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04화 (104/268)

< --   8. 전주곡   -- >         * 104화 *

그녀의 요구는 처량하다 못해 애처로웠다. 언어가 완전히 다른, 어쩌면 언어가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놈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대였다. 그녀는 울음소리가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하지만 놈에게는 그런 그녀의 간절함을 이해할 만한 온화한 자비가 존재하지 않았다. 놈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벽에 등을 대고 앉은 초라한 그녀의 복부에 자신의 손을 거칠게 꽂아 넣을 뿐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한차례 크게 요동쳤다. 촉촉이 젖은 눈이 헤러티커의 붉은 눈처럼 금세 빨갛게 변했고,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로는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역류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혈액이 목을 답답하게 만들자, 몇 번이고 기침을 하며 해갈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입안에 고인 피만 주변에 뱉어지고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입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급격히 늘어난 그녀의 혈액이 기침을 집어삼켰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혹시 모를 마지막 소망을 가지고 놈을 끝까지 응시했다. 놈의 고집을 이겨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놈의 고집은 철저한 계산이 아닌 충실한 본능이었다. 놈의 남은 손이 빠르게 휘둘리며 그녀의 목을 반듯하게 잘라냈다. 몸에서 뛰쳐나온 그녀의 머리가 지금이라도 놈에게서 달아나려는 듯, 바닥을 빠르게 굴러 바츠의 발끝으로 다가왔다. 치켜 올라간 충혈 된 두 눈과 크고 붉게 변한 입 밖으로 꺼내진 축 늘어진 혀가, 그녀가 죽음으로 가져간 고통이 얼마나 큰 지 알려주었다. 그 사이 놈은 목이 잘려나가 훤히 들어난, 그녀의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다량의 붉은 피를 입을 대고 핥아먹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갈증을 앓고 있었는지, 길고 검은 혀가 쫓기듯 바쁘게 움직였다.

바츠는 그 틈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놈은 머지않아 갈증을 해소하고 나서, 그녀의 내장으로 굶주림을 채울 것이 분명했다. 놈을 떼어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칸막이를 등지고 선, 놈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놈과 칸막이 사이의 공간으로 빠져나갈 셈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놈이 갈증이 해소되어가자 신이 나는지, 자꾸만 꿈틀대며 자세를 바꿔가는 통에 공간이 줄었다 늘었다를 반복했다. 혹시라도 부딪히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슈트 안으로 가득 찬 열기와 땀 냄새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놈이 감지해내고는 갑자기 홱 돌아설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발밑에 깨진 타일들은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한 걸음씩 신중하게 내딛었다. 중간 중간 망토를 바짝 여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리를 빠져나온 것으로도 모자라, 통로를 지나 중앙 홀로 다시 들어설 때까지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를 때에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놈을 확인했다. 속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나 가능했다.

바츠는 2층에 도착해서 놈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콘솔을 해제했다. 특별히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놈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놈을 따돌렸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천장을 통해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고요해서 빗물이 깨지는 소리만 내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까 들려왔던 비명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바츠는 서둘러 고개를 밑으로 돌려, 습기로 젖은 바닥에 먼지 얼룩을 살폈다. 내린 비로 인해서 평소보다 더 진하게 남겨졌을 발자국을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온전한 발자국이 별로 없었다. 남아있는 것도 대부분 오래되어서 또렷하지가 않았다. 이쪽 말고도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이 더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당장 눈으로 보이는 것만 해도 반대쪽에 두 군데나 있었다. 뒤쪽으로 뻗어있는 통로까지 생각하면 위로 오를 수 있는 길은 꽤나 다양해 보였다. 야인들이 이쪽을 통해 올라갔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꽤나 골치 아프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반대쪽으로 가기 위해 난간을 따라 이동하던 중, 최근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반대쪽에서부터 난간을 따라 이쪽 방향으로 이동한 발자국이었는데, 도중에 미끄러졌는지 마지막 발자국이 난간 바깥쪽을 향해 길게 밀려나 있었다.

바츠는 발자국이 밀려난 반대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크의 상업지구처럼 나란히 벽을 따라 늘어선 방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 방들 중 한 곳으로 발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방들은 아르크의 상업지구와 꼭 닮아있었다. 거의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난간을 따라 죽 늘어선 모양새가 영락없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내부의 규모가 더 크고, 사람들이 지나다녔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난간의 폭이 상업지구의 길보다 두 배 가량 넓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작 흥미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발자국이 남겨진 방 바로 앞이, 공교롭게도 조금 전 1층에서 발견했던 헤러티커가 머물고 있었던 자리라는 사실이었다. 놈의 발자국이 먼저 발견한 발자국을 따라 저쪽에서부터 쫓아온 흔적이 있었다.

바츠는 정면으로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물건을 올려놓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속진열대 여럿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벽에는 금속으로 된 선반이 가득 설치되어 있었다. 그 외는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텅 빈 내부가 썰렁했다. 바츠는 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 낡은 헝겊이 걸린, 문으로 보이는 통로 앞까지 이어져 있었다. 바츠는 헝겊 밑으로 덜덜 떨고 있는 사람의 다리를 볼 수 있었다. 낡고 더러운 옷이 그가 야인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츠는 헝겊을 옆으로 걷어냈다. 그러자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바츠를 향해 고함과 함께 달려들며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턱을 덮을 정도로 많은 수염을 지저분하게 기르고 있는 사내였다. 더불어 오랫동안 씻지 못해 얼굴에 생겨난 검은 얼룩들과 크고 눌린 코는 그의 인상을 험상궂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바츠는 몸을 왼쪽으로 돌려 빼내며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는 그가 미처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오른쪽 광대에 정확히 주먹을 얻어맞은 그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로 옆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손에 들고 있던 쇠몽둥이는 이미 벌써 저쪽을 향해 던져졌고, 그의 빈손은 얻어맞은 상처를 부여잡느라 바빴다. 그 사이 그는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주저앉았다. 바츠는 앓는 소리를 내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상체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자 그가 뒤늦게 바츠의 얼굴을 발견하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경직되더니,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얻어맞은 상처만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아까 데려간 여자는 어디에 있지?”

그가 얻어맞은 충격 때문인지, 바츠를 마주보고 있는 것 때문인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놀란 목소리로 의아함이 담긴 외마디 감탄사만 내뱉었다.

“아까 한 여자를 데리고 갔잖아. 헤러티커에게 쫓기기 직전에 말이야. 그 여자가 어디에 있느냐고.”

“아, 네...네? 아...네...그...”

바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가 같은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면, 네 혀를 잘라버리겠어. 어차피 써먹지도 못할 거, 필요하지 않잖아? 자, 대답해봐.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바츠가 침착한 목소리로 엄포를 늘어놓자, 그가 얻어맞은 상처가 더 이상 아프지 않은지, 손을 내리고 반듯하게 앉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꾸만 떨리는 입술 때문에 쉽지 않아보였지만, 대답하기 위해 애를 썼다.

“타오르는 주먹, 타오르는 주먹이 데리고 갔습니다. 맞아요. 타오르는 주먹이 데려갔습니다.”

“제대로 말해. 타오르는 주먹이 누구지? 어디로 데려갔다는 거야?”

그가 한쪽 손으로 천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중 덩치가 제일 큰 놈입니다. 그 놈 이름이 타오르는 주먹입니다. 4, 4층. 4층 맥도날드로 갔을 겁니다. 나가서 왼쪽으로 보이는 계단을 따라올라 가면 됩니다. 1층부터 5층까지 이어진 투명한 관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이용하면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맥도날드?”

“네. 맥도날드요. 맥도날드가 타오르는 주먹의 집이거든요.”

“그게 뭐지?”

“저도 모릅니다. 그냥 그 방 이름이 맥도날드입니다. 우린 그렇게 불러요. 입구에 노란색으로 M이 걸려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바츠는 몸을 세우고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츠를 따라 올라오며, 그의 턱이 절로 들리도록 만들었다. 바츠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그가 눈을 질끈 감는다면 완벽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뒤통수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저를 살려주시는 겁니까?”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대답했다.

“헌터는 야인들을 사냥하지 않아. 너희들에게는 목숨이 없다고 생각하거든. 무슨 소리인지 알아?”

그가 전혀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츠는 말을 이었다.

“그래...혹시 각진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한 여자를 알아?”

“네? 네, 더러운 고양이(filthy pussy)입니다. 더러운 고양이가 맞을 거예요. 제 여자죠.”

“잘 됐군. 여기서 내려다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1층 통로 안쪽에서 그녀가 당신을 찾고 있어.”

바츠는 말을 마치고 방을 빠져나와, 그가 말해준대로 곧장 왼쪽으로 보이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었는데도 갑자기 긴 한숨이 쏟아졌다. 슈트 안으로 가득 찬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기운이 자꾸만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체력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힘들었다. 방독면과 슈트가 너무 갑갑했다. 그 사이 뒤쪽으로 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차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져서, 눈으로 보지 않고는 정확한 방향을 알아내는 것이 조금 어려웠지만, 거리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대쪽으로 계속 멀어지고 있었다.

바츠는 계단을 오르며, 난간 너머로 막 1층으로 내려서는 조금 전 그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달려가며 바츠가 말했던 그 통로를 향했다. 그리고 이내 그 안으로 사라졌고, 바츠가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를 때에는 그의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끔찍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악에 바친 소리였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놈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바츠는 그 소음 속에서, 3층에 늘어선 방 중 한 곳에서 밖을 살피던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앞선 두 사람처럼 바츠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굳어진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향해 한쪽 손을 귀찮은 기색을 담아 내둘렀다. 그러자 그녀가 뻣뻣한 목을 부자연스럽게 끄덕이더니 얼른 안으로 사라졌다. 바츠는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바로 정면으로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크기의 M자가 걸린 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한 뒤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1층에서부터 들려오던 비명소리와 놈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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