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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16화 (116/268)

< --   9. 하얀 감염   -- >         * 116화 *

벨리타는 지난번에 도와주었던 동료가 이번에도 역시 도와주었다고 했다. 그녀 덕분에 해적판 중고 단말기를 구할 수 있었다고 쓰여 있었다. 레벨1의 주민들이 밖에 나가 있는 가족들과 연락하기 위해서 웃돈을 얹어주면서까지 찾는 물건이었다. 가격을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큰돈이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물건을 공짜로 얻었다고 했다. 그 동료가 선물로 주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고장 난 부분을 직접 수리까지 해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벨리타를 도와준 동료의 이름은 브리안느였다. 레벨4에 거주하고 금발에 다정한 미소가 인상적인 여자라고 했다. 벨리타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보이면 설렐 만큼 아름답다고 말했다. 바츠는 그 대목을 읽으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다.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아주 잠시였다. 메시지 대부분이 그녀에 대한 칭찬으로 채워진 것을 보고, 금방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정말 친절한 사람인 것 같았다. 벨리타가 그곳에 적응하는 것을 굉장히 돕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벨리타의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브리안느의 이름을 넣어서 따로 그녀에 대한 인사말을 적어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바츠는 그녀에게 보내는 답장을 걱정 반, 그리움 반으로 채워 넣었다. 특히 거주지 출신에 따른 차별은 없는지에 대해서 우려하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물론 마지막에 브리안느을 향한 간단한 인사말도 잊지 않았다. 답장은 이번에도 바로 오지 않았다. 그녀가 바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허가받지 않은 물건을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답장이 늦는 것에 대해서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녀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것만으로도 너무 좋았다. 뒤늦게 케일리의 안부를 묻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기회는 또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며칠이 지났다. 혼자만의 시간이 계속 이어졌다. 근래에는 시장은 물론이고 샤오밍의 방문조차 없었다.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이제는 완전히 익숙했다. 축음기의 음악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저 따분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이렇게 평화롭고 태평해도 되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사이 시간은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새해에 바짝 다가섰다. 누군가가 찾아온 것도 그때쯤이었다. 아르크에서 메시지가 온 직후였다.

아르크에서 온 메시지는 벨리타가 아니었다. 새해 교류의 날을 맞이해서 경계 병력이 필요하니 헌터를 아무리 늦어도 마지막 날까지 한 명 보내라는 통보였다. 최근에 아이기스의 움직임이 주변에서 자주 감지가 되고 있으니 유의하라는 말도 덧붙여 있었다. 또한, 올해 미사 졸업생은 없다는 보고사항도 있었다. 3학년으로 진학한 5명 중 1명은 마지막 훈련 중 사망했고 2명은 자살했으며, 나머지 2명은 중간에 포기하고 군인이 되었다고 알렸다. 하지만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별도로 약간의 시간을 두고 뒤늦게 도착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역시나 아르크에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전달된 메시지였다. 교류의 날을 맞아 아르크로 방문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바츠는 소속 헌터들 모두에게 호출을 하기 위한 메시지를 보냈다. 간단한 설명도 곁들였다. 모두 넷에게 보냈지만, 돌아온 답변은 둘이었다. 레나타와 테라치였는데, 레나타는 거리상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테라치는 때마침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했다. 바츠는 레나타에게만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이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 그들은 시장과 샤오밍 그리고 셀레나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탓인지, 서로 나눈 인사가 생각보다 살가웠다. 하지만 바츠는 그들이 들이닥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왔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더그만 있었다면 군인 모두가 도시를 비우고 온 것이었다. 시장이 대표로 말했다.

“아르크에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도시에는 아르크와 연결된 단말기가 있거든요. 수신만 가능한 단말기죠. 아르크에서 아이기스의 움직임을 몇 차례 감지한 것 같더군요. 교류에 날 때문일 겁니다. 그것에 대해 상의하려고 왔습니다.”

바츠는 시장과 군인들에게 특별히 뭔가를 하려고 하지 말고, 도시를 지키는 데에만 주력하라고 말했다. 이어서 암흑기 동안은 주변 정찰이나 각종 시설물을 점검하는 빈도를 줄이고, 무리한 대응보다는 최대한 도시에 머물라는 당부도 했다. 그들이 정말 온다면, 평소보다 더 많은 무리를 지어서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목표는 도시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교역 장소를 습격하는 것일 테니, 불필요한 과잉 대응으로 공연히 이목을 끌 필요는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시장이 너무 소극적인 것이 아니냐고 불만스럽게 물었지만, 바츠가 자리를 비우고 아르크로 다녀오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금방 납득했다. 바츠는 물었다.

“지금 탄약이 얼마나 남았죠?”

셀레나는 6발이 남았다고 대답했고, 샤오밍은 한 발뿐이라고 했다. 바츠는 샤오밍에게 예전에 기지국에서 얻은 총알을 셀레나에게 건네주도록 지시했다. 샤오밍은 그제야 자신의 품안에 챙겨두었던 총알 두 발을 꺼내들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란 표정이었다. 바츠는 으스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애써 참아내고, 이번에 아르크에 가서 탄약을 비롯해서 각종 보급을 알아보겠다며 말한 뒤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틀 뒤 벨리타로부터 답장을 받았다.

‘차별이라면 정확히 무얼 말하는 거야? 대우가 다르다는 걸 말하는 거야? 그런 것이라면 잘 모르겠어. 아직은 신입이라고 일을 많이 주지는 않으니까. 대부분 옆에서 거드는 일을 해. 간단한 일을 옆에서 지켜보며 눈으로 배우거나 작은 일들을 대신 해주면서 말이지. 매우 쉬운 일이라 따분하기는 하지만,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차차 배워가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정말 중요할 때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뭐, 틀린 말 같지는 않아. 곱셈을 배우기 전에 덧셈을 배우는 그런 것인가 봐. 게다가 난 혼자 거든. 나 같은 경우는 흔치 않아서 정확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낯선 상황이라는 것은 같으니까. 전에 몇 명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어. 내가 말한 것들이 혹시 차별일까? 모르겠네. 사람들은 다 좋아. 다들 친절해. 사실 나도 약간은 걱정했거든. 레벨2 아이들이 레벨1 아이들을 못 살게 구는 걸 자주 봐왔으니까. 기분 나쁜 건 아니지? 미안. 어쨌든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했어.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어. 이래서 다들 레벨4에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모두 점잖고 친절해. 알게 모르게 서운하도록 만든다면, 아마도 관행 같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관리자들은 권위적이니까. 위에서 그걸 지키라고 압박을 줄 것 같아. 그래도 지금까지는 괜찮았어. 오히려 난 네가 더 걱정이야. 우연히 군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었는데, 헌터들은 밖에 나가서 미치지만, 집사들은 안에서 이미 미친 상태로 나간다고 하는 걸 들었어. 사실일까? 널 보면 전혀 믿기지 않아. 혹시 애니를 기억해? 뺨에 불에 덴 것 같은 흉터를 가진 아이 말이야. 그 아이가 했던 말들...사실이야? 그런 것 있잖아. 사람을 손쉽게 살해하고, 그걸 먹는 사람도 있고, 문란한 성생활에 각종 비정상 행위들...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같은 그런 것 말이야. 그게 정말 거기에서는 일어나고 있어? 그 아이가 과장된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면 너무 슬플 거야. 지상에 다녀온 군인이나 엔지니어들은 그저 위험하고 불쌍한 삶이라고만 하잖아.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행히도 벨리타에게 문제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름 씩씩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브리안느 같은 동료 선배들이 함께 있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바츠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조만간 직접 만나서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신이 났다. 케일리도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전진기지에 널린 헤러티커의 엄지를 5개나 가져다 줄 작정이었다. 벨리타와 케일리를 다시 보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테라치가 도착한 건 그 다음날이었다. 정확히 새해가 되는 날이었다. 조금 마른 것을 제외하고는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동쪽으로 열흘 거리에서부터 쫓아온 칼리에 녀석이 누군가를 만나는 걸 보았어. 상대는 여자 같았는데 잘 모르겠어. 그걸 건네받고 돌아가려던 것처럼 보이더군. 잡아서 확인해보니 그것이었어. 녀석이 자살하는 바람에 자세히 묻지는 못했다. 가슴 쪽을 주먹으로 치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버리더라. 남은 녀석들은 달아나 버렸어. 그걸 건네 준 여자도 놓쳐 버렸고. 근처로 달아난 녀석들 중 한 놈이라도 잡으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아쉽군.”

그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작은 쪽지를 건넸다. 손바닥 크기의 종이였는데, 원통형으로 돌돌 말려 있었다. 바츠는 종이에 적힌 글을 단 번에 고대어인 한글이라고 알아보았다. 반듯반듯 예쁜 모양새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읽을 줄 모르기 때문에 역시나 내용을 알 수는 없었다. 꽤나 중요한 것 같아서 창고에 가져다두지 않고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튿날 테라치와 함께 아르크로 향했다. 도시에 들러, 시장과 군인들을 모아놓고 근처에 칼리에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하라는 말도 전했다. 옆에 있던 테라치가 거들었다.

“남동쪽으로 언덕이 있을 거야. 그 근처에 잠시 몸을 숨길 가능성이 크다. 그 주변에는 크고 작은 돌들이 많으니, 시선을 피하는 데 아주 요긴하지.”

바츠는 그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샤오밍에게 혹시 모르니 그곳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는 스코프가 있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근접하지 않고도 멀리서 훑어볼 수 있었다. 발견 즉시 아르크로 알려달라고 했다. 언제든지 달려가 놈들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의심스런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칼리에요? 그럴 리가요. 거긴 칼리에나 아이기스 녀석들이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근처에 주요 시설물이 전혀 없거든요. 그래도 자주 정찰을 하는데, 방금 말한 언덕 때문입니다. 주변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거든요. 놈들이 그곳에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게다가 바로 어제도 군인들이 다녀왔습니다. 또 군인들을 보내는 건 괜한 낭비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위협이 되는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칫 군인들이 다칠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지난번에 무리한 대응을 하지 말고, 되도록 도시에 있으라고 지시하신 것도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아니셨습니까? 집사님도 아르크로 가신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아무리 빨리 달려온다고 하더라도, 놈들은 이미 자리를 떠나고 난 뒤 일겁니다.”

“됐어요. 그냥 시키는 대로 하세요. 샤오밍 부탁해요.”

바츠는 시장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단박에 잘라버리고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그가 여전히 오직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는 혹시 모를 사고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사고로 인해서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것을 겁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테라치가 가져온 쪽지의 정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 태도가 변할지 모르겠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 사이 시장은 시선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안해 했다. 모여 있던 군인들과 저쪽에서 지켜보고 있던 자신의 아들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민망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바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냉기를 풀풀 날리며 몸을 돌려세웠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매우 얄미웠다. 샤오밍이 일부로 언덕을 다녀와야겠다며 큰소리를 내는 것도 한몫했다. 샤오밍의 행동은 시장이 곤란한 상황에 노일 때마다, 기분을 더욱 즐겁게 만들었다.

테라치가 도시를 빠져나오며, 그런 바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제법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바츠는 괜히 발끈하며 말했다.

“저 사람은 당해도 싸. 뒤에서 험담이나 늘어놓는 욕심 많은 사람이거든.”

테라치는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느린 속도로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가 짐짓 이해해주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그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바츠는 그가 어떤 문제든지 감정적으로 반응을 했었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항상 냉담했다. 심지어 위로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이미 조금 전 일에 대해서 벌써 다 잊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먼 곳에 고정된 시선에 먼지만 날리는 말라버린 대지 같은 허전한 여유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비가 내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지상의 건조한 대지만도 못했다.

그가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한 상태였다.

“바츠, 사람들이다. 아르크에서 추방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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