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 전주곡 -- > * 113화 *
바츠는 샤오밍의 대답을 듣고 나자, 머릿속이 온통 그녀를 향한 의문으로 가득 찼다. 샤오밍의 어깨에 들쳐 메진 채로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아르크에서만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욕이 이곳에서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르크의 그들과 똑같은 눈, 똑같은 행동으로 자신을 향해 비난하고 있었다. 다른 것이라고는 비열한 미소대신 일그러진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그녀가 왜 자신을 향해 저토록 분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위해서 목숨도 걸었었다. 그 대가가 고작 경멸이라는 생각에 허무함이 밀려들었다.
“집사님...괜찮으십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한 노인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기운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바츠를 향해 부들부들 떨리는 양손을 뻗어왔다. 그리고는 그 손으로 바츠의 가슴팍에 묻은 검붉은 혈흔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조심스런 노인의 소매가 금세 붉게 얼룩졌다. 그는 바츠의 눈치를 몇 번이나 살피며 그 흔적을 닦아냈다. 주변에 다른 주민들도 뒤늦게 하나 둘 몸을 일으켰다. 노인처럼 바츠에게로 다가와, 바츠를 걱정하고 위로하기 위해 기운 없는 목소리로 애써 한 마디씩 건넸다. 일부는 샤오밍 쪽으로 다가가 그녀를 타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기도 하고, 뺨을 치려는 시도도 있었다. 주민들이 바츠와 멘디를 품안에 안고 있는 샤오밍을 순식간에 둘로 나누어놓았다. 샤오밍이 고함을 지르며 그들을 떨어뜨리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벌하려는 것처럼 샤오밍에게로 달라붙었다. 바츠가 멈추라며 소리를 지르지 않았더라면 샤오밍은 물론이고 그녀 역시 제대로 곤혹을 치를 뻔했다.
바츠는 자신을 살펴주는 주민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들의 손길을 살며시 밀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입구로 향했다. 주민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며 비켜주는 그 사이를 통과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한쪽에 구겨지듯 몰아붙여진 샤오밍과 그녀 앞은 무심한 표정으로 지났다. 그러자 그녀가 바츠의 가까운 쪽 어깨와 등짝을 손바닥으로 각각 한 차례씩 연속해서 후려쳤다. 손바닥을 휘두른 것은 모두 세 번이었지만, 마지막은 거리가 벌어지며 빗나갔다.
바츠는 그녀의 손길이 헤러티커에게 얼굴을 얻어맞았을 때보다도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을 정도였다. 고개를 돌리자 샤오밍의 품에 안긴, 정확히는 붙들려 있는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눈물은 손쓸 틈도 없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렀다. 하지만 바츠는 그녀의 흐르는 눈물보다도 눈물이 스치고 지나는, 그녀의 뺨에 난 상처에 더 시선이 갔다. 조금 전 몸싸움 도중 입은 상처로 보이는 붉은 사선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손톱으로 할퀴어진 자국이었다.
바츠는 손을 뻗어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뻘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상처를 얻을 때, 그녀가 놀랐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바츠의 손길을 거부했다. 샤오밍에게 안겨 있는 탓에 몸을 쓸 수 없자, 고개를 내두르는 것으로 바츠의 손길을 거칠게 털어냈다. 바츠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을 때에는, 유일하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오른손으로 차갑게 쳐냈다. 바츠는 뜨거운 한숨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목을 타고 콧구멍에 가득 차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밖으로 내뱉지 않고 안으로 삼켰다. 조용히 몸을 돌려세우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안쓰럽게 바라보는 샤오밍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애써 삼킨 뜨거운 한숨이 가슴을 틀어막아 너무도 갑갑했다.
“집사님!”
도시를 빠져나와 막 지상으로 올라오자, 뒤에서 샤오밍의 목소리가 쫓아왔다. 그는 멘디를 내려두고 혼자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바츠는 몸을 반쯤 돌리며 조금 전 애써 삼켜냈던 한숨을 이제야 길게 내뱉었다. 무거운 가슴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 사이 계단을 다 오른 샤오밍이 그새 차오른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정말로 호흡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기분이 어떤 지 압니다. 하지만 멘디에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제 고작 10살입니다.”
바츠는 그를 향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가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로 활짝 웃었다.
“그 말하려고 이렇게 온 겁니까? 그만 돌아가서 쉬세요. 우린 이제 막 북쪽에서 돌아왔을 뿐이에요. 너무 지쳐 있죠. 내 걱정은 마세요. 샤오밍 씨가 나를 가까이에서 봐 와서 잊은 모양이군요. 난 헌터에요. 그리고 일리트시에 집사죠. 그런 것 따위에 신경이나 쓸 것 같아요? 난 그것 말고도 생각해야 할 게 많아요.”
바츠는 말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따라 유난히 어두운 하늘과 쌀쌀한 바람이 망토를 몸에 휘감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비가 내린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견뎠다. 귓가에 울리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그런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고개를 한 차례 크게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그러자 그 바람을 타고 샤오밍의 외침이 들려왔다. 바츠는 그의 목소리에 또 한 번 걸음을 세워야 했다.
“말레나가 집사님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나 봐요!”
바츠는 몸을 단 번에 돌려서 그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억울한 마음에 그에게 필요 이상으로 소리를 지르게 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그냥 찬바람에 얼어붙은 것처럼 가만히 기다렸다. 그를 바라보게 되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게 될 것 같았다. 그녀를 살해한 것은 자신이 아니고 정신 나간 헌터였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 자신의 결점이자 오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엄연히 따지면 멘디의 원망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자행되어 오던 헌터들의 관행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예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충분했다. 물론 핑계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누군가를 탓하기나 하겠지. 그 사이 샤오밍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비해서 한풀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그리고...그때 멘디를 구해주었던 헌터 있잖습니까? 그 헌터를 집사님이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기억하시죠? 그날 밤 멘디가 그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말이에요. 다음날 그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 않습니까.”
“왜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요?”
바츠는 변명대신 의문을 제기했다. 그를 나무라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미안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그가 고개를 반쯤 숙이고 눈치를 살피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 했다.
“그냥 꼬맹이들의 고집인 줄 알았습니다. 아시잖습니까, 저 나이 때 여자아이들. 울고 떼쓰고...저하고도 잘 이야기하지 않아요. 대부분 검을 구해달라고 조를 때나 말을 하죠.”
“검이요?”
“네. 헌터들이 쓰는 그 칼이요. 칼리에가 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바츠는 그 칼날을 누구에게 겨누고 싶은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샤오밍이 그것까지 알 것 같지는 않았다. 샤오밍이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먹는 걸 거부하지 않는다는 거죠. 제가 주는 음식까지 거부했다면 정말 슬펐을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녀석도 철이 들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바츠는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그 역시 멘디를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괜한 말들로 그를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 스스로가 달라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가슴에 품은 증오를 쏟아내면 고스란히 감내는 것이다. 그 증오를 만들어준 대상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대상을 콕 집기에는 세상은 너무 삭막했다. 모든 것이 원인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증오를 누가 받아낼 것인가 였다. 바츠는 그것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그녀에 대한 사죄라고 생각했다. 모두를 대신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겪은 고통을 삭힐 수 있도록 말이다.
바츠는 끝까지 샤오밍을 바라보지 않았다.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이별을 알렸을 뿐이었다. 그도 그렇고 자신에게도 지금 당장 휴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츠는 곧장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샤오밍이 도시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올라오며 바츠를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집사님, 잠깐 시간 좀 내주세요. 장로님이 할 말이 있다고 하시네요.”
뒤늦게 올라온 사람은 셀레나였다. 바츠는 그녀를 목소리만으로도 알아보았다. 몸을 돌려세우자 얼떨떨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샤오밍 옆으로, 그녀가 몸을 돌려세우는 자신을 확인하고는 계단을 다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바츠는 샤오밍에게 고개를 끄덕여 그가 도시로 돌아가서 쉴 수 있도록 눈치를 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금방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셀레나가 장로의 거동을 도우며 함께 올라왔다.
“이제 나를 믿나요?”
장로는 계단을 힘겹게 올라서자마자 물었다. 불편한 다리 때문에 매우 지쳐보였다. 샤오밍과 다르게 정말 가쁘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물음은 의사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답을 내놓으라며 채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흘렀다. 하지만 바츠가 대답을 하지 않자, 조금 실망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간절히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내가 이만큼 했는데도 못 믿겠다는 건가요?”
“믿음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군요. 당신을 믿든 안 믿든 난 당신에게 동의를 하지 않는 겁니다.”
“나를 믿는 군요.”
바츠는 그녀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매우 못마땅했다. 자신의 의사를 마치 그녀가 결정하려는 것 같은 기분에 불쾌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당신을 믿지 않아요.”
“거짓말. 그럼 왜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었죠? 나를 믿지 않는다면 이미 그는 크게 혼쭐이 났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건 당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내 눈을 믿은 겁니다. 도시가 평소와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요. 그리고 그에게도 권위와 위신이 있어요. 그걸 지켜준 것뿐입니다. 그는 최소한의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요. 그 누구라도 요.”
장로가 셀레나를 떼어내고 혼자서 바츠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절뚝거리는 한쪽 다리로 피곤할 텐데도 기어이 바츠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스타드를 만났죠? 그가 뭐라든가요? 자신이 칼만큼 겁쟁이였다는 말을 하던가요? 용기가 없었다고는 하지 않던 가요?"
바츠는 그녀가 조금씩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는 불쾌하다 못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대체 제게 왜 이러는 겁니까? 날 그냥 내버려둬요.”
“왜 이러느냐고요? 당신에게 대답을 듣고 싶어서 그래요. 그때 내가 한 말에 대한 대답이요. 내 비밀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 말이에요. 이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바츠는 망설임도 없이 대꾸했다.
“당신의 말에는 그 어떤 설득력도 없어요. 당신을 신뢰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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