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03화 (103/268)

< --   8. 전주곡   -- >         * 103화 *

바츠는 빗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어느새 잦아든 빗줄기가 지금은 뿌연 얼음안개처럼 알알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꽁무니를 어디선가 불어오는 난폭한 바람이 쫓았다. 작은 안개비가 좌로 우로 제멋대로 춤을 췄다. 개중에는 지면으로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하늘 높이 솟구쳐, 다시 떠오르기까지 했다. 소란도 이런 소란이 없었다. 죽 늘어선 구멍 난 건물들과 무너져 내린 잔해 사이사이를 달리며 눈앞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츠는 그 말도 안 되는 혼란을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크고 작은 웅덩이에 고인 물들이, 발에 참방참방 감겨왔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 허공을 내딛는 것 같았다.

‘난 내 비밀이 놀라움에서 그치지 않고 혼란을 야기하길 바라거든요.’

바츠의 머릿속에 장로 로리나의 목소리가 홀연히 스치고 지났다. 피로가 끼얹어진 무기력한 몸뚱이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 차례 휘청거렸다. 울퉁불퉁한 바닥이 발목을 잡아끈다고 느껴졌다. 화들짝 놀란 바츠는 그 목소리를 깊게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균형을 잃은 몸에 의해서 머리가 절로 털어졌다. 가뜩이나 두통으로 괴로웠던 터라 오히려 잘 된 일일지도 몰랐다. 바츠는 애써 다시 떠올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제 몸을 가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그 사이 야인들의 소굴인 플라자 건물은 제법 가까워졌다. 흩뿌려지던 빗방울이 또 한 번 굵게 변했다. 억센 물줄기가 사람의 발소리를 닮아있었다. 수십 명의 발자국소리가 뭉뚱그려 들려왔다. 바츠는 건물을 마주보고 서기 직전, 뒷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주변을 살폈지만, 물 가루가 잔뜩 피어오를 정도로 잔뜩 쏟아지는 호우 속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지나치게 노곤한 몸 때문에 신경이 잔뜩 애민해진 모양이었다. 굵어진 빗줄기의 짓궂은 장난 같았다.

바츠는 건물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본래 2m가 넘는 크기의 단철 미닫이문이 쌍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입구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구겨져 안쪽으로 활짝 열려있었고, 그마저도 한 쪽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놈이 온 몸으로 비집고 들어간 흔적이었다. 놈에게는 저 커다란 문도 비좁은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기본적인 예절이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바츠는 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었다. 몸이 고단하니 틈만 나면 실없는 웃음이 반복됐다.

바츠는 겨우 웃음을 추스르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탁 트인 공간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다면 원형인 공간에 각종 잔해들로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한가롭게 보일 만큼 넓었다.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기존의 흔적을 쫓아보면, 애초에도 인테리어가 특별히 복잡하거나 난립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정중앙에 누군가의 시신이 놓여있었다. 그 주위만 인위적으로 정리된 흔적이 있었다. 시신은 팔과 다리에 각각 철사가 감긴 채, 양옆으로 바짝 당겨져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위로 내리는 빗물이 처량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아득할 만큼 높은 건물의 천장 중앙이 하늘까지 뚫려 있었다. 유리창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틀만 남아있었다. 그 사이로 고스란히 빗물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바닥은 물로 흥건했다. 시신의 혈흔은 보이지 않았다. 사망한지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되어 있었다. 냄새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바츠는 고개를 돌려가며 건물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중앙 공간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통로가 뒤쪽으로 이어져 있었고, 위로는 건물의 벽을 따라 난간이 층층이 지어져 있었다. 통로들은 각기 독립된 것인지,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꽤나 길고 깊어보였다. 위로는 구석으로 보이는 크고 좁은 계단들을 통해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 안이 들여다보이는 엘리베이터로 추정되는 장치가 있었으나,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바츠는 고개를 들고 각층의 난간들을 살피며 귀를 기울였다. 야인들의 기척을 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때, 건물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위에서부터 들려온 것만은 확실했다.

바츠는 가까운 계단을 향해 달렸다. 바닥에 고인 빗물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기함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다행히도 못마땅한 눈초리로 뒤를 쫓지는 않았다. 그냥 고개를 내두르며 혀를 차고 싶었던 것인지, 굳이 바츠를 향해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바츠가 미안함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무 놀라서 그럴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바츠는 이상한 기분에 계단을 앞두고 고개를 들어, 반대쪽 2층 난간 한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붉은 눈을 번뜩이는 괴물이 난간에 기대,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츠는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그곳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처음에는 감기로 인한 몽롱한 기운이 헛것을 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비정상적으로 큰 기괴한 양팔을 난간에 올리고 내려다보는 모습이 너무도 인간과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쳐다보아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헤러티커, 놈이 빗소리를 피해 용케 걸음소리를 감지해낸 것이었다.

바츠는 가까운 벽 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당장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피어났다. 그 충동을 이겨내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 사이 괴물은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1층으로 내려섰다. 놈의 육중한 무게가 주변에 지진을 일으켰다. 그 진동이 반대쪽에 서 있던 바츠에게까지 전달이 될 정도였다. 놈은 그 진동이 가시기도 전에 그대로 중앙을 가로질러 바츠를 향해 달려왔다. 중앙에 놓여있던 시신이 놈의 발에 채여 쓰레기처럼 나뒹굴었다. 허리가 뜯기며 완전히 반 토막이 났다. 바츠는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벽을 따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멀리 끝에 보이는 통로를 향해서 달릴 참이었다. 하지만 중앙을 지난 놈은 바츠가 달리는 속도에 맞춰, 방향을 조정하며 가까워졌다. 그로인해 둘의 사이가 급격히 좁혀졌다. 바츠는 순간적으로 오른쪽 벽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황급히 몸을 돌려세워 확인했다. 그러자 좁은 통로가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바츠는 그 통로를 따라 안으로 끝까지 달렸다. 통로는 정확히 기역자로 꺾여 왼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스무 명이 들어서기에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한쪽에는 세면대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고, 맞은편으로는 칸칸이 나눠진 공간들이 줄을 이어있었다. 둘 다 기존의 모습을 많이 잃었을 만큼 부식되거나 망가져 있었다.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곳이 완전히 막다른 곳이라는 것이었다. 달아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 사이 놈의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츠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칸막이가 세워진 공간 중 가장 멀쩡한 곳을 찾았다. 중간쯤에 문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이 있었다. 바츠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매끄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변기가 있었다. 아르크에서 사용했던 금속 변기와 같은 모양이었다. 아르크의 변기만큼 내구성이 높지 않은지, 반으로 쪼개진 채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그보다도 그 바로 옆에,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고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이 갔다. 그는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바츠가 들어오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 눈에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에 각진 얼굴, 그는 ‘그’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녀는 바츠를 보자마자 양손을 앞으로 해서 싹싹 빌며 말했다. 놀란 눈에 자비를 바라는 간절함이 절절 묻어났다.

“살려주세요! 제발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 전 그냥 시켜서 했을 뿐이에요!”

바츠는 그녀의 처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조용히 한쪽 손 검지를 입가에 가져댔다. 그러자 그녀가 동그랗게 뜬 눈을 깜짝이지도 않고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서서히 멈춰 세웠다. 동시에 그녀의 혀도 멈췄다. 움직이는 건 눈 대신 꿈뻑거리는 그녀의 입술과 숨을 내쉬지 못하는지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목과 이마의 핏대뿐이었다. 바츠는 천천히 그녀의 가슴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너무 특별해서 눈길을 끌었다.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을 정도로 독특했다. 그녀가 멈춰선 손을 각각 양옆으로 치우고 가슴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바츠의 손길이 가까워지자 그녀의 아래턱이 부르르 떨렸다. 단단히 겁에 질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표정이 매우 기묘하게 변했다. 환희와 공포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활짝 웃는 눈 꼬리로, 짜낸 듯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바츠는 그녀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렇지?”

바츠는 그녀의 가슴 위에 있던, 그녀의 목걸이를 손에 올렸다.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송곳니를 철사로 엮어서 만든 목걸이였다. 그 수가 적어도 20개 이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환희는 없어지고 잔뜩 질린 공포만 남았다. 그녀가 제대로 벌어지지도 않은 입으로 말했다.

“살려주세요...”

발음이 완전히 뭉개져 자음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바츠는 그녀의 목걸이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은폐 콘솔을 활성화 시키며 대답했다.

“그건 내게 해야 할 말이 아닐 거야.”

바츠는 뒷걸음으로 그 안에서 빠져나온 뒤, 헤러티커가 도착하기 전에 반대쪽 구석으로 가서 온 몸을 망토로 뒤집어썼다. 그러자 그녀가 안에서 네 발로 기어 나오며 애원하는 목소리로 바츠를 찾았다. 바츠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헌터님? 헌터님?...!”

그녀가 안에서 나오자, 때마침 헤러티커가 코너를 돌아 들어오며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엎드린 상태 그대로 고개만 돌려 놈을 마주보았다. 놈은 한 걸음씩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둘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녀의 상태가 눈에 띄게 변해갔다. 처음 놈을 발견했을 때는 돌처럼 굳어졌다. 그대로 숨을 거둔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놈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어깨와 무릎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놈이 완전히 가까이 섰을 때에는 온 몸에 경련이 인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특정 부위에만 힘이 잔뜩 들어간 듯 보였다. 그녀의 한쪽 발이 자꾸만 꿈틀거리며 바닥에 깨진 타일을 차댔고, 그녀의 낡은 치마 사이로는 노란 물이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 놈의 붉은 눈은 다른 것보다도 그녀가 반복적으로 깨진 타일을 건들며 내는 소리에 반응했다. 그녀의 발목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녀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정없이 자신의 손톱을 그녀의 발목으로 쑤셔 박았다. 그러자 그녀의 발목은 칼날에 베인 것처럼 깨끗이 잘려 나가며 붉은 피를 쏟아냈고, 그녀는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헐떡대는 비명을 내뱉으며, 자신의 발목에서 뜯겨져 나오듯 후다닥 움직여 한쪽 벽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순식간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