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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20화 (120/268)

< --   9. 하얀 감염   -- >         * 120화 *

바츠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옆에서 이것저것 설명해주는 부사령관의 목소리 사이로, 저 멀리 안쪽으로 작은 언덕 위에 지어진 집을 발견했을 때였다. 이곳의 집들은 대부분 유사한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높이는 2 ~ 3층이었고 맨 꼭대기 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의 외곽이 검은 유리벽으로 되어있었다. 출입구로 보이는 곳만 투명하거나 불투명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집만 유일하게 외곽의 벽이 검은 유리가 아닌 투명한 유리로 되어있어서 눈길이 끌렸다. 특히 현관으로 보이는 곳에 마주보고 선 두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각각 중년의 끝자락으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이었는데, 유리로 만들어진 여닫이문 안쪽에 선 여성은 바람이 불면 좌우로 크게 휘날릴 법한 하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바깥쪽에서 마주보고 선 남성은 예장용에 가까운 하얀색 정복을 입고 있었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대체로 의사가 제대로 오가는 듯 했다. 서로 상대가 이야기할 때마다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며 호응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바츠의 시선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그들의 집과 둘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남자의 손에 들린 검은 옷가지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20m쯤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계속해서 이동 중이었던 터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두 눈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건 분명 헌터의 옷과 망토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뒤늦게 남자의 허리춤에 카니지로 보이는 검도 있었던 것 같았다. 바츠는 시선을 그들을 향해 그대로 두고는, 그때까지도 뒤통수에 대고 혼자서 떠들고 있던 부사령관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 본 그들 말인데요. 그들 전부 진짜 헌터가 맞나요?”

부사령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는지, 대답 대신 의문이 담긴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츠는 그런 그를 위해 다시 한 번 물어야 했다. 시선은 여전히 그가 아닌 밖을 향해 있었다.

“조금 전 통로에서 좌우로 나뉜 부스 안에 있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들이 모두 헌터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들이 정말 모두 헌터가 맞느냐고 묻는 겁니다.”

바츠는 말을 끝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바츠의 얼굴을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빼내 바츠가 보고 있던 창밖을 요리조리 살폈다. 여전히 질문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결국 찾아냈는지, 표정을 환하게 바꾸며 말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군,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들의 모습이 낯선 것이로군, 그렇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할 만 하네.”

그가 집 앞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년의 남녀를 발견하고는, 기웃거리는 눈초리를 떼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말도 많고, 말투도 친절하지? 무엇보다도 지상에서 보았던 그 냉정한 모습들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놀라울 것이네. 사실 나조차도 놀라우니, 자네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신기한 일은 아니네. 그들이 이곳에 있든, 그곳에 있든 결국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물론 밖에서 돌아온 헌터들이 바로 적응을 하는 것은 아니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겉돌고 말더군. 변한 환경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지. 특히 지켜야할 규율이 생긴 것에 대해서 매우 힘들어하네. 재밌지 않나? 사실 그들도 이 안에서 살았던 사람들인데 말이야. 그런데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더군. 지상에서 그들이 누렸을 자유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지. 그들은 지상에서 법 그 자체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과 경험이 곧 규율이었겠지. 그건 대단히 강력한 힘이야. 누군가의 신념을 공고히 지킬 수도 있고, 완전히 부숴버릴 수도 있지. 그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아는가? 게다가 그들에게는 실체가 있는 막강한 무력까지 있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이유네. 가끔은 그들이 헤러티커보다도 더 무섭다고 느껴지지. 통제력을 잃고 날뛴다고 생각을 해보게. 그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네.”

바츠는 그가 마지막에 자신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묻는 말에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자신 역시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는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처음과 다르게 말이 끝나갈 쯤에 말투는 내던져지듯이 가벼워졌고, 표정에는 장난기가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는 듯 보였다. 마치 그가 그들을 천대한다고 느껴졌다. 특히나 입가에 내걸린 미묘한 미소가 그렇게 만들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느낀 감정이 오해라고 그가 말하길 바랐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에 가까운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말했다.

“농담이네, 농담. 그래서 자네 같은 집사들이 있는 이유가 아닌가? 그들의 그 막강한 자유가 아집에 사로잡혀 독선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야. 어쨌든 이곳에 돌아오게 되면 상대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들 좋아지네.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일단은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다는 뜻이니 말이네. 아마 ‘지야라’를 떠나려는 헌터를 강제로 잡아둔다면 그 우려가 현실이 될지도 모르지. 그들이 가진 자부심은 대단하지 않은가? 자네 역시 집사로서 자부심이 대단하겠지? 자신은 물론이고 아르크를 위한 헌신을 정당하다 생각하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바츠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대답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이미 대답을 결정지어놓고 있었다. 그것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의사를 존중해주는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츠는 이미 이런 경험이 있었다. 그때도 호락호락 요구에 응하지 않았었다. 이제 와서 다를 것 없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초조함이 스치고 지났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바츠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장로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그때까지 혼자서 잘 나아가고 있던 기계가 갑자기 멈춰서며 깜짝 놀라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느닷없이 멈춰서는 기계 때문에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전방의 유리를 뚫고 밖으로 내던져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압박감을 느낄 만큼의 속도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강력한 마찰력에 의한 관성이 매우 컸던 탓이었다. 옆에서 마주보고 있던 부사령관이 짧은 비명을 질렀을 정도였다. 다행인 것은 놀란 것만큼의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몸이 앞으로 쏠리며 튀어나가는 것을 느꼈지만, 정작 몸은 처음 그 자리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생각대로라면 적어도 앞 유리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어야 했는데, 놀랍게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추스르고 고개를 밑으로 내리자, 복부를 중심으로 신체 대부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하고 끈적한 액체에 뒤덮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점성이 매우 강한 액체였다. 이것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옆자리의 부사령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점성이 강한 투명한 액체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가 조금 흥분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 초조함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애써 바츠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는데, 동그랗게 뜬 눈과 잔뜩 굳어진 얼굴은 아무런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 했다.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안전하네. 그냥 잠시 기다리면 된다네.”

바츠는 이미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지만 그의 노력이 가상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목에도 눌어붙은 점성의 액체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가 알아들을 정도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옮겨 전방의 유리를 통해 앞을 살폈다. 그러자 그 앞에는 성인 절반 정도 되는 크기의 네 발 짐승이 떡하니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긴 얼굴에 머리 꼭대기에는 끝이 손바닥처럼 생긴 한 쌍의 뿔이 자라 있었고, 몸통은 회갈색의 비교적 짧은 털과 흰색 반점이 보였다. 바츠는 그 짐승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지만 막상 이름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짐승의 이름이 머릿속이 아니라 입가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답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부사령관이 용케 눈치 채고 대신 그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아도,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맞네, 사슴이네.”

앞을 가로막은 사슴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지, 태평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뚱한 표정으로 엄지손톱보다 좀 더 큰 크기의 변을 도로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츠는 다시 시선을 부사령관에게로 옮겼다. 부사령관 역시 그 모습을 멍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뒤늦게 바츠의 시선을 느끼고는 민망한 표정으로 애써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정면을 향해 눈치를 주었다. 바츠는 그의 눈치를 쫓아 시선을 또 한 번 옮겼다. 그러자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를 작은 기계들이 사슴이 볼 일을 보고 유유히 떠난 자리를 수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빌리캄과 꼭 닮은 것들이었는데, 관절이 있는 세 쌍의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다리를 이용해 평소에는 주변을 배회하다가 이렇게 문제가 생긴 곳으로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 중 하나가 사슴의 변을 밟지 않기 위해 주의하며 움직였다. 그리고는 사슴의 변을 몸통 밑에 두고서더니, 이내 관절을 접고 그 위로 내려앉았다. 마치 손가락을 구부린 손으로 등에 대고 꿈틀대는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일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사슴의 변은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뒤였다.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던 부사령관이 말했다.

“이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려서 걷도록 하지. 플라우스트러가 다시 움직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네. 이렇게 돌발 상황이 일어나면 작동이 정지 되네.”

그가 문을 열고 도로로 내려섰다. 바츠는 그제야 몸을 뒤덮었던 그 점성의 액체가 전부 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끈적한 액체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무릎 근처에 얇게 벗겨진 피부나 거미줄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극소량 남아있을 뿐이었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손가락을 이용해 비벼보니, 점성은 전혀 없고 가루가 되고 먼지가 되어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바츠는 신기한 나머지 좀 더 그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어느새 뒤를 돌아온 부사령관이 문을 대신 열어주며 내릴 수 있도록 손을 잡아주는 바람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플라우스트러에서 내려서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하나 둘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부사령관이 다치지 않았는지, 상태를 멀리서부터 물어오며 다가왔다. 부사령관은 바츠를 안에서 꺼내주는 와중에도 그들을 향해 일일이 대꾸하며 호응해주었다. 바츠가 일리트시에서 주민들에게 대하는 것과 매우 흡사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부사령관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플라우스트러에서 뒤늦게 내려서는 바츠에게도 몰려들었다. 그들의 시선은 부사령관을 바라보던 것과 다르게 걱정 말고도 다른 여러 감정이 묻어났다. 너무 복잡해서 어떻게 읽어낼 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아까 보았던 하얀색 정복을 입은 남자도 있었다. 그가 다가와 부사령관에게 말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뒤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부사령관에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바츠를 흘깃거렸다.

“고맙네. 아, 이쪽은 일리트시의 집사시네. 인사하게. 언젠가 우리 이웃이 될지 모르니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정말 영광이군요. 집사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척 반가울 것 같습니다.”

부사령관의 너스레에 그가 미소로 화답하며 바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츠는 그의 손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잡았다. 그의 눈빛이 부사령관과는 다르게 거짓이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츠는 이상하게도 그의 태도가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단순히 순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진심을 늘어놓을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을 바라보며 위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 같았다.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면식이었다. 부사령관이 그것을 느꼈는지, 에둘러 말하며 그를 떼어냈다. 그때까지도 그는 부사령관의 의도를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보였다. 부사령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서운하게 생각하며 아쉬운 기색이나 드러냈다. 그렇다고 따로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부사령관이 바츠를 이끌고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한 까닭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바츠는 부사령관에게 그가 왜 자신을 보며 위안을 느꼈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부사령관이 먼저 입을 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이곳에서 헌터들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겠지만 치안을 담당하네. 보통은 매뉴얼을 따라 행동하지만, 모두 중앙통제실의 지시를 따르지. 중앙통제실은 사령관을 비롯해서 나를 포함한 5명으로 구성된 의회로 조직되어있네. 그곳에서 이곳은 물론이고 아르크 전반에 걸친 계획을 수립하네. 모든 것을 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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