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얀 감염-119화 (119/268)

< --   9. 하얀 감염   -- >         * 119화 *

“아, 들립니까?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별 일 아닙니다. 옷에 이물질이 많이 묻어있군요. 센서가 그것을 감지하고 당신을 오염원으로 인식했습니다. 지금 상황은 오염원이 레벨6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비상조치가 자동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놀라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중앙에 앉아서 부사령관과 한동안 대화를 주고받던 사내가 앞에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말했다. 그 역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는지, 긴장감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마도 잔뜩 볼멘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부사령관 때문일 공산이 컸다. 바츠는 유리벽을 통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이러스입니까?”

이미 이곳까지 오는 동안 프로버에 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따금씩 오작동을 일으키고는 하는 터라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 중에 한 번은 직접 경험하기까지 했다. 다행히도 대답은 비교적 빠르게 돌아왔다. 방금 전 방송을 했던 그가 한 눈에도 흥분했다는 것이 보이는 부사령관의 격한 움직임과 목소리를 다시 듣고 있다가 좀 더 차분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병원균은 아니고...음...혈액으로 보이는 군요. 천천히 뒤로 물러나서 방독면을 다시 써주겠습니까?”

바츠는 그의 지시를 따랐다. 딱히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부스 안에서 사람들에게 한참동안 성화를 내던 부사령관마저도, 손바닥이 보이도록 가슴 높이로 들어 올린 양손을 바닥을 향해 까딱이며 지시를 따라달라는 수신호를 보내왔다. 바츠는 정지 신호를 보내 올 때까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방독면을 뒤집어썼는데, 갑자기 바닥에서 하얀 벽이 솟구쳐 올라오더니 사방을 둘러쌌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부딪히고는 황급히 몸을 돌려세우기까지 했다. 또 한 번 검에 손을 가져갔을 정도로 놀랐다. 게다가 완전히 둘러싼 하얀 벽으로 인해서 밖을 확인할 수가 없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조금 전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옷에 묻은 혈흔을 모두 닦아낼 겁니다. 샤워장처럼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소독액과 매우 흡사한 액체들이 사방에서 뿜어져 나왔다. 지상에서 보았던 폭우만큼 엄청난 양이었다. 바츠는 그 액체에 흠뻑 젖기 시작하자 생각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마구 뿌려지는 희뿌연 액체에 흠칫 놀랐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몸이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반응한 듯 했다. 다음에는 그 액체가 몸을 적시고 흐르는 것에 주목했다. 긴장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액체가 몸을 타고 흐르는 것에 집중했다. 특히 팔을 타고 내려가 손끝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괜히 마음이 울적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은 멍해지고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중간에 벨리타와 케일리가 떠올라 우울한 기분을 금방 떨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둘을 아직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좀 놓였다. 그들에게 썩은 비린내를 풍겼을 것을 생각하면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둘에게는 지상의 그 어떤 흔적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적나라한 현실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지상은 진한 회색빛 하늘만큼이나 암울했다.

그 사이 뿌려지던 액체가 전부 쏟아졌는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고인 액체가 참방거릴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밀폐되었다고 느낄 만큼 꽉 막힌 공간에서 강풍이 불어오는 것이 신기했다. 불어오는 바람이 물기를 머금고 벽과 바닥으로 흩어졌다. 몸에 묻은 물기를 억지로 잡아떼고 있었다. 그리고 물기가 그렇게 전부 떼어지자, 바람은 멈추고 하얗던 벽이 푸른색으로 일시에 변했다. 점점 진한 색으로 변하더니 나중에는 약간의 온기마저도 느껴졌다. 손끝을 가져다대봤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느껴지는 온기가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벽과 바닥에, 흩날리거나 고인 액체가 차츰 건조되어가며 사라지는 걸 보면 착각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액체들이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심지어 바닥에 고인 액체까지 말라가고 있었다.

“자,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쏟아져 내린 액체들이 전부 사라진 뒤였다. 액체가 흘러나온 사실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했다. 애초에 뿌려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얼룩조차 남지 않았다. 동시에 주변을 둘러싼 벽들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조명도 본래대로 돌아와 있고, 자동 소총들 역시 전부 사라진 통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바츠는 정면으로 보이는 통로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마이크로 이야기하던 그가 유리너머에서 앞으로 가도 좋다는 손짓을 연신해주었다.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통로의 끝에는 부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바츠가 다가오자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했던 말이 다 무안하군. 그런 의미가 아니었네.”

바츠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차례 으쓱했다. 놀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의도한 것도 아니었고, 엄밀히 따지자면 자신 때문이었던 터라 오히려 사과를 해야 할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렇게 없었던 일처럼 자연스럽게 넘기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그 역시 동의를 하는지, 더 이상 방금 전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갔다 온 부스 맞은편을 향해, 간단한 신호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지나쳤던 문처럼 좌우로 갈라지며 옆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바츠는 그 뒤로 나타난 광경을 보며, 놀라지 말라고 한 부사령관의 당부는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것이었음을 느꼈다. 문 뒤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시선을 빼앗긴 정도가 아니었다. 눈을 깜빡이는 것을 잊을 정도로 넋이 나가기 충분했다.

일반학교에서 낙원이라는 것을 배운 적이 있었다. 푸른 풀밭이 끊임없이 펼쳐지고, 솔바람이 불며 하늘은 파랗고 물은 투명한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크고 작은 초식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작은 새들이 서넛 씩 떼를 지어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전혀 이질감이 없는 도회적인 건축물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단순히 설명으로만 들었던 것이 아니라 사진과 영상으로도 보았었다. 수백 년 전 지상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수백 년 전 낙원이 지금 막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사진과 영상으로 보았던 모습과 똑 닮아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그저 화면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혹은 레벨5에서 견학을 통해 표본만 확인할 수 있었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들이 전부 현실이 되어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허, 내가 말했지 않나, 놀라지 말라고.”

바츠는 옆에서 너스레를 떠는 부사령관의 얼굴을 향해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러자 자부심이 묻어나는 우쭐거리는 표정에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레벨6에 온 걸 환영하네!”

부사령관이 자신의 손을 눈앞으로 펼쳐지는 낙원을 향해 쭉 뻗었다. 바츠는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다시 보아도 믿기지 않았다. 저 멀리 녹색 나무가 빼곡한 산도 있었고, 그 중간쯤에 수직으로 낙하는 거대한 물줄기도 있었다. 특히 그 물줄기 앞에 아치형으로 그려진 알록달록한 신기루는 훔쳐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이 들게 할 만큼 너무도 아름다웠다.

“이리로 오게.”

부사령관이 넋을 놓고 둘러보는 바츠를 옆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타원형에 가까운 둥그스름한 기계가 있었는데, 지상에서 보았던 자동차와 매우 흡사했다. 전방은 투명한 유리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고, 좌우에는 바깥쪽으로 열리도록 되어있는 작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제작되어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계를 운반할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퀴라든가 궤도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부사령관의 손길에 이끌려, 안쪽에 마련된 자리에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야 했다.

“내 집으로 가게 될 것이네. 그곳에서 여장을 풀도록 하게.”

그가 환한 미소로 말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둘 사이에 놓인, 액정으로 보이는 사각 화면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갑자기 기계가 떠밀려지듯 위로 붕 떠올랐다. 적어도 30cm이상 허공으로 날아오른 듯 했다. 바츠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을 각각 따로따로 움직이며 움찔해야 했다. 이미 비클레타를 경험해보고도 놀란 자신의 모습에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크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사령관이 편안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준 것도 나름 도움이 되었다.

그는 바츠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자, 사각 화면 밑에 준비되어있던 구부러진 금속을 집어 들었다. 폭이 좁은 길쭉한 모양의 밴드가 휘어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는 그것을 양끝이 귀밑을 향하도록 자신의 뒷목에 걸었다. 그러자 그 금속이 그의 뒷목을 움켜쥐듯 조여들며 꾹 달라붙었다.

바츠는 그것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정면을 바라보고 잠시 멍하니 눈을 떴다가 돌아보는 사이, 기계가 빼곡한 풀밭을 가로질러 쭉 이어진 매끈한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하면서 물어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도 전에 또 다른 놀라운 일이 연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기계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종관으로 보이는 것이 부사령관의 가슴 앞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정작 기계는 혼자서 움직이고 있었다. 금속으로 보이는 광택이 흐르는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크게 놀랄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두 배 가량 빨라보였다. 하지만 허공에서 둥실거리는 느낌은 바츠를 긴장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부사령관이 바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르크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 레벨5로 알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건 틀리네. 가장 넓은 곳은 레벨6이네. 100여 가구가 교육, 쇼핑, 의료는 물론이고 각종 여가시설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네. 심지어 바다와 해변도 있지. 레벨5도 길을 잃기 쉬울 정도로 넓지만 이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그가 흐뭇한 목소리로 레벨6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바츠는 가까운 쪽 투명한 유리를 통해 밖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드문드문 늘어선 집들과 그 앞 풀밭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과 도로 옆을 걷는 사람. 또, 집 앞 풀밭에 물을 뿌리고 있는 사람과 근처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하는 사람까지 모든 것이 신기해보였다. 전혀 다른 환경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입고 있는 옷들이 다른 레벨의 유니폼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모두 달라보였다. 어쩌면 그들이 짓고 있는 표정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매우 밝았다. 심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혼자서 종이책을 읽고 있는 사람마저도 웃는 얼굴로 보였다. 바츠는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느라 그리고 처음 보는 환경을 훑어보느라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눈이 열 개라도 부족하다고 느꼈을지 모를 만큼 무척 바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사령관은 바츠의 뒤통수에 대고 레벨6에 대한 자랑을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물론 바츠는 그것들을 전혀 듣지 못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