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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15화 (115/268)

< --   9. 하얀 감염   -- >         * 115화 *

‘원래 내가 살아야 하는 곳이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레벨1이 아니라, 청소로봇 빌리캄이 수시로 돌아다니고 성능 좋은 환풍구가 있는 쾌적한 레벨4가 아닐까?’

바츠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처음, 이제 막 해보았다. 생각을 해야 할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레벨1에서 태어났으니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당연했다. 그렇다고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틈만 나면 레벨1에 살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다른 레벨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는 그런 탐구가 아닌, 다른 레벨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래서 답은 없었다. 어릴 때에는 그때마다 부모님이 미웠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서는 그냥 화만 났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는 그런 분노였다. 그것을 아버지나 케일리에게 짜증으로 쏟아내기도 했지만, 결코 그 둘을 원망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인가부터는 그런 분노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저 수치심이었다. 레벨1에 사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테라치가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울보가 되었을 것이다.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도 꽤 도움이 되었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수모도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견뎌낼 수 있었다. 정확히는 외면할 수 있었다.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면 그만이었다. 그게 테라치라면 더더욱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거주지가 다른 곳이 아니었을지 생각한다? 지훈이 비슷한 말을 늘어놓았을 때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었다. 기분이 묘했다. 정말 그들이 가진 것이 그들 것이 아닌, 내 것이라면 매우 행복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탐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했을지 심히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들은 지치고 힘에 겨운 사람들에게 편법에 의존하도록 만들 뿐이었다.

바츠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끄덕임을 혼자서 반복했다. 이해를 의미하는 것인지, 동의를 의미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몰랐다.괜한 헛웃음만 터졌다. 자신의 행동이 우스웠다. 고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다. 애써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아르크에서 걱정하고 있을 케일리를 위해서라도 벌써 지칠 수 없었다. 줄곧 바닥만 바라보고 걷던 고개도 들고, 축 쳐져 있던 어깨도 활짝 폈다.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전진기지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상념에 빠진 탓에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확연히 눈에 띌 만큼 덩치가 큰 사내였다. 그는 전진기지로 진입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바위틈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의도적으로 막아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의 커다란 덩치는 절로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바츠는 넋을 놓고 있던 자신의 안일한 태도에 바짝 긴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가 친숙한 검은 옷 위로,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위협을 느꼈다기보다는 낯설음에 대한 기분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따로 특별히 경계는 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나마 한가로웠던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그는 바츠가 바로 앞에 다다를 때까지도 특별한 행동 없이 묵묵히 기다렸다. 바츠를 발견한 것은 이미 한참 전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동자세로 우뚝 서서는 이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가 적이었다면 바츠는 얼마든지 위기에 빠질 수도 있었다.

바츠는 그 앞에 섰지만 입을 열기 전에 고개부터 갸웃해야 했다. 방독면 렌즈로 비쳐지는 그의 눈이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츠가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집사가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 바츠?”

바츠는 순간 움찔하며 멍해졌지만, 그의 묵직한 목소리가 알아서 머릿속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더니, 결국 제자리를 찾아들어가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렸다. 바츠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버니!”

너무 기쁜 나머지 그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가 용케 눈치 채고는 한쪽 손바닥을 내보이며 거리를 두었다. 조금 서운한 기분을 느꼈지만, 헌터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으면서 그가 조금 변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들뜬 마음으로 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는 안에 들어설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자리에 앉고, 뜨거운 차를 내왔을 때에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

“기분 좋은 물이군.”

바츠는 그에게 차라고 말해주려다가, 그의 왼쪽 뺨이 움직일 때마다 씰룩이는 큰 상처를 보고 그만 두었다. 그의 왼쪽 뺨에는 살이 크게 벌어졌다가, 겨우 눌어붙어 흔적이 또렷하게 나있었다. 최근에 생긴 상처가 아닌지 이미 단단해져 있었으나, 피부색도 다르고 그 두께도 훨씬 얇은 매우 커다란 흉터였다. 그 흉터는 바츠의 시선을 완전히 빼앗았다.

“미사에서 생긴 상처야. 사드 후작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드 후작?”

“아, 넌 모르겠구나. 있어, 미친 노인네. 3학년만 담당하는 것 같은데 완전히 정신병자야. 별명이 사드 후작이래. 무슨 뜻인지는 몰라. 기회만 된다면 그 노인네를 죽여 버리고 말거야.”

바츠는 노인에 대해서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가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여서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잠시였지만 노인을 욕할 때 그의 눈빛이 독기로 물들었었다. 그가 차를 다 마시고 자리에 편히 몸을 기대는 것을 조용히 지켜만 보았다. 그는 차를 마셔서 뜨거워진 입김을 한숨으로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고, 말투는 평소처럼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한이 맺힌 듯한 살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 재수 없는 노인네가 아델리나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 알아? 아델리나가 누군지는 알지?”

바츠는 그가 묻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그냥 말이 헛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면으로 훤히 드러난, 그의 뺨에 난 흉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그가 애써 늘어놓는 이야기에나 집중했다.

“그 더러운 노인네가 아델리나에게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 아느냐고. 그 미친 노인네는 아델리나만 보면 모욕적인 말을 매번 해댔어. 더럽고 역겨운 말들 말이야. 정말 서슴지 않았지. 그 쓰레기는 아델리나가 우는 모습이 좋은 것처럼 보였어. 괴롭히는 것도 좋아했지. 아마 넌 그 노인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나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으니까. 난 아델리나가 포기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어. 나도 테라치도 그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거든. 생각해봐. 누군가 네 그곳을 쿡쿡 찔러대며 치욕을 준다고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응? 너한테 그런 것, 그런 것 있잖아? 그런 것을 마구 강요하며 수치심을 줬다고. 나도 견디기 힘든 걸 그녀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어. 자유로웠던 건 테라치 그 자식뿐이었어. 그 재수 없는 노인네도 테라치만큼은 건들지 못하더라. 나에게는 밖으로 꺼낸 엉덩이를 핥으라고 까지 했다고. 그냥 미친놈이었어. 물론 우리 중에 그 노인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준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랬다가는 그 노인네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럴 때마다 그 노인네가 말했지. 요구를 들어주면 훈련의 강도를 낮춰 주겠다고. 너 그거 알아? 헌터 마지막 1년의 훈련동안 얼마나 많은 훈련생들이 죽는지 말이야. 난 미사를 졸업하고 나서 지상으로 나온 뒤에도 그것이 훈련인지 알 수가 없었어. 그건 그냥 학대였어. 움직임 감지 센서가 달린 전자동 소총을 피해서 며칠을 살아남아야 했고, 일주일 넘게 굶주린 프레이 100마리가 있는 우리에 던져지기도 했지. 먹을 것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어. 하지만 난 알아. 훈련 도중의 사고보다도 자살하는 녀석들이 더 많다는 것을 말이야. 그건 정말 미친 짓이었어.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 거기서 느끼고 배운 것들이 지상에서는 정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거야. 믿어져? 그런 병신 같은 것들이 유용하단 말이야."

바츠는 그의 흉터를 쳐다보느라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는지, 그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왠지 지금의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말을 아꼈다. 그러자 그가 자리에 앉은 이후, 처음으로 마주보며 물었다.

“이 흉터가 궁금하지?”

바츠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바로 다시 그의 왼쪽 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얼굴을 정면으로 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완전히 드러난 흉터를 바라보며 그가 느꼈을 당시의 고통을 생각해봤는데, 지금은 반쯤 가려진 그의 흉터를 포함해서 전체적인 인상에 더욱 관심이 갔다. 그가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인지, 매우 험상궂게 느껴졌다. 특히 그 흉터가 그의 왼쪽 입꼬리와 상당히 가깝게 인접해 있어서, 그의 입이 정말로 귀까지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낯선 사람이 그를 마주치면 섬뜩함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꿈틀거리는 흉터가 무섭게 느껴졌다.

“아델리나를 위해서 그 노인네에게 덤볐다가 얻은 상처야. 무모했지. 그 노인네가 아무리 쓰레기처럼 보여도, 수십 년 동안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잊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그도 헌터였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지. 그 노인네는 나를 제압하더니 자신에게 욕을 해보라고 했어. 그래서 난 했지. 그때만큼은 정말 화가 나서 두려움이 없었거든. 그랬더니 그 노인네가 그러더라. 자신을 향해 욕을 하는 내 혀가 탐난다고. 난 노인네에게 얻어맞느라, 내 머리가 어떻게 된 줄 알았어. 무슨 말인지 몰랐지. 그 다음에 한 말을 듣고 나서야 알 수 있었어. 그 노인네가 그랬어. 혀가 탐나지만 특별히 자비를 베풀어 용서를 해주겠다고. 대신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만 하고 싶다고 하더라. 그리고는 들고 있던 카니지로 내 왼쪽 뺨을 찢어버리더라. 젠장...혀가 멀쩡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그가 다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바로 했다. 바츠가 자신의 말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낀 까닭인지, 체념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뒤통수를 의자에 완전히 기대고 얼굴은 천장을 향했다. 또, 눈은 감고 몸은 잠든 사람처럼 축 늘어뜨렸는데, 헌터들이 으레 하는 행동들이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조용히 읊조리는 말투였다.

“여자들은 알까? 자신들이 얼마나 완벽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아델리나도 모르겠지?”

바츠는 그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전의 그 버니에투와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헤르만처럼 말하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물론 그보다는 훨씬 양호한 상태였지만, 점점 그를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 이상했다. 머지않아 헤르만처럼 횡설수설하게 될 것처럼 보였다. 바츠는 그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버니, 괜찮아? 별 일 없는 거지?”

“집사는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대답했다. 바츠는 그런 그에게 자신은 그의 집사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자신이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십 가지의 이유를 단 한마디로 간추려서 말했다.

“넌...친구잖아.”

“그래? 우리가 친구 맞아?”

“물론이지. 우리 함께 했었던 시간을 벌써 다 잊었어?”

바츠는 그에게 대답하며, 머릿속에 기억들이 인쇄된 종이처럼 한 장씩 스쳐 지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다퉜던 순간까지도 전부 흐뭇한 미소로 돌아왔다. 그가 물었다.

“...그렇군. 그런데 친구가 뭐지?”

바츠는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잠을 자는 것처럼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와 나.”

그는 그 대답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은 자리에 일어서고 나서야 떴다. 바츠는 그렇게 자세를 갖춘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에 마른 침이 삼켜졌다. 그가 이렇게 덩치가 거대한 줄 처음 느꼈다. 어릴 때 마주보고 섰을 때보다도 훨씬 크게 느껴졌다. 어쩌면 헤러티커보다도 더 거대한 것 같았다. 단순히 앉은 자리에서 올려다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네에 대해서 말할 때 튀어나왔던 독기가 그의 눈가에 고스란히 서려 있기 때문이 분명했다. 그는 그런 눈으로 바츠를 정확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가야겠다.”

바츠는 그가 그렇게 홀연히 떠나는 뒷모습을 붙잡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너무도 싸늘했다. 이곳에 온 이유조차도 묻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그냥 떠났다. 가이즈카의 사고로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느꼈던 분위기와 닮아있었다. 깊은 후회와 실망감이 틀림없었다. 바츠는 그가 왜 자신에게서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 그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올 때에야 비로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때마침 진동하는 아르크의 눈 때문에 뒤를 쫓지는 못했다. 아르크에서 온 메시지였다. 벨리타가 안전한 단말기를 구했다며 기쁜 마음을 전해온 장문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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