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전주곡 -- > * 105화 *
“뭐, 뭐야!”
때마침 안에서 나오던 두 사내가 바츠를 발견하며 화들짝 놀랐다. 각각 작은 칼과 커다란 파이프 렌치를 들고 있었는데, 얼굴은 바츠를 발견하기 전부터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몸을 낮춘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단 쪽에 가깝게 다가선 걸 보아하니, 조금 전 밑에서부터 들려온 소란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두 사내 뒤로 문 앞에 선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깡마른 체구에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골격만 남아있는 문을 애써 지키려는 모습이었다. 틀만 남아있는 왼쪽 벽면을 작은 테이블들을 얼기설기 엮어 틀어막은 것처럼, 장애물로 틀어막는 것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일정도로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안쓰러워 보이는 사내였다. 그리고 그 뒤로 얼핏 서넛의 사내가 놀란 외마디 감탄사를 듣고는, 밖을 살피기 위해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외에도 안에서 작은 소리로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렸는데, 눈으로 확인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여자 목소리도 있었다.
“헤러티커가 들어왔다면서?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르지! 대장이 그렇게 말했는데! 대장이랑 같이 나갔던 놈들도 그랬잖아!”
바츠를 가장 가까이에서 제일 먼저 발견한 두 사내가 옮겨오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뭔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지,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 사이 둘은 경쟁적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서로를 원망하느라, 자신들이 어느 쪽으로 걷고 있는지도 모르는 듯 보였다. 바츠는 걸음을 멈추고 그 둘을 향해 말했다.
“타오르는 주먹이 누구지?”
“네?”
바츠의 물음에 둘이 동시에 뒷걸음질을 멈추며 되물었다. 최대한 순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자신들의 눈동자가 맑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눈치였다. 바츠는 매우 피로해진 몸 때문인지, 절로 짜증이 밀려들었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감정을 노련하게 억누르며 다시 말했다.
“난 지금 네 놈들과 오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없어. 그러니 내 목소리에 집중해. 내가 두 번씩 묻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다시 묻겠어, 마지막이야. 타오르는 주먹이 누구지?”
그 둘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연결고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바츠의 물음에 이번에도 동시에, 마른 침을 삼키고는 각각 다른 팔을 뒤쪽 방을 향해 쭉 뻗었다. 바츠는 그들의 눈을 번갈아가며 한 번씩 바라본 후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둘 사이를 지나, 문을 지키고 선 마른 사내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앞선 둘과 다르게 바츠가 가까워졌는데도, 겁에 질려 떨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뼈가 앙상하게 보이는 얇은 팔로, 들고 있던 쇠몽둥이를 용케 휘둘렀다. 악에 바친 기합소리를 통해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내고 있었다.
바츠는 순간적으로 검을 뽑아 휘두르려다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망설였다. 허공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거미줄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몸이 그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한 차례 크게 덜컹였다. 재빠르게 몸을 옆으로 빼내지 않았다면 사내의 쇠몽둥이에 이마를 그대로 얻어맞을 뻔했다. 사내는 자신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며 빗나갔지만,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는 바츠의 움직임을 보며 자신감을 얻은 듯 보였다. 바츠를 향해 돌아서는 모습이 한껏 기가 올라있었다. 머뭇거리지 않고, 또 한 번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바츠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그리고는 사내가 쇠몽둥이를 휘두르기 직전, 쓴웃음을 삼키며 빠르게 몸을 회전시켜 그의 복부를 날렵하게 걷어찼다. 바츠의 발바닥이 사내의 복부에 정확하게 꽂혔다. 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한 차례 떠올랐고, 바츠가 발을 거두는 사이에 위에서 던져진 물에 젖은 담요처럼 바닥으로 묵직하게 추락했다. 바닥에 엎어진 그의 모습이 아르크의 실습장에서 보았던 등에 칼을 맞은 프레이 같았다. 잔뜩 움츠린 채, 기도가 막힌 것처럼 끓는 신음소리를 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걷어차기 위해 다가갔다. 그 와중에도 그가 손에 든 쇠몽둥이를 내려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섰다가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냥 가볍게 고개를 가로젓고는 몸을 돌려 세웠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부분 위협이 될 만한 무기들을 하나씩 손에 들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여자는 고작 둘 뿐이었다. 하나같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들을 한 번 쓰윽 훑어보고는 가장 덩치가 좋은 사내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들 중 체격이 눈에 띌 만큼 좋았지만, 바츠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마른 사내였다. 기껏해야 아델리나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차라리 왼쪽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는, 갈색 곱슬머리에 둥근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가 키는 작았지만 덩치는 더 좋아보였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중 턱이 있을 정도였다. 바츠는 그에게 물었다.
“네가 타오르는 주먹인가?”
사내는 바츠가 묻자마자 무기를 들지 않은 손을 재빨리 움직여 안쪽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끝에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금속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문에 문고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낡아서 부서진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문으로 보였다. 상단 중앙에 원형의 불투명 유리가 눈에 띌 뿐이었다.
바츠는 그 사내를 지나서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동하는 동안 중간 중간 그들을 향한 경계의 눈초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중 턱을 가진 여자가 주변 사내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일 때에는 일부로 오랫동안 지켜보며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뒤늦게 바츠의 시선을 눈치 채고,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시치미를 땠다. 절로 코웃음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애써 참으며 문 앞에 섰다. 문은 앞뒤 없이 밀어 열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바츠는 그 앞에서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남녀의 불편한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의 신음소리는 숨이 차지만 쾌감에 젖은 목소리였고, 여자의 신음소리는 고통 속에서 이를 물고 내뱉어지는 목소리였다. 바츠는 남자의 신음소리는 몰라도, 여자의 신음소리는 레나타와 관계를 가질 때와 유사하다고 느꼈다. 그녀의 목소리가 흥에 겨운 교성이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둘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지금은 완전히 녹슬어 붉은 황색이었지만, 기존에는 매끄러운 은빛을 띄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계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이었다. 조금 전 지나쳐 온 방에 비해서는 훨씬 좁은 곳이었다. 그 중앙에 커다란 기계가 떡하니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벽을 따라서도 죽 늘어서 있어서,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통로가 굉장히 좁았다. 한 사람이 지나기게 딱 맞고, 두 사람이 자나기에는 너무 좁았다. 남녀의 신음소리는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바츠는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버니에투와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덩치가 거대한 사내가 자신의 바지는 옆으로 벗어던져두고, 완전히 알몸인 한 여자를 뒤에서부터 안아 겁탈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츠는 그쪽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탓에 상황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더러운 년! 네 년들이 해야 할 일은 애를 낳는 것뿐이다!”
그 사이 사내가 곧 절정에 이르렀는지, 여자의 귀에 대고 상스런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바츠는 사내가 욕설을 전부 끝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채를 잡아 반대로 돌렸다. 그러자 왼쪽 광대가 크게 부어올라 있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랐는지 황당한 눈을 했는데, 부어오른 왼쪽 광대 때문에 잔뜩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뭐야...”
사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을 했다. 앞뒤로 움직이던 몸을 멈춰 세운 것은 물론이고, 그 다음으로 이어질 어떤 말도 내뱉지 못했다. 시퍼런 볼을 꿈틀거리며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뒤로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으며 버티는 바람에 여자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둘을 떨어뜨려 놓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는 머지않아 그녀의 머리채를 놓고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바츠의 손을 양손으로 붙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반대쪽을 향해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가 구부러진 허리 때문인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가더니, 반대쪽 끄트머리에 벽을 따라 놓인 녹슨 기계에 가서 심하게 부딪혔다. 주변이 크게 망가질 만큼 충격이 가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 위에 올려있던 주방 기구들이 바닥을 향해 앞으로 꼬꾸라지는 사내의 등 위로 쏟아지며 요란한 소음을 만들어냈다.
바츠는 그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몸을 돌려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완전히 헝클어진 머리칼과 사내에게 저항하다 얻어맞은 상처로 보이는 부은 얼굴 그리고 그 위로 흘러내린 많은 눈물로 완전히 엉망이었다. 바츠는 그녀의 얼굴이 온전했더라도 낯설었겠지만, 그녀의 낯선 얼굴을 옆에 놓인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옷과 방독면을 통해 알아보았다. 그녀는 레이븐이 찾고 있는 캣이 분명했다. 바츠는 그것들을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신을 만나러 간다지? 신이 뭔지 알아?”
그녀가 대답은 하지 못하고,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으로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바츠는 말했다.
“너를 지켜주고, 네 가족을 지켜주고, 네가 신념을 지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주는 사람이지. 네가 믿어야만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너는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해. 그럴 준비가 되어 있나?”
그녀의 눈물이 한 방울씩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미 눈물로 얼룩진 지저분한 얼굴이 또 한 번 더럽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얼굴은 신경도 쓰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츠는 물었다.
“자, 그럼 말해봐. 네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에게는 지금 내가 신이다.”
그녀가 눈가에 고인 눈물에 분노를 담아내며, 떨리는 손을 겨우 들어 바츠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뒤에서부터 단단히 화가 난 목소리의 기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며 바츠의 목덜미를 따끔거리게 만들었다. 바츠는 등 뒤를 확인도 하지 않고, 몸을 빠르게 회전시켜 돌아서며 옆으로 비켜섰다. 폭풍같이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휘몰아칠 정도로 날래고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동시에 주변 금속 기계들을 스치는 소름끼치는 파열음도 소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바츠는 돌아서자 좁은 통로에 나란히 서게 된, 그녀를 겁탈하던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 얼굴보다 큰 프라이팬을 양손으로 치켜들고는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그의 가슴팍에 가로로 길게 벌어지기 시작하는 상처가 아니었더라면, 온 몸에 마비가 온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만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바츠는 그 상처로 검붉은 선혈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그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너의 신은 어디에 있지?”
사내는 바츠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완전히 경직된 몸으로 바닥에 얼굴로 쓰러졌다. 정확히 맞은편에 서 있던 캣의 가랑이 바로 앞이었다. 동시에 주변 기계들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모두 깨끗이 잘린 단면이 눈에 띄었다. 바츠는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던 그녀를 추슬러 다시 바로 전, 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 앞에는 조금 전 지나쳐온 사람들이 겁에 잔뜩 질린 얼굴을 한 채,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고 바츠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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