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전주곡 -- > * 101화 *
“집사님, 제가 한 번 보고 오겠습니다.”
모닥불을 지피는 데 성공한 미할리오가 바츠가 따로 말하기도 전에 자진해서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샤오밍과 둘이 간 곳을 살펴보더니, 이내 겁에 질려 우는 아이처럼 허겁지겁 달려서 돌아왔다.
“집사님! 큰일 났습니다! 샤오밍이 이상한 놈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츠는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았으면 벌써 건물 밖에 섰을 텐데, 뜻대로 되질 않았다. 이제 고작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었을 뿐이었다. 굵고 긴 탄식이 절로 나왔다. 건물 입구까지 거리가 일리트시에서 이곳까지 온 거리만큼 길게 느껴졌다. 그 사이 멀리서 들려오던 소란이 보다 더 격렬하게 변하고 있었다. 미할리오가 옆에서 안절부절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당장이라도 바츠의 등을 떠밀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그의 모습에 절로 터지는 헛웃음을 애써 아끼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몸 위로 떨어지는 빗물들이 무겁게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후드 끝자락을 타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들이, 방울진 빗물이 묻어있는 방독면의 렌즈를 통해 눈에 들어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에 비해서 크기가 훨씬 컸다. 그 물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의욕과 기운도 함께 떨어져나가는 것 같았다.
“집사님!”
옆에서 애를 태우던 미할리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바츠를 재촉했다. 샤오밍과 두 사람이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가만히 있기 힘든 모양이었다.
바츠는 샤오밍이 자신의 커다란 총을 좌우로 휘둘러 가며 주변에 몰려든 세 사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손가락 길이의 날이 달린 짧은 칼과 주변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크고 작은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샤오밍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번갈아가며 샤오밍에게 한 발 접근했다 물러나길 반복하며 위협을 가했다. 그 옆에는 레이븐이 자신의 방독면과 옷을 벗겨가려는 두 사람을 상대로 악착같이 견뎌내고 있었다. 둘 다 레이븐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었지만 악착같이 달려드는 통에, 레이븐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캣이 자신을 데려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한 사람을 상대로, 레이븐의 다리를 붙들고 버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않고 있는 사람을 향해 필사적으로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모두 방독면이 없는 것을 보니, 지상에서 살아가는 야인들 같았다. 미할리오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는 내내 바츠를 몇 번이고 불러댔다. 초조함으로 다급한 목소리였다.
바츠는 걸음을 서두를 수 없었다. 몸이 불편한 까닭도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건물들을 살피느라 신중했기 때문이었다. 휑하니 안이 들여다보이는 수많은 건물들 중에, 또 다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특히 난동이 벌어지고 있는 자리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5층 건물이 신경 쓰였다. 바로 앞 엇갈린 길을 비롯해서, 길을 따라 멀리까지 시야를 확보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건물의 벽면에 너덜너덜하게 걸려있는 커다란 알파벳이었다. 사람 몸통보다 큰 크기였는데, 철자를 하나하나 둥그스름하게 만들어서 건물을 장식하고 있었다.
‘A, R, Plaza.'
앞선 두 글자 앞뒤로 더 많은 글씨가 있었던 모양인지, 그 흔적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었다. 그 건물에서 마음만 먹는다면, 몸을 감춘 상태로 언제든지 밑을 향해 위해를 가할 수 있었다.
바츠는 그 사이 점점 소동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5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뜨겁게 열이 나고 호흡이 가빠서, 자신의 몸을 가누는 것도 힘에 부쳤다. 카니지를 제대로 뽑아들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바츠의 우려와 다르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갔다. 레이븐의 물건을 빼앗아가려고 달려들던 사람 중 한 명이 조금씩 접근해오던 바츠을 먼저 발견한 것이다. 그가 바츠를 발견하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톤이 높은 여자 목소리였다.
“헌터다!”
짧은 머리에 각진 얼굴을 가진 그녀가 바츠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그러자 정신없이 난리치던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바츠에게로 집중됐다. 거짓말처럼 동시에 몸이 굳어지는 모습이 믿기지 않을 만큼 정확히 일치했다. 그들은 바츠의 모습을 보고는 완전히 경직되었다. 샤오밍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위협하던 사람 중 가장 체격이 좋은 사내의 얼굴에 개머리판을 적중시켰다.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샤오밍보다 더 큰 체격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집사님!”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느낀 샤오밍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상황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환희와 더불어 역전된 분위기에 대한 즐거움이 묻어났다. 레이븐도 감격에 겨운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다리를 붙든 채 바닥에 누워있는 캣을 일으켰다. 그들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들의 환호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일행을 위협하던 야인들을 쫓아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널따란 도로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데 바빴다.
바츠는 자신의 뜨겁고 거친 호흡이 방독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안쪽을 맴도는 것 같았다. 숨을 쉬면 쉴수록 산소가 부족해서 숨이 막혔다. 방독면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로인한 어지러움이 눈앞에 환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오른쪽 도로를 따라 저쪽에서부터 한 사람이 비를 뚫고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 이상했다. 체격은 2m를 훌쩍 넘는 키에 한쪽 어깨가 사람 머리통보다 컸고, 구부정한 허리와 다리 길이에 비해서 유난히 길고 넓적한 발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불편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굵은 양팔의 끝에 달린 날이 바짝 선 손톱 여럿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길이가 무려 20cm에 달했다. 바츠는 샤오밍을 향해 외쳤다.
“달아나요!”
바츠의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오른쪽을 향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는데, 그 비명 속에 공통된 외침이 있었다.
“헤러티커다!”
바츠는 이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샤오밍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쪽을 향해 달리기 직전 다시 한 번 널따란 도로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도로에 널린 각종 건물의 잔해들을 날렵하게 뛰어넘으며 달려오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굵은 비를 뚫고 양팔을 내두르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은 굶주림과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뿌연 빗줄기 사이로 비쳐지는 붉은 두 눈이 벌써부터 사람들을 찢어발길 생각으로 즐거운 것 같았다.
바츠는 남은 힘을 쥐어짜서 달렸다. 지금 몸 상태로 놈을 상대하면, 제대로 된 반항을 하기도 전에 살해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놈과 맞서는 것은 항상 어리석은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옆에 나란히 달리는 미할리오의 겁에 질린 신음소리가 그의 거친 숨결과 함께 들려왔다. 바로 뒤에서는 샤오밍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그 뒤로 또 하나의 발소리가 있었다. 거칠고 투박한 놈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바츠는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조금 전 미할리오와 함께 모닥불을 지펴둔 건물 안으로 급히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는 안쪽 깊숙이 달려 들어가 각종 선반들을 뛰어넘어 구석에 몸을 숨겼다. 거의 자리에 누운 것처럼 몸을 완전히 바닥에 밀착시키고 선반에 뒤통수를 기댔다. 그러자 뒤이어 미할리오와 샤오밍이 각각 양옆으로 몸을 날리며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레이븐 역시 함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선반을 날렵하게 넘어서려고 했지만, 발끝이 걸리는 바람에 바닥에 쳐 박히듯 굴러 떨어졌다. 샤오밍이 그런 그를 챙기며 똑같은 자세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앓는 소리를 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츠는 이대로 숨을 죽이고 한참을 누워있었다. 자신의 숨소리가 양옆의 샤오밍과 미할리오에게까지 들릴 것처럼 크게 느껴졌다. 헤러티커에게는 소음에 가깝게 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놈은 오지 않았다. 밖에는 그저 아까부터 내리던 빗소리만 외롭게 들려올 뿐이었다.
“놈이...다른 곳으로 간 것 같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샤오밍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헤러티커의 기척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이쪽으로 오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는 야인들을 쫓아간 모양이었다. 미할리오가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 교차로 앞에 플라자라는 건물 보셨습니까? 제가 달리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놈이 그 건물을 통째로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것을 봤습니다. 그 안으로 달아나는 야인들을 쫓아가더군요. 아마도 그 건물이 야인들의 소굴인 듯 합니다.”
바츠는 미할리오의 말을 듣고 나자 긴 한숨이 쏟아졌다. 동시에 기운이 없는 몸뚱이가 완전히 피로해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조용히 눈치만 살피던 레이븐이 울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목구멍이 막히는 울음소리를 냈다. 소리가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 애써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샤오밍이 상체를 일으켜서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그가 완전히 바닥에 드러눕고는 목이 메는 소리로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울음소리를 감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바츠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시선을 느낀 샤오밍이 씁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캣이 놈들에게 붙들려 갔습니다. 마지막 달아날 때, 제게 얼굴을 얻어맞은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캣을 그대로 둘러메고 가버렸거든요.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바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바로 일으키지 못하고 손으로 바닥을 집고 주변을 지지하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리고는 몸을 숨겼던 선반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감기 기운에 이제는 정신이 몽롱해서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었다.
“서둘러 떠납시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이곳이 아니었잖아요.”
바츠는 캣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놈들의 뒤를 쫓는 것은 둘째 치고, 헤러티커의 목표물이 되었다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물론이고 그 안에 있던 야인들 전부가 살해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바츠로서는 어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혹시 살아있을지 모를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건물로 들어가는 것은 자살행위일 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캣은 일리트시의 주민이 아니었다. 아르크와 관계가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레이븐과 캣은 계획에 없었다. 단지 지나는 방향이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샤오밍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가 우물쭈물하며 바츠에게 말했다.
“집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도와주고 싶습니다.”
바츠는 레이븐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는 레이븐에게 강한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바츠는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고, 그것만으로는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나서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 컸다.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샤오밍도 그것을 느꼈는지, 레이븐을 대변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압니다. 제가 원래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요. 전 일리트시로 돌아가면 전과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그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소리를 지르겠죠. 하지만,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캣을 찾아봐 주십시오.”
바츠는 물었다.
“왜 자꾸 저들을 신경 쓰는 건가요? 전부터 계속 저들을 신경 써왔죠? 왜요? 지금 그들이 들어간 건물로 가면 우리도 매우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집사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우리는 꼭 이곳에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물론 이곳을 가로질러 볼 수 있는 강을 따라 가면, 보다 쉽게 갈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으로 오지 않고 계속 북쪽으로 가도 상관은 없었죠. 그냥...그냥 돕고 싶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들이 싫습니다.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자신들을 지킬 힘도 없죠. 뭔가 악착같은 투지조차 없습니다. 정말 한심한 모습이죠. 그저 둘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꼭 이들이 무사히 필요한 물건을 얻어서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왜요? 왜입니까?”
샤오밍이 바츠가 빤히 바라보며 다시 묻자, 시선을 옮겨 바츠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꼭...우리 같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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