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하얀 감염 -- > * 114화 *
“왜요?”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주장이 비겁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에 그녀는 자신들이 싸우는 이유를 모두가 똑같아 지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르크의 문을 열고 모두가 들어와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자리와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그것이 도둑질 같았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얻고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왔다. 그 역할들은 하나같이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그 가치의 높낮이는 논할 수 없는 위대한 노력들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그녀는 물론이고 아이기스의 그들은 그 자리와 권리를 거저 얻는 것이었다. 그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그들은 아르크를 위해 그리고 그 권리를 위해 노력을 한 적이 없다. 그들은 그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했을 뿐이다. 그것은 덩치 큰 무능한 아이가 덩치 작은 유능한 아이의 배급표를 힘으로 빼앗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놓고 같은 양의 배급표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치졸하고 뻔뻔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옳다는 것은 안다. 모두가 똑같은 권리를 누리는 것은 정말 이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결코 옳지 않았다.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아르크의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한 노력을 그저 그런,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시도였을 뿐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그녀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다른 말을 하는 것은 시간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물었다. 바츠가 입을 굳게 닫고 있자, 초조함을 느낀 것 같았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바츠는 분명 그녀의 조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여유가 매우 가식적이었다.
“당신에게도 가족이 있죠?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그런 인연 말이에요.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죠? 레벨1? 레벨2? 당신에게 그렇게 소중한 가족이 레벨4에 살면 안 되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바츠는 그녀의 물음에, 전에 마티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친구들과 함께 사령관을 만나러 가겠다며 난동을 부렸던 그때였던 것으로 기억됐다. 그때 마티프는 그녀와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며 울부짖는 지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각자에게는 가치가 있고, 그에 따른 지위가 주어지기 때문이죠.”
바츠는 자신이 그런 가치를 가지고 말 것이라는 말은 아꼈다. 그러자 그녀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늘 우아한 말과 행동을 하던 그녀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웠다. 정말 추한 웃음이었다. 상대를 비웃고 업신여기는 그런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가치와 지위? 맞아요. 틀린 말이 아니죠. 그럼 다시 묻죠. 그 가치와 지위는 대체 누가 판단하죠?”
바츠는 애써 언짢은 감정을 감추며 대답했다. 그녀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심이었다. 그녀에게도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꾹 참았다.
“부사령관과 관리자들이죠. 그들은 그런 가치와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렇죠. 그럼 그들에게 그런 가치와 지위를 준 것은 누구일까요?”
“그 전에 있던 부사령관과 관리자들이겠죠.”
“그들은요? 또 그 전에 그들은요?”
바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그 웃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터라, 그녀가 매우 불쾌했다. 그녀는 쓸데없는 말로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바츠가 대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어느새 초조함을 떨쳐내고 평소처럼 자신감이 차오른 목소리였다.
“그것에 대해 의심을 품어본 적 없나요? 왜 그들에게 그런 권리가 주어져 있는지 말이에요. 그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 것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들 스스로 얻은 걸까요? 그들에게 그런 자격이 있나요? 그들이 대체 누구인데요? 당신은 분명 레벨1 거주자였을 거예요. 당신이 아는 사람 중에 관리자가 된 사람이 있나요? 내가 장담하죠. 아무도 없을 거예요. 기껏해야 레벨2에 거주하겠죠. 아! 레벨4에 거주하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겠네요. 예를 들어 ‘라파엘’ 스타드의 가족이라든지, 아르크를 위해 극도의 헌신을 한 가족들 말이에요. 그럼 다시 묻겠어요. 그들 중에 관리자가 있나요? 관리자들과 같은 공간에 사는 것 말고! 정말 그들과 같은 사람이 있느냐고요. 그곳에서 그들이 과연 행복할까요? 그들과 같은 대접을 받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전보다 삶은 나아졌을지는 모르죠. 하지만 레벨1에 거주하는 이유로 받던 차별과 괄시가 없을 것 같아요? 다시 하나 물을까요? 그들이 죽은 다음은 생각해봤어요? ‘라파엘’ 스타드가 죽은 다음 말이에요. 그가 죽어도 그들의 가족이 계속 레벨4에 머물 수 있을까요? 십분 양보해서 머물 수 있다하더라도 과연 그곳에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바츠는 그녀의 확신에 찬 당당한 모습에 괜히 발끈해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마티프의 말을 빌렸다.
“노력을 해야지요. 그들과 같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증명을 해야죠. 나머지는 그 다음에 논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요? 그리고 그걸을 논하는 것은 정해진 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지 결코 무력이 아닙니다. 무력은 적을 무찌를 때에나 쓰는 것이죠.”
그녀가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답답함에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성이었다. 적나라한 비난으로 무안하게 만들 때나 나오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품위를 잃지 않았다. 감정은 전보다 격해졌지만, 그런 질 낮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무력! 그 무력이 당신의 그 잔인한 칼날이라고 생각하나요? 진짜 무력은 말이에요, 당신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어요. 당신이 레벨1 거주자라는 인식을 뼛속 깊은 곳까지 박아 넣은 것이 진짜 무력이라고요!”
바츠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자 그녀가 바로 말을 이었다. 눈을 한 차례 느릿한 속도로 깜빡여, 차오른 감정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뒤였다. 그녀 특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다.
“바츠, 난 우리가 모두 똑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 거예요. 내게는 그럴 기회가 있어요. 이제 그 기회를 움직일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되요. 당신이 내게 그 힘이에요. 나를 도와줘요. 당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나와 내 가족, 당신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일을 하고 똑같은 대가를 받게 될 거예요. 그게 내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이에요.”
바츠는 그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매끄럽고 건조한 바닥을 고무로 문지르는 것처럼 들려왔다. 귀를 마구 후벼 파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거슬렸다. 뻔뻔하게도 도둑질을 계속해서 정당화하는 그녀가 무서웠다. 그녀는 마치 선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두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말은 옳다. 항상 옳다. 그녀가 절대적 이상향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세상에 모든 선한 사람들을 모아둔다고 해도 그 사이에는 결국 도둑이 생기고 만다. 똑같은 세상! 똑같은 권리! 그게 얼마나 우스운가? 사람이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똑같은 세상을 살 수 있지? 바츠는 그녀를 믿는다. 하지만 스타드에게 동의하고 그녀에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타드를 신뢰하고 그녀를 신뢰하지 않는다. 바츠는 물었다.
“당신이 말한 그런 세상이 오면 혼란으로 가득할 것 같지 않아요? 그게 당신이 원하는 혼란입니까?”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내가 원하는 혼란은 그거에요. 지금의 고정된 자리를 깨뜨리는 그런 혼란.”
바츠는 그녀의 대답에 잠시 놀랐지만,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정확히 지적해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바츠는 또 한 번 그녀의 절박함을 느꼈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해요? 모두가 똑같아 지려는 한다는 것이요. 우린 그들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에요. 본래 우리의 것을 되찾으려는 것이죠. 그들이 가진 것은 전부 그들의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우린 그들이 가진 것에 의해 억압되고 구속되어서 우리 것을 빼앗기고만 겁니다. 그들에게 작은 요구와 함께 정전을 합의한 것은 우리도 그들도 지쳤기 때문이었어요. 모두가 자멸할 수는 없는 것이었죠. 그리고 그 사이 우리에게는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했어요. 그들은 그 여유를 나눠준 겁니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그것이 배려라고 생각해요? 천만에요! 고마워해야 하는 건 여전히 그들이에요. 그들이 우리 것을 가지고 그렇게 살 수 있는 거니까요. 그들은 우리의 것을 아주 조금, 정말 조금 돌려준 것뿐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다시 가져갔죠. 강력한 무기를 드디어 손에 넣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후회하고 말거에요. 그 무기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건 더 이상 우리와 그 어떤 대화도 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거든요. 그는 몰라요. 우리에게도 그에 대항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있다는 걸요. 어쩌면 그 무기마저도 빼앗기 위해서 서둘러 그 무기를 사용한 것일지도 모르죠. 내가 조급함을 느끼도록 말이에요.”
바츠는 그녀가 자신이 했던 말을 오해한 것을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 것으로 족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변화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르크의 붕괴를 의미했다. 바츠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변화가 상생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엄연히 파괴였다. 그녀가 물었다.
“나를 이제는 믿나요?”
바츠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난 그 혼란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바츠!”
“미안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옳을 지도 몰라요. 그리고 케일리가 아르크 밖에 있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케일리는 안에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방법은 틀려요. 당신의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일지도 몰라요. 난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빌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품위를 끝까지 잃지 않으며 말했다.
“그럼 내 말을 한 번만 믿어줘요. 스톡홀름 시티. 그곳에 가서 닥터를 만나보세요. 그럼 생각이 바뀔 겁니다. 확신해요. 그가 모든 것을 말해줄 거예요.”
바츠는 몸을 돌려세웠다.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티프의 냉정한 손찌검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투쟁이 아닌 노력을 통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권리들을 얻길 바랐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바츠의 손을 낚아채며 몸이 돌아서는 걸 막았다. 그녀는 놀란 바츠가 고개만 돌려 바라보자, 눈을 마주치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변했군요. 맑은 눈이 사라졌어요. 집착이 생겨나고 있군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인 거죠? 그들의 목숨이 아르크 주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바츠는 키예프 시티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변명으로, 남을 약탈하고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욕구를 위해서라면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악의마저도 실수나 절박함 따위의 어쩔 수 없었다는 말로 합리화 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굳이 좋게 말하면 필사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은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죄책감을 느낀다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죄책감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뿐이었다. 바츠는 대답했다. 전에는 망설였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네. 다릅니다. 그들에게서는 도저히 나와 같은 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그들은 탐욕에 찌든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무엇이든 하는 사람들이죠. 난 그들이 아닙니다. 난 법을 지키고, 아르크를 수호하고, 가족을 지키지만 그들은 아닙니다.”
바츠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 해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명분이 얼마나 거창한가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녀가 뒤통수에 대고 그래도 결국에는 모두 같은 것이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듣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무거운 걸음도 멈추지 않았다. 걸음이 무거운 것은 그녀 탓이 아니라, 멘디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전진기지로 돌아가는 내내 멘디보다는 방금 그녀와 나눈 대화들이 더욱더 맴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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