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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17화 (117/268)

< --   9. 하얀 감염   -- >         * 117화 *

바츠는 서둘러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아르크에 가까워져 있었다. 아르크가 있는 볼록한 둔덕 뒤로, 높게 솟구친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옛 도시가 보였다. 버려진지 수백 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때의 형태를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드러난 표면이 흉물스러울 뿐이었다. 굵은 철근에 딱지처럼 눌어붙어 있는 콘크리트 위로, 검고 녹색 빛을 띄는 각종 선태류가 뒤덮여 있었다. 마치 사람이 비에 흠뻑 젖은 몰골로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10여명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르크에서 사용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짐을 가지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부둥켜안고 있었다. 서로를 다독이기 위해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외에는 다른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아르크를 멀찌감치 떠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보였다.

바츠는 그들과 제법 떨어져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놓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흡사한 그리고 근접한 경험을 했었던 터라, 자신의 교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애상에 젖어 매우 비관적인 상태일 것이다. 아르크에서의 추방으로 인한 충격보다는, 앞날에 대한 막연함이 전해주는 극심한 두려움이 신랄하게 괴롭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떠한 계획도 세울 수 없고, 함께 걷는 가족을 바라보면 눈물만 흐른다. 수없이 지상에 대해 들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그들 중에는 지상을 정말로 경험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버려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로인한 박탈감이 얼마나 모질게 괴롭힐지, 바츠로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 박탈감이 나중에는 분노로 변하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번듯한 옷과 방독면이 있다는 것이었다. 지상의 삭막함에 허무하게 굴복하지 않도록 해줄 물건들이었다. 지상에는 그것조차 없는 이들이 굉장히 흔했다. 그들도 그것을 아는지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껏해야 이제 서너 살쯤으로 추정되는 아이가 몇 번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걷고 있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항상 불어대는 가볍고 날카로운 바람을 처음 겪으며 혼란스러운 것일 수도 있었다.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테라치가 말했다.

“불쌍하군. 야인들이나 떠돌이들보다도 더 불쌍해.”

“왜? 아르크에게 버림받아서?”

바츠의 물음에 테라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야인들이나 떠돌이들보다도 더 빨리 죽게 되어서.”

바츠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서, 테라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의 시선은 아르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그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라고. 저들은 새것 같은 방독면과 옷가지 그리고 각종 짐들을 가지고 있어. 지상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일 걸? 칼맨을 만나거나 옛 도시에 정기적으로 들어서는 시장에 가져다주면 굉장히 쏠쏠할 거라고. 제 기능을 하는 방독면만 가져다주어도 프레이를 몽땅 내놓고 말거야. 운이 좋으면 인간의 어금니를 30개 넘게 받을 수도 있어.”

바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데도, 여전히 거리가 전혀 좁혀지지 않는 그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들은 아르크에서 계속해서 멀어졌고, 바츠는 아르크에 계속해서 가까워졌다. 기분이 묘했다. 플랫폼에서 엔지니어들의 발길을 지켜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작별이 아닌 고별을 바라보는 듯 했다. 테라치가 말했다.

“그런데 아르크가 저들에게 이별의 선물로 무엇을 주었을 것 같아? 날이 선 마체테? 아니면 탄창이 가득 찬 9mm 총이라도 구해줬을까? 기껏해야 일주일치 애니밀(Anymeal)이나 쥐어 주었겠지. 그래도 다행인 것이 뭔지 알아? 더 이상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일은 없다는 거지. 적어도 저들은 지상에서는 매우 깨끗한 상태일 테니까 말이야. 아직까지는 말이지.”

바츠는 테라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로를 부둥켜안는 모습이 그저 아르크와 영원한 이별을 슬퍼하고, 막막한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보려는 안간힘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아직 찾아오지도 않은 죽음을 벌써부터 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가엽게 느껴졌다. 하지만 테라치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모양이었다. 말은 안쓰러운 기색을 담아 늘어놓고는 태도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옆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는 칼바람을 본 것처럼 무심하게 시선을 거뒀다. 바츠는 이런 그의 태도가 익숙하면서도 쉽게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정말 그의 가슴에 감정을 끄고 켜고 할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면 한 번쯤 꾹 눌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아르크의 입구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르크의 입구는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가팔랐다. 적어도 경사가 40도는 돼보였다. 그나마 내려갈수록 안쪽으로 휘어들어가는 나선형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길을 따라 예닐곱의 무장한 군인들과 십 수 명의 내부 엔지니어들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내부 엔지니어들은 3명씩 조를 이뤄서 짐이 실린 수레를 옮기고 있었다. 캐터필러(Caterpillar) 위에 사각의 적재공간을 설치한 ‘스터퀼리니’라고 불리는 슬라이드형 수레였는데, 험지를 주행하는데 매우 요긴한 장비였다. 60도가 넘는 경사도 오를 만큼 힘도 좋았고, 무엇보다 앞뒤로 움직이는 적재공간이 지표면과 항상 평행을 유지하도록 설계가 되어있어서 옆으로 전복될 일도 없었다. 그들은 작은 조종 장치로 그것을 움직이고 있었다. 군인들은 그런 그들을 호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말끔한 제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무리의 중간쯤에 끼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단추가 많은 회색 제복 위로, 속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비닐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일리트시의 집사입니까?”

그는 언덕을 올라오자마자 바츠에게 물었다. 바츠는 그가 자신을 단 번에 알아본 것이 놀라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뒤쪽에 서 있던 테라치를 한 차례 훑어보더니, 조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다른 헌터들은 아직 안 온 모양이죠? 조금 늦네요.”

“저기 온 것 같군요.”

테라치가 바츠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바츠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저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는 두 명의 헌터가 나란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 명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게 컸고, 다른 한 명은 작고 아담했다. 상대적인 체형인터라 그 차이가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바츠는 둘을 단 번에 알아보았다.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걸음걸이와 더불어 체형만으로도 충분히 식별이 가능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둘은 버니에투와와 아델리나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델리나로 추정되는 작은 체형의 헌터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것으로 증명이 되었다.

“바츠!”

그녀 역시 이쪽을 알아본 것 같았다. 그녀는 단숨에 달려와 헤러티커가 덮치는 것처럼 바츠를 향해 몸을 날려 껴안았다. 바츠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녀가 신이 나서 흥분된 목소리로 늘어놓는 말을 들으며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그녀의 기분 좋은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빠르게 내뱉는 그녀의 말은 방독면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그 사이 테라치는 버니에투와와 가볍게 악수로 인사를 나눴다. 둘은 꼭 다투기라도 한 것처럼 냉랭한 분위기를 풍겼다. 항상 침착한 테라치 때문이 아니었다. 전과 달라진 버니에투와 때문이었다. 그는 여타 다른 헌터들처럼 굉장히 냉담해져 있었다. 뒤늦게 손을 내미는 바츠의 손도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잡아주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바츠의 목을 붙들고 매달려서,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뛸 정도로 기분이 좋아져 있는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관리자가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넷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뻔 했다.

“집사님은 바로 아르크로 가도록 하죠. 어차피 집사님이 할 일은 없습니다. 부사령관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바츠는 그때까지도 변함없이 즐거워하느라 바쁜 아델리나를 가까스로 떼어내고, 아르크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친구들에게 일이 끝나면 한 번씩 가족을 보고 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테라치를 빼고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버니에투와도 특별한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눈빛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델리나만이 그럴 작정으로 온 것이라고 소리 질러 대답했을 뿐이었다. 테라치는 차분하게 자신을 설명했다.

“난 바로 떠나는 걸로 할게. 아르크에는 내가 만날 만한 사람도 없어. 지난번에 놓친 칼리에 녀석들이나 찾아봐야겠어. 기분이 찝찝해.”

바츠는 언덕을 내려가며 조금 전에 서 있던 그곳을 두 번이나 돌아보았다. 근처로 이동을 했는지,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자꾸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조금 전 그 이상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넷이 함께 모였는데, 전혀 반가운 기색이 없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델리나만 신이 났을 뿐이었다. 테라치는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침착하고 감정 표현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르크에 더 이상 가족이 없다는 것이 한몫했다.

바츠는 그를 이해했다. 오히려 미안했다. 그가 자신의 말로 괜한 상처를 받지 않았길 바랐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버니에투와였다. 그에게서는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분명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언덕을 내려가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뒤늦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시선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그가 너무 걱정됐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플랫폼을 지나 샤워장을 통과하는 바람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뿌연 소독 액을 한껏 뒤집어쓰고, 아르크 내부로 향하는 걸음에 뭔가 대단한 감동이 느껴졌다. 레벨1에 발을 내딛는 것이 무려 1년만이었다. 다른 헌터들이나 일부 엔지니어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뀔 일이었지만, 감정에 복받쳐 속이 울렁거렸을 정도였다.

“어서 오시오.”

안으로 들어서자, 앞에는 부사령관을 비롯해서 대여섯의 관리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츠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바츠는 방독면을 벗으며 그들의 환대에 보답했다. 옅은 미소를 의식적으로 입에 걸고, 그들이 내미는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그들의 환한 미소가 부담스러웠지만, 깊이 들이마시는 내부의 공기가 전해주는 청량감에 그런 감정은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었다. 밖의 공기가 더 가볍고 산뜻한 느낌이었지만, 늘 방독면을 착용하고 있거나 퀴퀴한 전진기지에만 머물러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부사령관이 그런 바츠를 지켜보며 말했다.

“안심하게. 이곳의 공기는 깨끗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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