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10화 (110/268)

< --   8. 전주곡   -- >         * 110화 *

바츠의 말에 샤오밍과 미할리오가 덩달아 몸을 돌려세우며 경계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미할리오가 슬그머니 가장 뒤로 물러나는 사이, 샤오밍은 바츠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자신의 커다란 총을 들어올리며 자리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는데, 한쪽 눈을 스코프에 밀착시키는 것을 보니 먼 곳을 살피려는 듯 보였다. 그의 총구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였다. 하지만 금방 특이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한동안 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숨이 막힐 만큼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가 단단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츠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샤오밍의 신호만 침착하게 기다렸다. 감지된 소음이 점차 이곳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필히 샤오밍의 스코프에 걸려들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믿었다. 그리고 샤오밍은 그 믿음에 즉시 부응했다. 그가 갑자기 한쪽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시선을 집중시키더니 말했다.

“일리트시에서 사람이 온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아요.”

바츠는 그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일리트시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이 와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을뿐더러, 정황상 그곳에서 뒤늦게 출발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따라잡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틀을 허비했다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근접한 방법이 쉬지 않고 달려오는 것이었는데, 그건 숙련된 헌터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스코프에서 눈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샤오밍의 표정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확고했다. 바츠는 믿기 어려웠지만 머지않아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이유가 특별한 것이 아닌, 스스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허비한 시간과 이것이 더해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샤오밍이 그것을 직접 말로서 증명해주었다.

“비클레타입니다. 더그가 오고 있어요. 뒤에 셀레나도 타고 있네요.”

셀레나가 더그의 비클레타를 얻어 타고 이곳까지 쫓아온 것이었다. 바츠는 그녀를 눈으로 확인하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일리트시에 군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혼란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걱정이 밀려들었다. 혼란이 스스로 떠나가지 않고, 걱정에 의해서 쫓겨나고 있었다. 경계 병력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도시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장은 물론이고 장로 로리나와 엔지니어 심지어 주민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군인들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시장이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더그와 함께 기어이 이곳까지 달려왔다. 시장이 거세게 반발했을 텐데, 용케 이겨낸 모양이었다. 그녀와 더그가 함께 온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이 정말 큰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더그와 셀레나가 도시를 비워두고 이곳에 와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일이 발생한 것은 아닌지 몹시 불안했다. 둘의 등장은 시장의 반발을 뿌리치고라도 올 수밖에 없었던, 어쩌면 그런 시장마저도 종용했을지 모를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츠는 어수선한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는 더그가 비클레타를 미처 세우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어려운 모양이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체르노빌에 더 이상 가면 안돼요! 그곳에는 괴물이 있다고요!”

바츠는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했다. 갑자기 온 것으로도 모자라, 대뜸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녀를 받아드리기 어려웠다. 옆에 있던 샤오밍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그녀가 아닌 바츠를 바라보았다. 미할리오만이 조금 달랐다. 역시나 마찬가지로 의문스런 눈을 하고는 있었지만, 의기양양한 기색을 동시에 내비쳤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던 사람처럼 보였다.

“괴물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바츠의 물음에 그녀가 비클레타에서 내려서자마자, 바짝 다가와 말했다.

“그곳에는 방사능이라는 엄청난 괴물이 살고 있다고요.”

바츠는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기억을 더듬어 아르크에서 학교를 다닐 때로 돌아갔다. 방사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한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인공태양에 대해서 들을 때였던 것 같았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인공태양과 반대 개념의 기술을 설명할 때 언급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의 기억은 없었다. 떠오른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셀레나가 그런 바츠를 반복해서 부르며 말했다.

“집사님, 집사님! 지금 제 말 듣고 있는 거예요? 그곳에 가면 죽고 말거라고요. 놈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대요. 놈을 가까이하면 살이 물러지고, 녹아내려서 죽는다고 했다고요. 전에 헌터나 엔지니어들이 죽은 이유도 그 때문이래요!”

“그게 대체 뭔데, 뭔데 그렇게 호들갑이야? 진짜 괴물이 있는 건 아니지?”

샤오밍이 넋 놓고 있는 바츠를 대신해서 물었다. 미할리오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지 매우 못마땅한 눈치였다. 뭔가 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셀레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고, 고개를 한 차례 가볍게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어. 하지만 정말 위험하다고 말했다고. 놈에게 노출되면 무사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고 말했어. 아무래도 헤러티커보다 더 한 놈인 모양이야. 어쩌면 돌연변이일지도 모르지. 일부는 여전히 발전소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지만, 대부분은 땅 속에 숨어있다고 했어. 저기 보이는 저것이 그 괴물을 가둬 놓기 위해,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거라고.”

셀레나가 뒤쪽 먼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는 조금 전 바츠와 일행이 보았던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이 걸려있었다. 이제 와서 다시 마치 피로 얼룩진 것처럼 붉게 보였다. 샤오밍이 그곳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시선을 그녀에게 옮기며 말했다.

“그럼 상관없는 것 아냐? 더 이상 문제없을 거 아니야. 가둬 놓았다면 나오지 못하는 것 아니야?”

“내가 한 말 벌써 잊었어? 아직 내부에 돌아다니는 녀석도 있고, 대부분은 땅 속에 숨어있다고 말했잖아. 그때 헌터와 엔지니어들이 죽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 적어도 수백 년은 더 지나야 된다고 말했다고.”

셀레나가 답답한지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리고 미할리오가 그런 그녀를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나도 들은 기억이 나는 군. 놈들을 저곳에 가둬 둔 이유가 아무래도 굶어죽게 만들려고 한 것 같아. 아르크에서도 함구하고는 무조건 가지 말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 그런데 우리 스스로 먹잇감이 되어주었으니, 조금은 허기짐을 달래준 꼴이군. 놈들이 굶어죽으려면 우리가 조금 더 기다려야만 하게 된 거라고. 수백 년이라고? 맙소사...대체 괴물들의 정체가 뭘까?”

바츠는 그때까지도 잠자코 있었다. 아직까지 과거의 기억에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눈앞에서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 충분히 집중하고 있었다. 방사능이라는 단어에서는 이미 멀찍이 빠져나와 있었다. 다만 그들의 대화를 듣는 도중 불현 듯 떠오른 불안감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꾸만 언급되고 있는 그 괴물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셀레나와 미할리오가 발전소에 어떤 생명체가 있는 것처럼 언급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간 네 사람과 뒤늦게 간 헌터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너무도 달랐다. 먼저 간 넷은 발전소에서 즉사했고,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온 헌터는 나중에 사망했다. 헌터는 물론이고 모두의 사인은 불분명했다. 심지어 아르크는 그 헌터의 죽음에 대해 함구 한 채, 서둘러 그의 시신을 처리했다. 치명적인 감염이 발생했을 때 취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셀레나와 미할리오는 너무 멀리서부터 전해지기 시작한, 와전된 이야기에 현혹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들의 주장은 이곳으로 출발한 날, 전후로 나눴던 이야기처럼 그저 허점투성이의 옛날 괴담에 불과했다. 그것을 인정했었던 미할리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것이 황당할 뿐이었다. 바츠는 이미 발전소에는 관심이 없었다. 갑자기 밀려든 불안감에 집중했다. 바츠는 물었다.

“셀레나, 당신을 보낸 게 누구죠?”

“장로 로리나요. 그녀가 홀로 돌아온 세르히를 발견하고는 의아했는지, 그에게 물었어요. 둘이 가서 혼자서 돌아왔으니 이상할 만도 하죠. 그가 말했어요. 집사님과 미할리오는 북쪽 발전소로 갔다고요. 장로는 불같이 화를 냈죠. 그녀가 그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봤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였지만 흐뭇해했던 시장과는 달랐죠.”

바츠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고작 그런 괴담을 전하기 위해서 도시를 버려두고 왔다는 사실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 십분 양보해서 그 괴담을 사실로 믿거나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더그와 셀레나가 함께 와야 할 필요는 없었다. 더그 혼자서도 충분한 일이었다. 게다가 장로, 그녀가 누구인가? 아이기스의 지도자가 아니었나? 아르크를 무너뜨리기 위해 호심탐탐 노리고 있던 것이 바로 그녀였다. 자신의 야심을 숨김없이 드러낼 정도로 당찬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는 지금이 자신의 목적에 근접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인 적기로 보였다. 동쪽 전진기지를 점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을 이용해서, 자연스러운 공백을 만들어내는 얄팍한 술수! 현재 전진기지에는 저항할 수 있을만한 수단이 전혀 없었다. 바츠는 조금 전 그 불안감이 실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런데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불안을 혼란으로 뒤바꾸는 묘한 상황이었다.

샤오밍이 별안간 화를 내며 말했다. 이 자리에 그 누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분노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반응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발전소로 가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마땅한 핑계가 없어서 마지못해 따라나섰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유를 제대로 찾아낸 모양이었다.

“시장이 흐뭇해했다고? 미할리오, 지난번에 네가 말했지? 시장도 발전소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내가 그랬나?”

샤오밍은 미할리오가 머뭇거리자, 시치미를 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격앙된 목소리로 으름장을 늘어놓듯 닦달했다.

“그랬잖아! 지난번에 네가 분명 말했어! 그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그랬던 것...같긴 하네...하지만! 우연히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

샤오밍은 미할리오가 겁을 집어먹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 빌어먹을 자식! 그 놈이 일부로 집사님을! 집사님, 시장 그 놈이 벌인 짓이 틀림없습니다! 놈이 집사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한 거란 말입니다! 집사님을 발전소로 가게 해서, 그 괴물에게 화를 당하길 바란 겁니다!”

샤오밍은 시장에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서, 이미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정 짓고 있었다. 사실이 아니라면 시장으로서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츠의 불안이 혼란으로 바뀐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바츠는 샤오밍의 말을 듣고 나자,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느껴진 것이다. 어차피 발전소의 괴물은 괴담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비록 괴담일지언정 그런 사실을 알고도 제안을 했다는 것은 매우 불쾌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대로의 시장이라면 그런 의도로 충분히 일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셀레나는 장로의 사람이 아닌가? 그녀가 굳이 셀레나까지 이곳으로 딸려 보낼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장로가 자신의 야심을 드러낼 속셈이었다면 그녀는 남겨두는 편이 훨씬 나았다. 바츠는 되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무엇이 되었든 돌아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서둘러 돌아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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