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전주곡 -- > * 109화 *
“저 큰 강이 드네프르 강입니다. 원래는 지금에 절반 크기였다는데 모르는 일이죠. 전에 말한 강이 바로 저 강입니다. 쭉 따라가면 발전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 끝자락에 있죠. 쉬지 않고 하루를 꼬박 걸으면 될 겁니다.”
다시 북쪽으로 걷기 시작하려는 찰나, 샤오밍이 레이븐과 캣이 떠나간 반대편을 향해 가리켰다. 이제는 눈으로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들이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 아래로 어렴풋하게 작은 실루엣만 남아있을 때였다. 샤오밍의 손끝이 오른쪽 커다란 강을 향했다. 맞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강이었다. 바다라고 불리는 넓게 고인 물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호수가 특정 장소에 고인 물이라면 바다는 지표면 전체에 이어서 고인 물이었다. 지금 눈앞에 흐르는 강은 파도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뿐, 그와 매우 흡사하다고 느껴졌다. 그래도 이따금씩 요동치는 물결이 뭍으로 부딪히는 걸 보면, 굳이 둘을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전날처럼 폭우가 쏟아진다면, 항상 불어오는 강한 찬바람과 더불어 큰 파도를 만들어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저기 보십시오. 제 말이 맞죠? 얼마 안 남았습니다.”
‘При́п'ять 95km, Іванків 50km.’
샤오밍이 이번에는 도로변 표지판을 가리켰다. 지난번에 보았던 금속판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때 본 것보다는 훨씬 상태가 양호했다. 잦아든 비의 양 때문인지 더 깨끗해 보였다. 음침한 모습이 덜 했다.
바츠는 샤오밍이 위에 적힌 글씨가 프리피야티라고 알려준 덕분에 남은 거리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그때 보았던 표지판에는 프리피야티까지 200km 남았다고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계획했던 것보다 시간을 많이 허비하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다 온 것 같아서 벌써부터 기분이 좋았다. 감기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도움이 되었다. 존과 유에바 집에서의 충분한 휴식 덕분이었다. 여전히 내리고 있는 비가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샤오밍이 그런 바츠를 어깨로 밀치며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바츠는 그의 조심성 없는 행동에 조금 의아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고 몸이 가볍다는 것을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샤오밍이 태도를 확 바꾸며 말했다.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 심통이 났는지, 대단한 불만이 느껴졌다.
“아...제가 그때 집사님 업고 올라가느라 죽을 뻔한 거 아십니까? 어찌나 무겁던지...그런 상황에 쓰러지는 게 말이 되느냐 말입니다. 안에서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지, 비는 내리지, 일어날 기미는 없지...너무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
바츠는 그의 퉁명스런 말투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가 당시의 상황이 매우 서러웠는지, 섭섭한 심경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샤오밍과 일행들이 그때 얼마나 난감했을지, 이제야 생각해볼 수 있었다. 비록 그가 단순한 불평으로 늘어놓고 있었지만, 매우 곤란한 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이들이 느꼈을 당혹스러움이 어마어마했을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었다. 특히 두려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바츠는 지금까지도 그때 이들이 겪었을, 막막한 심경을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미처 그럴 만한 정신이 없었다는 변명을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은 엄연히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지금의 자신까지도 한심하게 생각하며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샤오밍은 물론이고 미할리오에게도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 심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반응을 살피기 위해 슬쩍 눈치를 보는 샤오밍의 시선에 장난기가 묻어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얄팍한 시선으로 애써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미할리오의 눈빛에도 웃음기가 다분했다. 우울했던 기분이 단 번에 떨쳐졌다. 샤오밍이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츠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조금 전, 그에게 밀쳐진 어깨를 그대로 돌려주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러자 그가 목소리를 풀며 말했다. 평소와 똑같은 말투였으나, 그 안에는 진심어린 걱정이 묻어났다.
“다시 못 일어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단 말입니다.”
바츠는 그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 고마웠다. 그가 하는 볼멘소리는 어떤 말이라도 힘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이런 태도가 조금은 낯간지러웠다. 마치 그를 지금 당장 끌어안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너무 민망해서 한쪽 이마와 목덜미가 마구 가려웠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미할리오가 나서지 않았다면, 정말 어색해질 뻔했다. 미할리오가 말했다.
“샤오밍, 차라리 집사님께 사랑한다고 말해. 그 편이 더 빠를 것 같아. 결혼까지는 힘들겠지만, 함께 잠자리를 갖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누가 엎드렸는지는 나중에 따로 알려달라고.”
그의 실없는 농담이 바츠와 샤오밍이 웃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평소라면 그다지 유쾌한 농담이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틀 동안 마른 목으로 비를 만난 것처럼 너무나 반가웠다. 처음에는 느닷없는 그의 엉뚱한 농담에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지만, 서로 몇 번 눈치를 교환하고 나서는 한참을 웃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즐겁게 웃었다. 샤오밍이 그를 향해 자신의 총을 거꾸로 쥐고 위협하는 시늉으로 장난을 쳤을 정도였다. 미할리오는 그 장난을 겁을 집어먹고 달아나려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잦아들 쯤, 샤오밍이 물었다. 아직 흥분을 다 진정시키지 못해서 목소리에 웃음기가 남아있었지만, 나름 진지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아델리나는 누구입니까? 그때 그 헌터 아닙니까? 요 며칠 전에 기지국에서 헤러티커 사냥을 도와준 헌터 말입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바츠는 샤오밍의 물음을 심각하게 받아드렸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리 내어 웃던 기분을 완전히 떨쳐냈을 정도였다.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는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오밍의 의도는 바츠가 생각하는 그런 염려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샤오밍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집사님이 앓는 동안 제일 많이 부른 이름이었거든요. 일리트시 소속 헌터가 아니죠?”
“내가 그랬다고요?”
바츠는 뜻밖의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괜히 가슴도 심하게 뛰기 시작했고, 격렬하게 움직인 것처럼 호흡도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샤오밍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뜬 비열한 눈초리로 말했다.
“여러 사람을 찾긴 했는데, 유독 그 이름에 집착하시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봐요. 저번에는 대답 안 했잖아요. 많이 좋아하죠?”
바츠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 대답을 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가슴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처럼 휑한 기분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대답을 나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탄탄하게 채워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확신! 그 확신이 없었다.
바츠가 입을 닫자, 분위기는 또 다시 어색하게 변해갔다. 뿌옇게 흩날리는 빗물이 분위기를 더 했다. 이리저리 수난을 겪어, 벌써 많이 헤진 후드 끄트머리로 방울져 떨어지는 모습이 슬퍼 보일 정도로 무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미할리오가 이번에도 적절하게 끼어들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집사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샤오밍이 자신의 이름은 불리지 않아서 질투하는 겁니다. 나중에 엉덩이나 한 번 쓰다듬어 주십시오.”
샤오밍이 그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정말 화가 난 사람처럼 반응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무섭게 소리치는 것과는 다르게 눈가에는 웃음기가 묻어있었다. 그 틈에 바츠는 그의 엉덩이를 슬그머니 만졌다. 그러자 샤오밍이 크게 놀라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할 기세였다. 바츠는 미할리오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며 웃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우스웠다. 샤오밍은 그것마저도 자신을 조롱한다고 느꼈는지, 흥분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했다. 뒤늦게 바츠가 진정하라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는 손길도 겁을 먹고 옆으로 내뺐을 정도였다. 물론 바츠와 미할리오는 그 모습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일수록 웃음은 더 길게 이어졌다.
바츠는 그 사이 아델리나를 떠올려보았다. 문득 그녀가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다. 난감해하는 샤오밍을 바라보며 웃던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레이븐과 캣의 흔적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간 지평선 너머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며 달려올 것 같았다. 아니면 어느 틈에 가까이 다가와, 온 몸으로 밀치며 귀찮게 굴지도 몰랐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겠지. 사과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먹고 사과하라고 윽박을 지르면, 내리는 빗물을 전부 두 눈으로 받아 자신의 양 볼을 적시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 어쩌면 마지못해서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투로 퉁명스럽게 사과할지도 모른다. 오히려 억울하고 서운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헛웃음이 절로 터졌다. 그리고 그런 바츠를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숨을 죽이고 장난스런 눈으로 길게 흘겼다. 바츠는 뒤늦게 둘의 시선을 눈치 채고, 서둘러 감정을 추스르며 괜히 딴청을 피며 말했다.
“오늘 따라 비가 너무 차갑네요.”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바츠는 정말 빗물이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확신이 차지하고 있어야 할 가슴 한 켠으로 고스란히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가슴이 시릴 정도였다. 그 비가 그친 건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였다. 멀리 묘한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무렵, 천천히 안개처럼 사라져 갔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놀랍네요. 이렇게 직접 본 것은 처음입니다. 분명 들어본 기억이 있어요. 저 건물의 이름이...노바르카(Novarka)! 맞을 겁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노바르카가 분명해요. 오래 전 저기에 사는 괴물을 봉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건물은 여기서부터 무려 5km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거대하다고 느껴졌다. 독특한 생김새로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꼭 사람의 머리 윗부분을 닮아있었는데, 아치형으로 돔 형태의 건물이었다. 바츠는 물론이고 샤오밍과 미할리오는 그것을 발견하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발걸음만 재촉하며 침묵을 지켰다. 미할리오가 혼잣말을 늘어놓듯 말한 것이,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이었다. 그러자 샤오밍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를 타박하듯 나무라는 말투였다.
“또, 그 괴물이야기인가? 우리 그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끝낸 것 아니었어?”
“알아. 그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알지. 하지만 보라고. 정말 존재하잖아. 진짜 괴물이 있는 거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미할리오가 지지 않고 대답하자, 샤오밍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내둘렀다. 자꾸만 그가 뜬소문에 휘둘리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주장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신도 아주 잠시였지만, 저 놀라운 모습의 건물에 시선을 빼앗겼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 듯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이어지는 바츠의 단호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바츠는 갑자기 감지되는 이질적인 소리에, 둘에게 입을 다물라는 눈치를 주었다. 그리고는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 모든 신경을 청각에 쏟았다. 지상에서 듣기 힘든 낯선 소음이 일정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꼭 코골이를 하는 소리를 닮아있기도 했고, 헤러티커가 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닮아있기도 했다.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바츠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기 위해서, 몸을 반대로 홱 돌리며 말했다.
“누가 오고 있어요.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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