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11화 (111/268)

< --   8. 전주곡   -- >         * 111화 *

바츠는 자신 있게 발걸음을 돌렸지만, 심란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든지, 분한 마음에 괘씸하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더 불쾌한 쪽은 시장의 몹쓸 짓이지만, 모순되게도 차라리 시장의 의도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장로의 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최악이었다. 지금 당장 함께 돌아가는 셀레나부터 걱정을 해야 했다. 장로가 그녀를 보냈다는 것은 딱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먼저 그녀를 제압하려는 시도를 해야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적개심을 느낄 수 없었다. 노련하게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동료들과 어울리며 농담도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평소처럼 굴었다. 잔뜩 굳어진 모습으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바츠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바츠는 돌아가는 동안 경계심을 늦출 생각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그녀를 베고, 장로는 물론이고 장로의 부름을 받고 몰려왔을 아이기스의 군대와도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집사님, 재미없으세요?”

셀레나가 물었다. 자신이 한 농담에 다들 웃느라 바쁜데, 혼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모습에 의아한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분위기가 즐거운지 눈가에 미소가 보였다. 하지만 바츠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눈동자에 섭섭한 기운이 차올랐다.

바츠는 가볍게 손을 내둘러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했다. 그들이 즐기는 것에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그러자 즐거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하게 변했다. 다들 신이 나서 웃던 자신의 모습에 급히 제동을 걸며 어색한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 샤오밍이 눈치를 살피다,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았더라면 긴 침묵으로 이어질 뻔했다. 그가 억지스런 노력으로 위기를 모면하도록 만들었다. 키예프 시티에서 있었던 일로 화제를 옮긴 것이다.

바츠가 캣을 구하러 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미할리오가 바츠에 대한 걱정으로 불안에 떨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고 했다. 늦게라도 따라가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울먹였을 정도라고 말했다. 샤오밍은 바츠를 믿지만, 겁이 나서 한참 뒤에나 따라나설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건물 안에서는 온갖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차마 안으로 들어설 엄두가 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이, 칼리에에게 눈에 띄어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샤오밍은 그들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매우 유쾌하게 설명했다. 특히 미할리오가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것을, 당시 그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행동을 따라하며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 덕분에 다시 분위기는 즐겁게 변했다. 미할리오가 불쾌해하지 않고, 적절하게 호응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 셀레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렇지 않은지, 샤오밍을 지켜보며 즐겁게 웃었다. 그들과 대립했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탓인지는 몰라도 이야기 자체를 흥미롭게 즐기고 있었다. 더그가 모두의 웃음소리에 자신도 함께 따라 웃다가, 뒤늦게 주위를 살피며 모두에게 목소리를 낮춰야 한다고 주의를 준 것도 분위기를 즐겁게 만드는 데 한몫 거들었다. 실컷 웃어놓고 갑자기 태도를 반대로 바꾸는 그의 행동이 매우 재미있었다. 바츠만 끝까지 굳어진 모습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즐거운 분위기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밤, 바츠는 불침번을 자청했다. 다들 하루 종일 걸은 것 때문인지 제법 피곤해 보였다. 아마도 내내 웃고 떠든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다들 지쳐보였다. 자리에 눕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을 정도였다. 샤오밍과 더그는 요란하게 코까지 골았다.

바츠는 그들이 잠든 사이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시장의 괘씸한 행동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다가와 있는 장로의 야망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시장의 경우는 따끔하게 혼꾸멍을 내주고 다시는 신뢰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장로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장로가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옮겼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골칫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뭔가 행동으로 나설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옆에 누워있는 셀레나였다. 그녀가 셀레나를 굳이 이곳으로 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보냈다면 이미 생각해보았던 자신을 향해 특별한 위해를 가하기 위함일 텐데, 적어도 지금 셀레나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바츠를 비롯한 두 사람이 발전소로 향한 발걸음을 되돌리도록 만드는 것이 전부인 듯 보였다.

“장로에 대해서 생각하시나요?”

그때, 이미 잠든 것으로 보였던 셀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바츠는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가 크게 놀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바츠의 시선을 마주보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로는 무모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가 원하는 건 안정과 공존이지 파괴와 침략이 아니거든요. 집사님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에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껄끄럽겠죠. 하지만 보세요. 아르크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에요. 부사령관이 속속들이 알고 있죠. 그런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고 있지 않잖아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장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요.”

“‘아직은’ 이겠죠? 장로가 처한 상황이 위태롭기 때문일 테고요, 그렇죠? 아르크에서 그녀를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내 말이 틀린 가요?”

바츠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을 알 수 없는 맑은 눈망울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말했다.

“그만 자도록 해요. 당신의 말을 믿도록 하죠. 그렇다고 당신들을 신뢰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직은’ 말이죠?”

그녀가 코웃음을 치는 흥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자리에 다시 누웠다. 바츠는 그런 그녀를 일으켜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완전히 눈을 감으며 자리를 고르기 위해 몸을 비비적거리는 모습을 보고는 생각을 거뒀다. 심란한 기분 일부를 덜어낼 수 있도록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모두 무사히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리고 또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바츠가 마지막 날 불침번을 서지 않았을 정도로 평범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불쾌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기분도 뒤로 차츰 밀려났다. 시간의 몹쓸 장난질이었다. 이미 샤오밍은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돌아오는 내내 웃고 떠든 것이 그의 기분을 완전히 환기시킨 모양이었다. 처음 그가 불같이 화를 냈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지켜보던 바츠로서는 서운할 법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츠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처럼 그때 그 감정을 고스란히 끌어냈다. 심지어 바츠의 무뎌진 감각을 자극했을 만큼 격렬했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

그는 복도를 거의 달리다시피 성큼성큼 걸어서 시장의 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있던 그의 멱살을 붙들어 번쩍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의 성난 목소리가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복도를 걷고 있던 바츠에게까지 들려왔다. 복도 양쪽에 줄을 지어 앉아서, 바츠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환호하던 주민들의 시선을 모두 빼앗아갔을 만큼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바츠는 그의 분노에 찬 고함을 들으며 시장의 방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뒤늦게 그때의 감정이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폭발적이지는 않았지만, 시장이 못마땅하게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그에게 듣고 싶은 대답은 하나였다. 굳이 사람을 보내서, 자신을 되돌아오게 만든 이유였다. 죄책감을 느끼고 그랬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장에게서 그런 대답을 바로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봉변이었는지, 샤오밍에게 대단히 불쾌한 태도를 보였다.

“샤오밍, 자네 이게 무슨 짓인가!”

바츠의 눈에 시장이 막 샤오밍의 손을 뿌리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샤오밍을 당하지 못했다. 그의 반항은 어설픈 몸부림에 그쳤다. 그 사이 샤오밍이 그의 멱살을 더 바짝 잡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몰라서 물어! 네 놈이 일부로 그랬지! 일부로 집사님께 발전소 이야기를 꺼낸 것 아니야!”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자네, 당장 이것 놓지 못하겠나!”

“자네? 무슨 소리? 이 더러운 놈이 아직도 입이 살아있네. 도시에서 네 놈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하고, 집사님에 대한 호의가 점차 높아지니까 네 놈이 위기감을 느끼고 그런 것 아니야! 그래서 일부로 집사님을 그 괴물이 있는 곳으로 보낸 거지? 오히려 내가 할 말이군! 대체 집사님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야! 응? 집사님이 거기서 괴물에게 당하기라도 했으면 했어? 대답해!”

시장이 당황스런 눈으로 입구에 선 바츠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네! 그곳에 괴물이 있었다면 집사님께 내가 그렇게 강력하게 요구를 했겠나? 이 손 치우지 못해? 자네가 평소에 날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황당하군! 나를 무엇으로 보는 건가! 당장 떨어지지 못해!”

“몰랐어? 몰랐다고? 일부로 그런 것 맞잖아! 집사님 험담이나 하고 말이야! 주민들 대부분이 집사님께 호의적인 걸 탐탁지 않게 생각했잖아! 칼이 있을 때는 전혀 그런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한 적이 없었지! 내 말이 틀려?”

샤오밍은 지지 않고 맞섰다. 시장의 시선이 위축된 것을 느끼고는 더욱더 강경하게 굴었다. 그의 큰 목소리에 자신감이 마구 피어올랐다. 심지어 멱살을 잡은 채로, 시장을 한쪽 벽만으로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시장이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 쓰레기 같은 놈! 부끄럽지도 않아?”

“자네, 진정하고 내 말을 듣게! 난 정말 몰랐다고! 장로가 더그를 보내겠다는 것을 허락한 것도 나란 말이네! 그러니 진정하고 우선 내 말을 듣게!”

바츠는 둘의 몸싸움을 그때까지도 지켜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사실 이미 그 전에 둘을 떼어놓고 싶었지만, 짐짓 마음 한 켠에는 시장이 골탕을 먹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장이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좀 더 곤혹을 치르도록 놔뒀을지도 몰랐다. 바츠는 여전히 입구에 선 채로 샤오밍에게 말했다.

“샤오밍 씨, 잠시 만요. 그만하세요.”

샤오밍은 자신의 뒤통수로 들려오는 바츠의 목소리를 처음에는 가볍게 거절했지만, 바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이 다시 한 번 말하자 못이기는 척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잡고 있던 그의 멱살을 집어던지듯이 내팽개치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바츠는 시장에게 말했다.

“시장님, 다시 말해 봐요. 조금 전 뭐라고 했죠? 장로가 더그를 보내자고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시장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샤오밍을 매우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자신의 구겨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서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바츠가 아닌 샤오밍을 향해 있었다.

“장로님이 그러더군요. 집사님과 샤오밍 그리고 미할리오가 체르노빌로 향한 것 같다고요. 전 처음에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집사님께서 이미 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었으니까요.”

“그럼 그렇지! 이 더러운 자식!”

“샤오밍 씨!”

샤오밍이 그새를 못 참고 시장에게 달려들었다. 바츠가 부르지 않았다면 시장과 또 한 번 몸싸움을 벌였을지 몰랐다. 시장의 시선이 바츠에게로 옮겨진 것도 그때였다. 그가 억울한 눈으로 바츠를 향해 읍소하듯이 말했다.

“참말입니다. 전 그때도 몰랐습니다. 그저 집사님께서 제 요청을 들어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기뻐했던 겁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얼굴이 허옇게 질렸더군요. 그때도 몰랐습니다. 그녀는 제게 당장 사람을 보내서 집사님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만 반복해서 말했으니까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대체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그러시더군요. 체르노빌에는 괴물이 잠자고 있어서, 어느 누구라도 가면 다 죽고 만다고요. 전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느꼈습니다. 집사님께 무슨 일이 생길까봐 죄책감을 느꼈죠.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그토록 진저리를 치던 원칙을 깨야할 정도로 말입니다. 더그와 셀레나가 함께 가지 않았나요? 그것도 제가 허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란 말입니다.”

“당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 무슨 선심 쓴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리고 거짓말 하는 거 아니야?”

샤오밍이 바츠를 대신해서 시장을 향해 분노하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를 조금도 신뢰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장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어떻게든 설명하기 위해 어떤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를 대변한 것은 그의 입이 아니었다. 뒤쪽에서부터 들려온 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느릿하고 생기가 없었지만, 힘이 있고 우아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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