크의 사령관이 죽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도 할 수 있죠. 허무맹랑하기도 하고, 그럴싸한 경우도 있죠. 하지만 대부분 그 시작이 어딘지 모른다는 겁니다. 샤오밍이 이야기한 ‘피의 탑’ 같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레 겁먹고 그런 것뿐입니다.”

바츠는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었던 것들이라서 그의 위로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자신의 근심이 더 이상 주변에 펴져나가는 걸 원치 않았다. 그 틈에 미할리오가 눈동자만 굴려 슬쩍 샤오밍을 살폈다. 바통을 넘겨 뭔가 더 독려할 수 있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그 시선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모닥불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불씨나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의 탑’ 이야기는 진짜일지도 모른다며 구시렁거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어진 말 같았다.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덕분에 셋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미할리오의 눈가에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자신의 말에 힘을 보태주길 바랐던 모양인데, 오히려 반대로 반응하자 황당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작을 만든 당사자는 샤오밍이었다. 미할리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바츠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을 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살폈다. 바츠는 그런 샤오밍의 모습이 우스웠다. 특히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모습이, 잔뜩 혼이 난 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뾰로통해져 고집을 부리는 것만 같아 너무 재미있었다. 샤오밍과 미할리오는 그런 바츠를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니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츠가 계속 웃으며 샤오밍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미할리오가 뒤늦게 알아채고 함께 웃었다. 샤오밍만 끝까지 웃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다. 바츠는 자꾸만 말과 행동이 엇갈리는 둘을 충분히 이해했다. 머리가 시키는 일과 가슴이 시키는 일이 항상 같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님도 발전소에 가는 것이 크게 내키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한바탕 울려 퍼진 웃음소리가 진정되자, 샤오밍이 뒤늦게 말문을 열었다. 미할리오가 그를 원망스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잠시 뿐이었다. 가운데 놓인 모닥불 때문인지, 분위기는 금방 엄숙해졌다. 샤오밍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가려고 하는 이유도 알죠. 주민들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이미 전에 헌터에게 납치당했던 말레나의 딸을 돌려받기 위해 나설 때부터 느꼈습니다. 많은 것이 달라질 거라고 말이죠. 칼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그에게는 항상 헌터가 먼저였고, 그 다음이 아르크의 주민이었습니다. 일리트시의 주민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죠. 물론 그가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건 압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적도 있죠. 하지만 그건 이전에 집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들에게 일리트시는 그저 최소한의 필요일 뿐이니까요. 아마 집사님이 고집을 꺾고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면, 오히려 제가 말을 바꿔 한 번 가보자고 했을 겁니다.”

바츠는 뿌옇게 일어났던 성에가 완전히 걷힌 방독면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샤오밍의 뜨거운 시선을 보았다. 그는 모닥불의 열기를 담아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눈을 돌려 반대쪽을 살폈을 때에는, 말없이 고개만 슬며시 끄덕이는 미할리오도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샤오밍이 계속해서 말했다.

“도시에서 집사님의 이야기는 항상 주변을 밝게 만듭니다. 지난번 학교에서 주민이 넷이나 죽었을 때에도, 집사님 탓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다들 알고 있습니다. 집사님이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지 말이죠. 그리고 뭔가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것도요. 저는 그것이 긍정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집사님을 믿을 생각입니다.”

바츠는 그의 말끝에 생략된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보다 자연스러워지려면 조건을 내걸어야 했다. ‘만약...을 하지 않는다면’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집어삼킨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말 실수였을지도 몰랐다.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진심이 담겨있었다. 바츠는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집사들은 원래 생각이 많거든요. 이번에도 그런 생각 중 하나였을 뿐이에요. 그러니 다들 그만 자도록 해요. 밤은 저 혼자 보내도록 하죠.”

바츠는 샤오밍과 미할리오의 위로로 기분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약간의 응어리가 남아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이 응어리는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순전히 바츠의 몫이었다. 좀 더 특별한 위로를 스스로 찾아 삭혀내야만 했다. 불침번을 자처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지면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새도록 귀를 기울이면, 내일 날이 밝을 때쯤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심하지만 다정하게 들리는 빗소리에게는 충분히 그런 힘이 있었다.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군말 없이 자리에 몸을 뉘었다. 바츠에 대한 신뢰로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겠지만, 한편으로는 바츠의 심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그들이 잠들고 나자 빗소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마음에 남아있던 마지막 불안을 자극했다. 사실 본인 스스로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던 불안감이었다. 걱정으로 인한 우려가 생겨난 것치고는 너무 끈덕졌다. 바츠는 그래서 기분이 어두웠다. 그 느낌이 너무 불쾌했다. 기분이 한순간에 심란하게 변했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렇게 들춰내지자,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리트시의 전진기지로 온지 벌써 한참이 지났다. 한참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만큼 많은 사람이 죽었다. 모르겠다. 누군가에게는 고작일 수도 있었다. 크루엘라와 헤러티커가 휩쓸고 간 목숨은 전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정말 비루했다. 하지만 숨이 멎는다는 것은 항상 우울한 일이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츠는 하나의 숨이 멎으면 그 주변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일 수도 있었다. 미할리오의 괴담을 듣고 다른 때와 달리 민감하게 굴었던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말이 혹시라도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사실로 나타난다면 샤오밍과 미할리오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바츠에게는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행동과 기분을 결정하는 것이 항상 머리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츠는 한쪽 가슴이 날카로운 파편이라도 박힌 것처럼 불편해졌다. 그리고 그 이물감이 통증으로 변해가자 서둘러 빗소리에 더욱더 집중했다.

지면으로 곧장 떨어지며 젖은 먼지를 날리는 빗물과 무너져 내린 벽면에 점점이 장막을 만들어 흐르는 빗물 그리고 수줍게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이 어우러지며 소란을 만들고 있었다. 짧고도 강렬하게 이루어지는 다양한 추락들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모습이 시간과 꼭 닮아있었다. 그들에게는 고민이라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문득 그들이 반대로 움직이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빗물이 지면에서 하늘을 향해 거꾸로 치솟고, 시간이 뒤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럼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며 큰 혼란을 만들어낼까? 아니면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순간을 달릴까?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만들어지는 소란이 심연으로 끌어당기는 음악 같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바츠가 빗물의 손을 잡고 눈을 뜬 채 잠이 들었을 때, 어둠 속 저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빗소리가 작은 소음을 실어왔다. 바츠는 그 소리를 정확히 감지해냈다. 바로 옆에서 들여온 것처럼 또렷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줄기의 신랄한 신음소리 외에 분명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있었다. 물에 젖어 질펀해진 지면을 걷어차고, 내려오는 빗물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차이는 그런 소리. 바츠는 빗소리에 취해서 멍했던 정신을 단숨에 추슬렀다. 그리고는 모닥불을 가로질러 무너진 벽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을 뛰어넘던 비바람이 옷깃을 건들었다. 바츠는 바람에 날리기 시작하는 망토를 잘 여몄다. 위태롭게 변해가는 후드도 점검했다. 그 사이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바츠는 눈앞으로 보이는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등 뒤에 곤히 잠들어있는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느껴졌다. 그들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자 점차 가까워지던 소리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도중에 증발한 것처럼 완전히 기척을 감췄다. 하지만 바츠는 금세 어둠 저편에 몸을 숨기고 있는 소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내려앉는 빗줄기를 방해하고 있는 장애물이었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한쪽 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검지만 펴서 두 어번 까딱였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던 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보다는 훨씬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바츠는 그 소리의 정체를 침착하게 기다렸다.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인내심은 충분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소리는 낯선 실루엣을 데려왔다. 모두 둘, 방독면을 소지한 두 명의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바츠를 발견하고는 중간에 걸음을 멈춰 섰다.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는 했지만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한 눈에도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바츠는 그들이 적당한 거리까지 왔을 때,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상대적으로 체구가 더 큰 사람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대답했다.

“잠시 비를 피하고, 몸을 말릴 수 있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는 바츠와 비슷한 체구의 사내였다. 옷은 떠돌이치고는 상당히 좋은 가죽 옷이었고, 얼굴에 뒤집어 쓴 방독면도 꽤나 상태가 양호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하는 건 그가 바츠를 향해 뻗은 양손이었다. 비를 오랫동안 맞은 탓인지 약간의 경련이 일었지만, 평소라면 전혀 떨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바츠는 그에게서 시선을 거둬, 뒤쪽에 남은 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용케 눈치를 채고는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사내 옆으로 나란히 서며, 사내와 똑같이 양손을 내밀었다. 그는 사내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여자였다. 겁에 질린 탓인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뻗은 양손은 사내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떨림이 없었다.

바츠는 물었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군.”

바츠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르크의 헌터시지 않습니까. 저희는 크로스 시티로 가는 길입니다. 그곳에서 엑소시스트가 될 생각이죠. 엑소시스트들에게 헌터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세상을 정화하는데 가장 앞장선 분들이니까요.”

바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지만, 우선은 모닥불 앞에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그들에게서 최소한 인육을 먹은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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