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 하얀 감염 -- > * 118화 *
바츠는 그의 목소리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체했을 때, 등을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길 같았다. 케일리에게 주기 위해 가져왔던 헤러티커의 엄지를 이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그가 물었다.
“전진기지에서 생활은 어땠나? 괜찮았나? 아르크와 달리 불편이 많았겠지?”
그의 목소리는 바츠가 미사에서 보았을 때의 기억과는 전혀 달랐다. 꽤 오래전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고압적인 태도로 매우 쌀쌀맞았던 것으로 기억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 친근한 어조였다. 심지어 최대한 존중해주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바츠는 따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웃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처음 낯설음으로 조금 긴장했었던 것 말고는 큰 불편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마저도 쉽게 적응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아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심각한 굶주림은 없었고, 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적도 없었다. 오히려 더 편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롱거리가 되거나 소외감을 느낄만한 푸대접은 없었으니 말이다. 모르겠다.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기억이 왜곡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평할 거리를 지금 당장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혼자서 끄덕이고는 말했다.
“듣자하니 꽤나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것 같던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더군. 몸 생각도 하는 편이 좋네. 갑작스런 변화는 항상 탈이 나는 법이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가?”
그가 한쪽 눈썹을 꿈틀하며 장난스런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부로 뒤늦게 걸음을 옮기는 바츠를 위해 두 번째 걸음을 첫 번째 걸음보다 훨씬 천천히 내딛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놓치지 않고 능숙하게 걸음을 맞췄다. 그와 나란히 걸으며 한 차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에 섰던 관리자들은 그 뒤를 줄줄이 따랐다.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 엿보였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금방 얼굴에서 지워내고 바츠와 부사령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부사령관은 바츠를 레벨5로 안내했다. 레벨1에서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밑으로 이동했다. 바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조금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나 테라치를 비롯해서 아델리나, 버니에투와 그리고 지훈과 함께 사령관을 만나보겠다고 레벨5로 몰래 가려다가 혼쭐이 났던 기억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때는 정말 아찔할 만큼 겁에 질렸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 생각하니 즐거운 추억이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훈의 안부가 궁금해졌을 정도였다. 그는 미사훈련소의 3학년으로 승급에 실패했으니, 군인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빼빼마른 그가 소총을 들고 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여전히 골치 아픈 이야기도 늘어놓고 다니는지 궁금했다. 부사령관이 그런 바츠를 의아하게 지켜보다가 물었다.
“지금 일리트시에 주민이 모두 몇인가?”
바츠는 그가 자신이 웃는 이유에 대해서 물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입에서는 튀어나온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57명입니다.”
“더 줄었군. 그들을 보호하는데 지금처럼만 계속 힘 써주시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그들 모두 언젠가는 아르크에서 지내야 할 사람들이오.”
망설임 없는 바츠의 대답에 그가 가르치듯 일러주며 당부했다. 바츠는 괜한 자격지심에 조금 차갑게 대꾸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다 받으면 되지 않나요?”
부사령관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선물로 받은 음식이 전혀 입맛에 맞지 않을 때나 나올 법한 표정이었다.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한쪽 검지를 장난스럽게 내두르며 입가에 미소를 활짝 걸고 말했다.
“음, 재밌어. 정말 재밌군.”
그가 연설 중 중요한 대목을 읽는 것처럼 음절을 끊어서, 매우 딱딱하고 인위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관리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들 역시 그것을 느낀 눈치였다. 하지만 애써 개의치 않고, 부사령관이 웃음을 멈추고 시선을 다시 바츠에게로 고정할 때까지 계속 웃었다. 부사령관이 말했다.
“그건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자네를 부른 이유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아직 여장도 제대로 풀지 않았지 않나?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하네.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하세. 안 그런가?”
그가 말은 바츠에게 했지만 묻는 건 관리자들을 향했다. 관리자들은 이미 언질이라도 있었는지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으로 그의 동의를 수긍했다. 마치 녹음된 기계들 같았다. 바츠는 그들을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은 정말 이상했다. 자신들의 주장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자 부사령관이 화제를 급히 바꿨다. 바츠의 불편한 기색을 느낀 눈치였다.
“이번에 온 헌터들이 모두 자네와 함께 미사를 졸업한 학생들이라는 건 아는가?”
바츠는 그의 질문에 대답은 않고, 관리자들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시선을 그의 얼굴로 옮기기만 했다. 친한 친구들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바츠의 머릿속을 읽었는지, 용케 알아듣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헌터들은 처음 지상으로 나간 이듬해, 꼭 한 번 돌아오고는 하네. 모두가 그러더군. 항상 말이네. 이듬해에 꼭 돌아오더군. 별다른 호출이 없었더라도, 이번 헌터들 역시 분명 그랬을 것이네. 그들이 전부 모이게 된 것이 절대 운이 좋아 그렇게 된 것이 아니란 말이네. 그런데 재밌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최근 수년 간 교역을 위해 각 전진기지마다 헌터들을 보내라는 통보가 있기 시작한 뒤로, 새해가 가까워지면 앞선 헌터들이 아르크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다는 것이네. 의도적으로 말이야. 재밌지 않나? 일종에 그들만의 배려네. 자신들이 방문하게 되면, 아르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헌터들에게 돌아올 명분이 사라져 버리니까 말이야. 물론 미리 고지를 한다면 누구나 돌아올 수 있네. 하지만 사람이 또 그렇지 않은가? 괜히 눈치가 보이고 하는 그런 것 말이네. 일종에 자존심일 수도 있겠군. 생각해보면 그들이 돌아오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하네. 평생 머물던 곳을 갑자기 떠나게 되었는데 얼마나 그립겠나?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아마 그렇다면 감정이 없어야만 할 것이네. 시간이 더 흐르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무뎌진 다음에야 어찌되든 상관없지만 말이야. 그때가 되면 오히려 이쪽에서 몇 번씩 호출을 해야만 하게 되네. 정말 난감한 일이지. 각 전진기지의 집사들에게 부탁하는 게 훨씬 빠른 지경이네. 집사들 말이라면 부리나케 달려오거든. 그때가 되면 그들은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는 하네.”
바츠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 의도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헌터들을 비하하는 것 같아 기분만 나쁠 뿐이었다. 그의 발언이 헌터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들렸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애써 바츠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게. 그들의 희생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니 말이야. 그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네. 그들은 진정한 아르크의 열사들이네.”
바츠는 그에게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으로 굴뚝같았으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말을 잇는 바람에 기회를 놓쳤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집사지. 무슨 말인지 아는가? 집사는 아르크의 기둥이라는 말이네. 집사가 무너지면 헌터들은 갈 곳을 잃게 되지.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집사는 아르크의 존망을 결정할 수도 있을 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네.”
바츠는 그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었다. 그는 진심으로 집사와 헌터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 전 느꼈던 불쾌감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도 바츠의 이런 마음을 읽었는지, 입술을 꾹 다물며 한 손을 바츠의 어깨에 올렸다. 자신의 의도가 제대로 전해졌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바츠는 어깨에 올려 진 그의 손이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꽤 힘이 들어간 손길이었다. 그가 금방 거둬 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여운이 계속 남아있었다. 동시에 가슴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분노나 증오 같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레벨5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경쾌한 단음의 알림음이 엘리베이터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적으로 무거워진 분위기를 단번에 환기시켰다.
부사령관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가장 먼저 걸음을 내딛었다. 바츠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내렸고, 관리자들은 그 다음이었다. 부사령관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거대한 홀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홀과 연결되어 여러 군데로 갈라진 통로 중, 군인 둘이 지켜서고 있는 통로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부사령관이 눈치를 주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같았다. 그나마 가끔 그들끼리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으나, 고작해야 한두 마디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도 너무 작게 속삭여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내내 조용했다.
군인들이 지켜서고 있는 통로는 입구 위쪽에 아르크의 표식인 노란색 말발굽 모양에 두 자루의 검이 교차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부사령관은 문장이 힘과 행운을 상징한다고 말하며, 통로로 들어섰다. 3명이 나란히 걷기에 충분한 통로가 직선으로 20여 미터쯤 이어져 있었다. 바츠는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관리자들의 침묵에 전염이라도 되었는지, 입술이 무거웠다. 하지만 관리자들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입구에 멈춰서며, 부사령관과 바츠만 떠나보냈다. 그들은 그대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재미있는 것은 부사령관 역시 뒤늦게 침묵이 옮았는지, 통로를 지나는 동안 특별한 말이 없었다. 둘의 발자국소리만 메아리쳤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그 끝에 다다랐을 때였다. 아르크의 표식이 중앙에 거대하게 그려져 있는 문 앞이었다. 그가 조롱하듯 장난스런 말투로 말했다.
“이제 이곳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레벨6이네. 미리 말해두는데, 너무 놀라지는 말게.”
그가 오랜만에 입가에 미소를 걸며 우측 단말기 화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댔다. 그러자 눈앞에 문이 반으로 나뉘며 갈라지더니, 빠르게 좌우로 사라져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츠는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진 문도 나름 신기했지만, 그 뒤로 나타난 모습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신기해했다. 대단히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방금 걸어온 통로와 똑같은 통로가 계속 이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거리가 절반쯤으로 짧았다. 하지만 통로의 양옆이 투명한 벽으로 되어있었고, 그 안쪽에 각종 기계와 감시 장비들 그리고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이 하나같이 검은 옷에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사령관이 멍하니 그들을 살피는 바츠의 어깨를 살며시 잡아당기며 말했다.
“맞네. 모두 헌터들이네. ‘지야라’라고 불리는 자살 여행을 떠나지 않은 헌터들이지. 물론 그들의 선택은 용감하지. 하지만 이렇게 아르크로 돌아와서 이곳을 지키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바츠는 부사령관의 손길에 이끌려 통로를 지나며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다. 대부분이 중년을 훨씬 넘긴 사람들이었다. 간혹 몸이 불편해보이거나 신체 일부가 없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하나 허리춤에 카니지를 지니지 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헌터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통로를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조명이 붉은 색으로 변하더니, 단음의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유리벽 너머의 헌터들이 부리나케 움직이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고, 통로의 바닥과 천장에서는 순식간에 튀어나온 자동소총들이 부사령관과 바츠를 향해 겨냥되었다. 바츠는 느닷없는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부사령관의 손길을 거칠게 털어내고는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부사령관이 당황한 얼굴로 애써 침착하기 위해 노력하며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진정하게!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네. 금방 해결될 테니 잠시 기다리게. 금방이면 되네.”
그는 자신이 훨씬 놀랐다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츠를 안심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는 양손을 어깨 높이로 들고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이들과 눈으로 대화하며, 혼자서 끝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츠는 불안한 마음에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 유리벽 너머에서,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는 것처럼 마구 털어대며 움직이지 말라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어느새 저만치 걸어간 부사령관도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잠깐만 기다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목소리가 극심한 긴장으로 떨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바츠는 찝찝했지만 그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온 자동소총들이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수십 발도 발사할 것 같았다.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죽음을 면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공간도 너무 협소했다. 그 사이 부사령관은 통로 끝에 연결된 문을 통해 왼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그들과 뭔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말하는 그의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지금 상황이 매우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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