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99화 (99/268)

< --   8. 전주곡   -- >         * 99화 *

그의 이름은 레이븐이었다. 동쪽으로 4일 거리에 있는 카를로프카라는 마을에서 왔다고 했다. 20명 남짓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샤오밍과 미할리오를 피해, 함께 온 여자와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캣이었다. 둘은 한명이 조금 떨어져서 건너편에 앉으면 편한 자세를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좁은 자리에 최대한 달라붙어 앉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보고 빈자리가 더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들이 그것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둘은 양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는 물었다.

“그런데 엑소시스트가 뭐지?”

바츠의 물음에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왔다. 무슨 이유인지 눈빛에 의아한 기색이 비쳤다. 그리고는 잠시 그렇게 바츠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뭔가 큰 결정을 하는 것처럼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바츠는 그들을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정적이 흐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레이븐이 대답했다. 그의 눈이 의심을 담고 날아왔다.

“헌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을 과거 평화로웠던 시절로 다시 재건하기 위해 정화를 행하죠. 헤러티커를 살해하고, 강도들을 벌하며 옳은 일들을 하면서요. 차이라면 아르크의 선택을 받았는지, 신의 선택을 받았는지의 차이입니다.”

바츠는 그의 의심스런 눈빛보다도, 그가 헌터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둘은 헌터를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내뱉어지는 그의 말 속에는 묘한 동경심마저 묻어났다. 바츠가 그의 의심스런 눈빛을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이유였다. 경계를 하는 것 같던 눈빛이 중간에 점차 호의적으로 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바츠는 그에게 진짜 헌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했다. 적어도 헤르만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줘도, 그의 기대를 완전히 산산조각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바츠는 그러지 않고, 또 다른 관심에 주목했다.

“신? 나를 말하는 건가?”

바츠의 물음에 레이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캣과 눈빛을 주고받고 나서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세상을 만든 분을 말하는 겁니다. 흙을 만들고, 비를 내리고, 빛이 있도록 하신 그 분 말이죠. 엑소시스트들은 그 분을 위해 싸우는 겁니다. 지금의 세상을 그 분이 만들었던, 이전의 완벽한 세상으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서죠. 헌터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바츠는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흙은 무기물 덩어리였고, 비가 내리는 것은 물의 순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며 빛은 태양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헌터들은 그가 말한 신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한다. 전진기지에서 신은 집사뿐이었다. 헌터가 의지하는 대상은 집사가 유일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런 사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전에 시장에게 태양이 흐린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가 별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을 그냥 무시해버리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크로스 시티라는 곳은 어디에 있지?”

그가 이번에도 시선을 옮겨 캣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바츠는 자꾸만 반복되는 그의 버릇 같은 행동이 굉장히 거슬렸다. 그에 대해 불신이 생겨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참고 기다렸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거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도 입을 열지 못했다. 대답하기 곤란한지 쉽게 입이 열리지 않는 눈치였다. 불편한 시선으로 바츠의 얼굴을 스치듯 몇 번이나 흘겼다. 바츠는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더 기다려도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만 포기하고 다른 질문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물쭈물 대며 매우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다.

“...저도...잘 모릅니다...”

바츠는 그가 정말로 못 미더워졌다. 그의 의심스런 눈초리를 받았었다는 사실이 억울할 정도였다. 오히려 이상한 건 그 자신이었다. 목적지가 있으나 위치를 모른다니, 이보다 멍청한 소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 바츠는 그가 한심하다 못해 황당했다. 그가 말했다.

“그냥...서쪽 어디라고만 들었습니다.”

바츠는 이들이 용감한 것인지 어리석은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하게 목숨을 내던진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런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딱 하나였다.

“집으로 돌아가.”

바츠는 말끝에 멍청이라는 단어는 애써 속으로 삼켜냈다. 그러자 그가 크게 반발하며 대꾸했다. 몸을 한 번 들썩였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안됩니다! 그럴 수 없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츠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살짝 놀랐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캣에게 의사를 묻지 않으면 간단한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지금은 그녀가 없더라도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의욕이 넘쳤다. 정확히는 흥분해서 이성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눈치를 살폈다. 옆에서 그의 등을 쓸어내리는 캣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가 급격히 흥분을 가라앉히며 민망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미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잠에서 깬 뒤였다. 놀란 샤오밍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남은 한 발을 여기에서 쏠 기세였다. 둘은 겁에 질려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야 했다. 그 사이 미할리오는 막 눈을 떠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양팔과 엉덩이를 이용해 뒤로 기어서 저만치 물러났다. 바츠는 쓴웃음을 삼키며 샤오밍과 미할리오를 진정시켜야 했다.

“정말 멍청이들이군.”

샤오밍이 그들에게 내뱉은 첫마디였다. 바츠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에 앉는 샤오밍과 미할리오에게 둘을 소개하고,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그랬더니 샤오밍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츠가 아껴둔 말을 대신 해주었다. 바츠는 왠지 가슴이 후련했다. 그러자 레이븐이 말했다. 물론 캣과 눈빛을 교환한 뒤였다.

“마을의 촌장이 제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샤오밍이 그에게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캣과 눈빛을 교환하고, 힘없이 대답하는 그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바츠는 샤오밍이 있으니 굉장히 편한 기분을 느꼈다.

“촌장이...모든지 자기 마음대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그의 허락이 필요하죠.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요. 심지어 용변을 보는 것도 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레이븐의 대답을 들은 샤오밍이 촌장을 거친 욕설로 모욕하고 나서, 짧게 혀를 차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그런 멍청한 짓을 하면서 지금도 살고 있단 말이야?”

“그럼 어떻게 합니까? 촌장에게는 총이 있어요. 엄지보다 굵은 총알이 들어가는 커다란 총이죠. 그 총에 맞고 싶지 않으면 이렇게 달아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요.”

레이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겁을 먹은 것인지 억울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샤오밍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앙되기 시작했다. 레이븐이 처했던 상황이 화가 나게 만든 것 같았지만, 레이븐의 어눌한 태도도 한몫 거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사람들하고 그 놈을 죽이든지, 쫓아내던지 뭐든 해보지 그랬어? 어차피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하며 살 바에는 다 같이 덤벼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냐? 기껏해야 한두 명 밖에 더 죽겠어? 그 정도 희생은 할 수 있는 것 아냐!”

“모르는 소리입니다. 그곳에 남자는 저뿐이었다고요. 여자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레이븐의 대답이 결국에는 샤오밍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는 레이븐의 대답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레이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개 같은 소리가 어디에 있어! 여자가 뭐?”

바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에게 힘이 없다는 말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르크에서는 여자도 충분히 군인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헌터가 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여자에게 육아와 가사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인식이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고난 신체적 특수성을 고려한 효율에서의 문제였을 뿐이지 결코 절대적인 인식이 아니었다. 아르크에서 레이븐과 같은 말을 하면 무시당하거나 손가락질 받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 감정을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레이븐에게 아직 변명거리가 남아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븐이 옆에 꼭 붙어있던 캣을 와락 안으며 말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왔단 말입니다! 우린 군인도 아니고 헌터도 아니에요! 난 죽는 것보다 캣과 함께 오랫동안 사는 게 더 좋단 말입니다! 죽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샤오밍이 그런 레이븐을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품에 안은 레이븐의 머리를 애정 어린 손길로 쓰다듬는 캣의 얼굴이라도 걷어차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눈물겨운 대답을 듣자, 한편으로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매운 힘든 일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경험한 적이 있지 않은가? 시장에게 태양의 색이 노랗거나 붉다고 이해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그 시간을 가늠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샤오밍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샤오밍이 정말 저 둘에게 발길질을 하기 전에, 그를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이지? 돌아가기는 싫고, 가야 할 곳이 어딘지는 모르잖아? 당장 굶어죽을 수도 있을 텐데, 계획은 있을 것 아니야.”

레이븐이 품안에 캣을 그대로 안고는 슬쩍 눈만 굴려 눈치를 보았다. 그마저도 바츠에게로 바로 오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서 모닥불을 들여다보며 씩씩거리는 샤오밍을 거쳤다. 샤오밍이 그 시선을 느끼고, 레이븐에게 캣에게서 떨어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거친 욕설도 함께였다. 레이븐은 그제야 그녀를 조심스럽게 놓아주며 대답했다. 불안한 사람처럼 안정적이지 못한 목소리였다.

“키예프 시티로 갈 겁니다.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곳이죠. 그곳에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동쪽으로 가는 떠돌이들이 꼭 거치는 곳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각종 물건을 싣고 돌아다니는 칼맨들이 자주 온다고 합니다. 우선 거기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할 생각입니다.”

샤오밍이 물었다. 잔뜩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 사이 레이븐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캣을 향해 고함을 지른 것도 잊지 않았다.

“돈은 가지고 있어?”

레이븐이 화들짝 놀란 캣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대답했다.

“돈은 충분합니다. 이런 것이 3장이나 더 있죠. 과거 물건들은 비싸게 거래가 되니까요.”

레이븐이 품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놨다. 직사각형의 몸통만한 종이였는데, 겉에 얇은 막으로 포장이 되어있어서 상태가 굉장히 양호했다. 작은 글씨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 중에서도 하단 정중앙에 가장 큰 글씨가 눈에 띄었다.

‘GCP, 단돈 50달러로 만나보십시오! 당신에게 세 번의 세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샤오밍이 한숨을 크게 쉬고는 고개를 돌려 바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사님, 우리도 그쪽을 지나쳐야 하니까 함께 가도록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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