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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21화 (121/268)

< --   9. 하얀 감염   -- >         * 121화 *

부사령관은 자신이 지금 말하는 중앙통제실과 레벨5에 위치한 통제실과는 전혀 다르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레벨5에 위치해 있는 통제실은 관리자들이 주가 되어서 내부와 외부의 모든 일에 관여하고 처리하지만, 중앙통제실은 그런 그들에게 방침을 내리고 보고받는 위치라고 말했다.

바츠는 걷는 내내 자신에게 설명을 하는 그의 말보다는 도로 옆을 나란히 흐르는 시냇물에나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 깊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시내였다. 깊이는 기껏해야 발목 정도였고, 폭은 한쪽 팔 길이 정도에 불구했다. 하지만 바닥이 보일정도로 매우 투명했고, 서넛 씩 짝을 이뤄 꼬물거리고 있는 검지 크기의 물고기도 보였다. 실제로 흐르는 물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매우 신기했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누구나 추측해볼 수 있는 중앙통제실이나 레벨5의 통제실에 차이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유익했다. 하지만 부사령관은 바츠가 자신을 외면하고 엉뚱한 곳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꿋꿋이 이어갔다. 플라우스트러에서와 똑같았다. 바츠는 새로운 것들을 구경하느라 바쁘고,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데 바빴다. 그런데도 그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듣지 않는 것을 더 바라는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 무심하게 자신의 말만 이어갔다.

“사실 아르크에 있는 엔지니어들은 다 가짜라고 할 수 있네. 진짜 엔지니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있지. 그 수가 얼마 되지 않네. 이곳에 있는 교육기관에서 특별한 교육을 통해 육성되고 있지. 이곳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 교육을 받네. 그리고 그들이 아르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네. 그들이 저런 것들을 만들지.”

부사령관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는 바츠의 관심을 끌기위해, 말을 마치며 한쪽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바츠는 그가 귀찮게 군다고 느껴져 못마땅했지만, 애써 그 감정을 참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가 한쪽 허공을 반대쪽 손으로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원형에 가까운 검은색 물체가 있었다. 시선을 조금만 움직여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어지간한 교목보다도 훨씬 높은 곳에 떠 있었다. 너무 멀어서 생김새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붉은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 불빛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다시 자세를 바로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 혼자서 해낸 성과들은 아니네. 레벨4에서 밤낮없이 연구하는 연구원들의 도움도 중요했지. 내가 말한 엔지니어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자네도 알 것이네. 사실 그들이 하는 일은 특별한 것이 아니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지. 아주 기본적인 것들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네. 지시한 것만 할 줄 아는 자들이지. 실질적인 기술력과는 거리가 매우 먼 것들이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진짜 엔지니어들과 연구원들이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기는 하지. 그것이 바로 그들이 아르크에서 머물 자격이네. 하지만 엄연히 다른 가치를 지닌 것임을 명심해야만 하지. 생각해보게. 자네가 10명의 사람을 구하고 내가 1명의 사람을 구했는데, 사람을 구했다는 것은 둘 모두 같으니 그 대가가 똑같고 대우마저도 같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자네는 다음에 다시 사람을 구해야 할 기회가 생긴다면, 10명 모두 구하기 위해 전과 같은 노력을 하지 않게 될지도 모르네. 이 얼마나 낭비적인 일인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바츠는 그의 말을 쉽게 이해했다. 어렵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쉽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공정한 차등에 대한 것이었다. 노력한 만큼에 대한 대가를 얻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의미 없는 소모적인 일이었다. 바츠는 이미 그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반학교와 미사를 통하며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벨1에서의 삶이 그것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었다. 마티프가 절로 떠올랐다. 헌터를 막연히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궁지에 몰린 듯 유일한 답을 찾기 위한 의무감으로 느끼게 된 것도 그 이유였다. 부사령관이 말한 엄연히 다른 가치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일이었다. 바츠는 지상에서 필사적이었던 자신의 삶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코 헛된 것들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 것처럼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부사령관은 그것이 헛된 기대가 아닐 것이라는 걸 직접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바츠의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아르크에는 다양한 공로자들이 있네. 지금도 공헌을 계속해서 쌓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대표적으로 돌아온 헌터들이 되겠군. 그 공로자들이 없었다면 우린 아르크에서 살지 못했을 것 틀림없네. 모두가 지상에서 야인처럼 살아가야 했겠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는 말이네. 난 자네도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믿네. 이곳은 아직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남아있단 말이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바츠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강한 신뢰감을 느꼈다. 이미 케일리가 이곳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뿌듯했다. 바로 전진기지로 돌아가, 그곳에서 맡은 바 일을 계속해서 충실히 해야겠다는 의욕이 샘솟았다. 부사령관이 그런 바츠의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미소를 지어주었다. 다른 때였다면 의심으로 미심쩍게 느꼈을 미소였다. 당황했을 때 억지로 짓는 미소와 똑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달라보였다. 정말 그가 순수하게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믿었다. 바츠는 그를 신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사령관이 바츠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정면으로 급히 돌렸다.

바츠는 그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플라우스트러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도로 왼쪽으로 치우쳐 다가오고 있었다. 속력을 보아서는 지금까지 걸어온 쪽 방향을 향해 그대로 나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플라우스트러는 이쪽과 가까워질수록 속력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부사령관의 왼편에 마주보고 나란히 섰다. 부사령관은 플라우스트러가 멈춰 서자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바츠 역시 멈춰 서야 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아까 보았던 하얀색 정복을 입고 있던 남자와 똑같은 복장을 한 사내와 푸른색 바지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하얀색 덧옷을 걸친 사내가 내렸다. 하얀색 정복을 입은 사내가 내려서자마자 부사령관을 향해 허리를 45˚ 구부리며 말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놀라셨겠습니다.”

“놀랄 게 뭐 있겠나. 종종 있는 일 아닌가? 자네가 가는 모양이군.”

부사령관은 하얀색 정복을 입은 사내에게 짧게 대답하고는, 뒤쪽을 돌아서 한 발 늦게 다가온 하얀색 덧옷을 걸친 사내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특별히 신경 쓴 것 같지 않았지만, 밑을 향해 구부러진 눈꼬리와 위로 살짝 구부러진 입꼬리가 그의 표정을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네, 사슴이 공격했다죠? 제어 장치는 어떠셨습니까? 제대로 작동이 되던가요? 보조 장치가 역시나 필요할까요?”

그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묻어났다. 하지만 나중에는 나름 진지하게 변했다. 부사령관은 그의 장난을 유쾌하게 받아주었다.

“자네 고조부가 개발한 제어 장치가 아니었다면 사슴에게 무차별 폭격을 당할 뻔 했지. 어찌나 무섭던지,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네. 함께 일리트시의 집사가 있었기에 망정이었지 아니었다면 자네를 기다리며 계집애처럼 울고 있었을 것이네.”

그는 부사령관이 말한 무차별 폭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어깨를 들썩거리며 킥킥거렸다. 그리고 부사령관은 그런 그에게 바츠를 소개해주었다.

“아, 인사하게. 이쪽이 일리트시의 집사네. 그리고 이쪽은 타라스. 포로센코 가문의 엘리트지. 그의 고조부가 플라우스트러 개발에 기여를 했네. 그리고 그의 먼 조상이 이 아르크의 건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네. 그분이 페트로 올렉시요비치 포로센코지? 초콜릿이라는 걸 통해서 경제에 이바지하고, 한 때는 지도자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하신 분이네.”

부사령관이 한 발 옆으로 물러나며 바츠와 그가 마주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자 그가 바츠를 발견하고는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부사령관이 한껏 치켜세워준 탓인지 가까이에서 보니, 온 몸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지상에서 보았던 헌터들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자신감하고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헌터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감이 차갑고 강하게 보여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면, 그가 가진 자신감은 부드럽고 온화해서 친근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친근감 속에 담긴 묘한 기운이 그를 향해 절로 허리가 구부러지게 만들었다. 가까스로 자세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긴장하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 하얀색 정복을 입은 사내가 부사령관에게 했던 것처럼 허리를 구부릴 뻔 했다. 바츠는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너른한 여유를 느꼈다. 그는 자신감만큼 여유로움도 가지고 있었다. 헌터들 역시 여유가 넘쳐나지만 그들의 여유가 심드렁하다면, 그의 여유는 매우 살가웠다. 그 살가움이 오히려 그에 대해 존중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주었다. 그가 잡은 손을 꾸욱 잡으며 말했다.

“대단한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그 황량하고 냉혹한 곳에서 아르크의 수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죠? 집사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고맙습니다.”

바츠는 말을 끝내고 뒷걸음질로 물러나 다시 부사령관과 대화를 나누는 그를 조용히 시선으로 쫓았다. 부사령관과 대화를 하는 내내, 그는 잠시도 유쾌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부사령관은 조금 딱딱한 사람이었는데, 그 덕분에 유연한 사람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뒤로 바츠처럼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하얀색 정복을 입은 사내는 달랐다. 그는 적어도 부사령관과 비슷한 쉰 살은 되어보였는데,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앞으로 구부린 채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다. 멍한 눈이 그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현재 분위기를 어떻게든 참아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는 지금 자리가 매우 불편한 것 같았다. 바츠는 그들이 대화를 끝내고 다시 플라우스트러에 올라, 떠나갈 때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를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앉아있을 자리를 바라보며 플라우스트러의 뒷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부사령관이 그런 바츠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말게. 에이든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됐네.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쪽에서 지상을 누비던 사내였지. 누군가와 어울리는 걸 매우 어려워하고 있네. 그나마 내게는 덜한 편이지만, 다른 사람들하고는 눈도 잘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눈을 마주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흥분을 조절하기 어렵다고 하더군. 시간이 그를 본래대로 돌려줄 것이네.”

부사령관이 어깨에 올린 손을 조심스럽게 놀려 바츠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다시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바츠는 침울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그에게 헌터 슈트를 입는 것이라도 허락해 보는 건 어떤가요? 그가 안정감을 느낄 겁니다.”

“헌터 슈트? 그 검은 가죽 옷과 망토를 말하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네. 우리가 헌터 슈트를 허락하는 건 레벨6이외의 곳이네. 이곳에 죽음이 묻은 물건을 어찌 수용한단 말인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하네. 물론 그들이 입구를 지키기 위해 나설 때에는, 착용하는 편이 더 낫다는 판단으로 허락하고는 있지만...어쨌든 그 물건은 여기에 허락할 수 없네. 생각해보게. 이렇게 멋진 곳에 그런 칙칙한 검은 옷이 가당키나 하나? 하얀색 정복을 보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아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전혀 계획에 없네. 자, 이런 쓸데없는 논쟁은 말고 나와 함께 생산적인 이야기를 하세. 이쪽이네. 저기가 바로 내 집이네.”

바츠는 그들이 정작 필요할 때, 검을 휘두르기 불편하고 각종 콘솔을 사용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으나, 부사령관이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여서 그만두었다. 게다가 아까 보았던 하얀색 정복을 입고 있던 사내 둘 모두에게서 아르크의 눈이 없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떠올랐다. 바츠는 그저 입을 닫고는 부사령관이 이끄는 대로 조용히 따라야 했다.

그가 도로를 벗어나 옆으로 난 작은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성인 허리높이의 하얀색 울타리 너머로 집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지나오며 본 집 중 가장 규모가 커다란 집이었다. 부사령관은 그 집으로 바츠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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