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12화 (112/268)

< --   8. 전주곡   -- >         * 112화 *

“다들 진정하세요. 믿기 힘들 테지만 시장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약은 건 사실이지만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항상 주민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하죠. 물론 그것이 순수한 의도는 아닐 겁니다. 당신의 눈에 그리고 아르크의 눈에 들어서 스티그마타를 받고 싶은 걸 테니까요. 하지만 내 요청을 듣고 더그를 보내기로 한 것은 그가 맞아요. 나는 그곳에 괴물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손길과 함께 바츠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바츠는 고개를 돌리자, 함께 온 더그와 셀레나 그리고 미할리오를 제외하고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반쯤 기울여야만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회색 클로크를 몸에 두르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는 하얀 스카프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발끈하며 외치는 시장에 의해서 먼저 불려졌다.

“장로님!”

바츠는 시장의 외침을 무시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장로님, 그럼 셀레나는 왜 같이 온 거죠? 굳이 셀레나까지 함께 보낼 이유는 없었을 텐데요?”

장로가 어깨에 올린 손으로 바츠의 팔을 그대로 쓸어내렸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기특한 아이를 대할 때의 손길을 닮아있었다. 대견함에 흐뭇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바츠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더니 조근조근 말했다.

“맞아요. 셀레나를 보낼 필요는 없었죠. 오히려 그녀가 간다면 당신에게 더 좋지 않은 감정을 심어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렇죠? 날 의심스럽게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말이에요, 가끔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이 오해를 만들고는 한답니다. 정말 별거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죠. 특히 샤오밍,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죠? 더그가 겁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요.”

장로가 부드러운 미소로 바츠와 샤오밍 그리고 뒤에 서 있던 더그에게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바츠는 장로에게서 더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자신에게로 모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잔뜩 긴장한 얼굴을 한 더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것이 부끄러운지 당황한 눈으로, 마르기 시작하는 자신의 입술을 적시기 위해 혀를 날름거렸다. 꼭 죄를 지은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런 얼굴로 바츠를 간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함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든 사람에게서 으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이 장로가 다시 바츠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더그는 혼자 다니면 항상 불안해해요. 그래서 셀레나를 함께 보낸 겁니다. 더그가 혼자서 가지 못하겠다고 엄살을 부렸거든요. 방구석에 숨어서 소리를 질렀어요. 우리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죠. 하지만 우린 그를 이해해야만 했어요. 그가 느끼는 위압감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테니까요. 생각해 봐요. 자신이 헤러티커를 부를 수 있는 소리를 내며 돌아다닌다고 말이에요. 물론 시장도 반발했죠.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시장으로서 모험을 한 겁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우리 모두가 모험을 한 거죠.”

“그럼 시장님은 발전소에 대한 괴담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건가요?”

바츠의 물음에 장로가 고개를 한 차례 갸웃하고는 대답했다. 여전히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떤 것이요? 방사능이요? 물론 알고 있었죠. 단지 방사능이 뭔지 모를 뿐이지만요. 집사님,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는지 벌써 잊었나요? 이들은 무지할지 모르지만 순수한 사람들이에요. 그 괴물이 방사능이고 방사능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나와 당신뿐일 겁니다. 믿기 어려우시죠? 하지만 사실이에요. 이 사람들은 올림푸스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것이, 천장에 달린 유리의 박막태양전지 때문이라는 것도 모르죠. 지금은 고작해야 전구 몇 개를 밝힐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엄청난 전기를 생산했을 거예요. 태양은 지금처럼 뿌옇고 하얗지 않고 노랗고 붉게 타오르는 불덩어리였으니까요. 이들에게 태양은 그저 하얀 빛일 뿐이에요. 이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죠. 그렇지 않나요?”

바츠는 장로가 말을 마치며 자신을 향해 쌩긋 웃어주는 미소에, 남아있던 모든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녀가 잡은 손으로 손등을 지속적으로 슬그머니 문질러 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이 그저 작은 사고라고 생각됐다. 누군가의 음모나 모략이 아닌 그냥 코너를 돌아 나오다 부딪히고만 그런 사고. 일부로 길을 막아서고 있던 그런 악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장에 대한 불신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를 나무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게다가 수습하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하지 않았나? 바츠는 요 며칠 동안의 경험을 그저 시간과 함께 그냥 떠나보내야 했다.

장로가 그런 바츠의 심정을 읽었는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남은 손으로 반대쪽 팔뚝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이들에게 방사능은 그저 괴물일 뿐이에요. 누군가는 헤러티커 같은 짐승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과장된 뜬소문으로 치부하죠. 물론 그곳에 대한 위험을 인지하는 것은 같을 겁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이들을 이해해야 해요. 그러니 이제 그만 이들을 중압감으로부터 놓아주세요.”

바츠는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왼편으로 옮기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에는 작은 사내아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철 침대 위에 걸터앉아,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지, 크게 놀란 모습이었다. 바츠는 그 아이가 시장의 아들이라는 걸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고작 한 차례 마주쳤었지만, 아이가 자신을 향해 선망의 눈으로 외치던 그때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이는 바츠를 처음보고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비록 쉽게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동경하고 갈망하고 있었다.

바츠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장로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몸을 반대로 돌려 시장을 쳐다보았다. 시장이 억울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눈이 마주쳐지자 어깨를 움찔했다.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도,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도 모두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바츠는 그 옆에 샤오밍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거리고 있었지만, 시장에게만 말을 했다. 이번 일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그런 의도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죠. 당신이 무슨 짓을 하든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이죠. 아르크에서 당신의 말을 신뢰할까요, 나의 말을 신뢰할까요? 당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닌다고요? 아르크가 과연 당신을 위해서 나와 불편한 관계가 될 것 같습니까? 당신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나요? 지켜보겠습니다.”

바츠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한 어조로 내뱉어진 말에, 스스로도 속으로 놀라야 했다. 적당히 주의만 줄 생각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엄포를 늘어놓고 있었다. 마음 속에 그에 대한 미움이 어느새 공고히 자리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발언에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그 옆에 섰던 샤오밍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자 장로가 놀라움과 걱정스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 역시도 바츠의 반응이 뜻밖인 모양이었다.

바츠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기다리던 셀레나와 미할리오 사이를 지나쳤고, 가장 뒤에 있던 더그 앞을 스치듯 지났다. 뒤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쫓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곧장 코너를 돌아서 복도를 걸었다.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주민들의 손길에 눈길도 주지 못할 만큼 빠른 걸음이었다. 걷는 내내 느껴지는 찝찝한 기분에 차마 그럴 여력이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바로 뒤에 따라붙은 발자국소리를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진한 감정이었다. 잘 짜진 사각의 틀이, 뒤틀려 부러지기 직전인 것처럼, 뭔가 불안하고 초조한 기분이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도 모르게 뭔가 실수를 했을 때나 느낄 수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복도를 절반 쯤 지나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작은 여자 아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앞을 막아섰다. 갈색 머리칼을 허리까지 기르고, 노란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아이는 그 노란 눈동자로 바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찌나 차가운지 바츠를 방금 전까지 괴롭히던 불안함을 단 번에 날려버렸다. 복도 양 옆에 늘어앉은 주민들마저도 굳은 얼굴로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내게 볼 일이 있니?”

바츠는 최대한 친절한 말투를 쓰기 위해 노력하며 물었다. 그러자 아아는 자신이 입고 있던 낡은 서지(serge)치마를 단번에 허리까지 끌어올리더니,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뭔가를 꺼내기 위해 뒤적거렸다. 바츠는 갑작스런 아이의 행동에 짐짓 놀랐지만,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조금 흥분한 것 같은 아이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차갑던 아이의 눈에 원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정확히는 경멸에 가까운 눈초리였다. 바츠는 그 눈빛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르크에 사는 동안 항상 따라다니던 시선들이었다. 더러운 오물을 보는 듯한 그 눈빛! 아이는 바츠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츠는 아이에게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바츠가 따로 묻기도 전에 답했다.

“이 악마! 이 괴물!”

동시에 아이가 가랑이 사이에 넣었던 손을 쑥 뽑아내며 바츠를 향해 휘둘렀다. 뭔가가 바츠의 가슴팍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바츠는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팍에 그대로 얻어맞고 말았다. 아이와 거리가 고작 한발자국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이가 자신을 향해 던진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각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붉은 피였다. 아이는 자신의 가랑이에서 붉은 피를 손에 묻혀 바츠를 향해 던진 것이었다. 주변에서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놀란 감탄사와 뒤섞이며 순식간에 혼란스럽게 변했다. 바츠는 아이를 향해 뻗던 손을 중간에 그대로 멈춰놓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 몸이 마비가 된 것 같았다. 그 사이 뒤를 바짝 쫓던 걸음이 바츠를 지나쳐 앞으로 튀어나가며, 아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이 꼬마가 또 정신 나간 짓을 하네!”

바츠는 자신의 옆을 지난 사내가 샤오밍인 것을 눈으로 쫓으며 확인했지만, 나머지 기관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너무도 당황스런 상황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눈앞이 번쩍일 만큼 어질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샤오밍이 강제로 품에 안으며 손발을 쓰지 못하게 되자, 바츠에게 침을 뱉으며 소리를 질렀다. 처절하도록 악에 바친 목소리였다.

“더러운 악마! 나를 풀어줘! 썩은 내가 진동을 해! 당장 꺼져 버려!”

바츠는 그제야 몸을 천천히 추슬렀다. 주민들이 경악하며 내뱉던 비명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그들이 바츠를 대신해서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놀란 눈으로 지켜만 볼 뿐이었다. 바츠는 터질 듯한 가슴을 애써 짓누르며 샤오밍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 거죠?”

샤오밍이 자신의 품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아등바등 대는 아이를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고 노력하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아이의 발악에 힘이 부치는지 목소리가 불안정했다. 하지만 바츠는 그의 목소리가 불안정한 것이 아이의 몸부림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의 눈빛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의 곁눈질로 바라보는 시선에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집사님, 이 아이가 멘디입니다. 말레나의 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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