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02화 (102/268)

< --   8. 전주곡   -- >         * 102화 *

바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감기 기운이 이제는 눈두덩까지 욱신거리도록 만들고 있었다. 주먹으로 얻어맞고 난 것처럼 쿡쿡 쑤셨다. 괜히 오래전 버니에투와에게 얻어맞았던 일이 생각날 정도였다. 그 사이 샤오밍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최소한 이들은 달아날 용기라도 있었죠. 우린 달아날 용기조차 없지 않습니까...”

바츠는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기회가 온다면 달아날 건가요?”

“저 말입니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요.”

“내가 앞에 있어서 인가요?”

바츠는 눈을 뜨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올려 진 손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바츠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바츠의 손이 허리춤에 있는 검을 오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눈빛에는 긴장감이 묻어났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아니요. 집사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와 집사님 사이에 특별한 유대감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건 제 착각일지도 모르니까요. 그 유대감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유는 변함이 없었을 겁니다. 그건 사실이니까요. 물론 제가 아르크를 떠날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남은 이유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게 뭔가요? 아르크를 지켜낸 사령관인가요? 아니면 과거를 재건하기 위해 복원되어가는 기술들인가요?”

샤오밍이 바로 대답하지 않고, 바츠를 잠시 바라보았다. 질문을 이해하기 힘든지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가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줘서 대답했다.

“그건 바로 가족입니다.”

바츠는 지난번 말레나가 봉변을 당했을 때, 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그는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됐다. 생각해보면 그의 대답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만약 달아난다면 그것은 아르크를 향한 도망이지 다른 곳으로의 탈주일 리가 없었다. 아르크에 헌신하는 이유가 결국에는 가족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본질적인 이유는 인류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내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개개인에게 그것은 고작해야 부속일 뿐이었다. 나와 가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바츠는 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상에서의 처절한 삶을 자처하는 이유가 이제야 떠올랐다는 사실에 허무함을 느꼈다. 정작 본인조차도 이곳에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는데도, 그것을 자꾸만 잊게 되는 자신이 한심했다. 아르크에서 하루하루를 자신의 걱정으로 초조하게 보내고 있을 케일리에게 미안했다.

바츠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에 겨워서인지 절로 웃음이 났다. 입술사이로 실실 빠져나가는 맥없는 웃음기를 붙들기 힘들었다. 바츠는 그런 자신을 따라 고개를 옮기는 샤오밍을 내려다보았다.

“처음이 아니죠?”

바츠의 물음에 그가 놀랐는지, 되묻는 그의 고개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네?”

“말레나를 잊었나요?”

“그럴 리가요! 잊지 않았습니다. 전 최선을 다해 멘디를 돌보고 있습니다.”

샤오밍이 무릎을 세우며 발끈했다. 바츠는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죠. 지금 이 모습이 당신의 진짜 모습이잖아요. 주민들에게 냉정하게 굴지만 그건 당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때 울면서 그녀의 딸을 찾아달라고 한 것이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내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고요.”

“집사님...”

“그때 내가 말했죠?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당신은 그저 당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가족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 아니었나요?”

그가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집사라는 단어만 반복해서 내뱉었다. 바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이렇게, 지금처럼 이렇게 가끔씩 진짜 자신을 붙잡기만 하세요. 그럼 영원히 당신을 잃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츠는 말끝에 헌터들처럼 이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그들은 샤오밍과 같은 처지였지만 달랐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경계가 둘 사이에 놓여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거론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대신 그 옆에서 어느새 울음을 그치고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이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붉게 충혈 된 눈을 하고 누워있었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캣이 무슨 의미이지?

“네?”

그가 갑작스런 물음에 놀랐는지, 온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는 바츠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눈치를 살피며 몸을 일으키고 대답했다.

“캣은 제 동생입니다. 그리고 제게 삶의 목적이 되어준 유일한 여자입니다. 그곳을 떠나온 이유도 그녀 때문이니까요.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준 유일한 여자였습니다.”

그는 생각보다 길게 대답했다. 바츠가 다시 자리에 앉을까봐 초조한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애원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바츠가 원하던 바였다. 바츠는 그의 긴 이야기를 전부 들어주었다.

그가 살던 카를로프카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없었다. 오로지 촌장의 지시와 복종만이 있었다. 먹고, 자고 하는 기본적인 것까지 모두 허락이 필요한 이유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 촌장이 레이븐의 아버지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레이븐은 지배의 꼭짓점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떠나온 것은 순전히 캣 때문이었다.

카를로프카는 주민 모두가 가족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가족들이었다. 남자는 레이븐과 촌장이 다였고, 나머지는 모두 여자였다. 그들은 레이븐의 어머니이자 동생이었고, 누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레이븐은 촌장이 죽게 되면 그 뒤를 이어 마을의 촌장이 될 예정이었다. 물론 촌장의 부인들은 그리고 레이븐의 엄마이자 동생이자 누나들은 모두 레이븐의 부인이 된다. 레이븐은 자신과 같은 아들을 하나만 두고, 딸은 또 다른 부인으로 삼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그토록 겁내는 커다란 총을 들고 말이다. 그것에 불만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그곳만의 삶에 방식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 그 특별한 힘을 가진 단어가 그곳에서는 매우 잔인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도 정작 자신들은 모른 채 말이다.

레이븐은 그런 곳에서 종종 이제는 연로한 아버지 즉, 촌장의 지시로 어머니 그러니까 누나이자 동생 그리고 촌장의 부인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것은 일종의 세속적 인계과정으로,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촌장을 대신해서 여자들 그리고 가족들에게 이제 새로운 촌장이 레이븐이라는 것을 알리는 행위였다. 가끔은 촌장을 대신해서 복종을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식수를 길러 근처 동굴에 다녀온 캣이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왔다. 그녀는 그 종이를 몰래 숨겨서 레이븐에게만 보여주었다. 둘은 전부터 서로에게 자주 의지해 왔던 사이였다. 꼭 한 사람인 것처럼 모든 생각이 일치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레이븐이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주었고, 레이븐은 그녀가 눈물을 훔칠 때마다 위로해주었다. 그녀가 레이븐에게만 종이를 보여준 이유였다. 레이븐은 그녀가 건넨 종이를 들여다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종이에는 남녀 한 쌍이 그려져 있었다. 여자는 간이침대 같은 곳에 속옷만 입고 누워있었고, 남자는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그 옆에 앉아서, 누운 여자의 복부에 하얀색 크림을 발라주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고, 여자는 그런 남자를 믿고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하단의 중앙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Mini's First Time’

레이븐은 그 종이를 감추고 매일 매일을 고민으로 보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그림 속의 남녀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치 남자가 여자를 위해 봉사를 하고 있는 듯 했고, 여자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듯 받아드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둘의 얼굴에 걸려있는 자연스러운 미소 덕분이었다. 그림은 마치 촌장과 마을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레이븐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세상은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았다. 자신들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가끔 지나는 떠돌이들과 이따금씩 습격해오는 강도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르크라는 유토피아도 엄연히 존재하지 않은가? 더 멀리 그리고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마을을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레이븐은 이미 그 전에 촌장의 지시를 거역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관계를 거부하는 누나이자 엄마 중 한 사람이 눈앞에서 총에 맞아 살해당했고, 용변을 자신의 눈앞에서 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생이자 엄마 중 한 사람이 심한 매질로 사망했다. 달아나는 것이 잘못될 경우, 죽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겁났다. 만약 그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제법 좋은 방독면과 옷을 걸치고 있었다. 동쪽으로 정화의식을 떠났다가 다시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은 3일을 머물고 싶다고 했다. 촌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가족들에게는 인색했지만 방문객들에게는 항상 관대했다. 특히 방문객이 사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들이 가진 씨를 얻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이 촌장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전 방문객들은 항상 그 요구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자신들의 입맛대로 여자를 골라 안을 수 있는 것을 거절할 사내는 세상에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그들은 촌장의 친절한 호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들은 촌장의 어떤 달콤한 말에도 구슬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이 선택한 한 여자와만 관계를 갖거나 영원히 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오히려 촌장의 요구는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촌장을 변하게 만들기 위해 설교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심지어 촌장에게 따끔한 벌을 내려야 하지만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한 보답으로 벌은 내리지 않겠다며 으름장까지 늘어놓았다. 나중에는 뒤늦게 마을의 정체를 알고 나서 촌장을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머무는 내내 촌장의 면전에 대고 쓴 소리를 해댔고, 주민들에게는 변화를 수용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비참했다. 마지막 날, 그들이 잠이 든 사이 촌장과 부인들은 그들을 목 졸라 살해했다. 어느 하나 그들을 비호해준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 대한 촌장의 악의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레이븐은 다음날 그들이 입고 있던 옷과 방독면을 챙겨서 캣과 함께 달아났다.

“캣이 계속 고통 받는 것도 싫고, 그곳에서 불안한 삶을 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잘못된 것이 확실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레이븐이 말을 끊고는 품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자신도 그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전에 보여주었던 종이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그림이 그려있는 종이였다. 종이는 그가 말한 그대로였다.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으나, 나름 값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림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밑에 쓰여 있는 글씨를 읽을 줄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오로지 종이에 그려진 남녀에게만 집중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몸을 돌리더니, 팔을 들어 올려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오래되어서 많이 흐릿했지만 十 모양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바츠가 그 모양을 발견한 것을 확인하고는, 품안에서 또 한 번 물건을 끄집어냈다. 이번에는 목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액사서리였다. 옆구리에 그려진 모양과 똑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이걸 십자가라고 불렀어요. 자신들의 도시로 이걸 가지고 온다면 언제든지 환영받을 것이라고 했죠.”

바츠는 그에게 말했다.

“그럼 말해 봐. 당신 입으로 내게 직접 말해. 내게 직접 부탁하라고.”

그가 머뭇거리며 샤오밍과 저쪽에 있는 미할리오의 눈치를 살피더니,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캐, 캣을! 캣을 구해주십시오, 집사님! 부탁드립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화답했다.

“당신이 그랬지, 신이 허락한 엑소시스트가 되고 싶다고. 내가 그 신이다."

바츠는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뒤따라오려는 샤오밍은 제지했다. 그에게는 이곳에 남아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미할리오와 레이븐이 무사할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걸음이 쉽지만은 않았다. 전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억센 빗물이 야속했다.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헤러티커에 대한 공포인지, 낯선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냥 감기 기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바츠는 터덜터덜 내딛어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서 샤오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님! 집사님, 혹시...혹시! 조금 전 제게 달아날 것이냐고 물었던 것 말입니다! 혹시 그게 아르크 이야기가 아닌 겁니까? 제 이야기를 하신 겁니까? 그거라면 걱정 마십시오! 전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겁니다!”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츠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대답했다.

“꼭 우리 같다고 말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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