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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감염-122화 (122/268)

< --   9. 하얀 감염   -- >         * 122화 *

색다른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타 다른 건물들과 흡사했다. 3층 건물이었고, 가장 위층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명한 유리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리를 두고 보았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다가서자 안쪽 깊숙한 곳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그만큼 채광도 많이 들었다.

바츠는 부사령관을 따라 입구로 보이는 곳에 서기 직전,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란 하늘과 새하얀 솜뭉치 같은 안개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땅속 깊은 곳에 하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것은 빛이었는데, 하늘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태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빛 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곳은 낯처럼 밝았다. 지상의 낯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부사령관이 중간에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돌아보는 바츠를 발견하고는, 바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관심을 끌며 말했다.

“정말 놀랍지 않나? 우린 아직까지도 이곳에 대해서 모두 알지 못하네. 연구원들은 물론이고 이곳의 엔지니어들이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지. 지금으로서는 레벨5에 있는 인공 태양이 동력이라는 것 밖에 알아낸 것이 없네.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간이 되면 저절로 어둠이 내리며 밤이 되고, 가끔은 비도 내린다네. 이해할 수 없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네. 하지만 머지않아 그 기술의 정체를 알아낼 일이 올 것이라고 나는 믿네. 플라우스트러가 수소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낸 것처럼 말이네.”

“수...소?”

“그렇다네. 이곳에 있는 기계 대부분은 수소를 연료로 움직이네. 인공 태양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그 전기로 이곳에 있는 물을 분해하지. 저쪽으로 더 가면 수소충전소가 있네. 그리고 에너지로 쓰인 그 수소는 다시 물이 되지. 자, 그러니 그만 안으로 들어가세. 우리가 가진 시간은 수소처럼 많지도 무한하지도 않으니 말이야.”

바츠는 그제야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한 유리문이 좌우로 비켜나며 길을 열어주었고, 바로 곧게 뻗은 직선의 통로가 나왔다. 좌우에는 칸칸이 나눠진 공간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곳에서는 각종 식재료부터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치 상업 지구를 걷는 기분이었다. 부사령관은 이곳에서 배급표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교환한다고 말했다.

“여기부터가 생활하는 공간이네.”

직선으로 이어진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또 한 번 유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을 통과하자, 그제야 가정집이라고 불릴 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진열되어 있는 꽃병과 그림, 크고 작은 인형과 책들. 대부분 벽을 조각낸 것처럼 안쪽으로 파묻혀있는 진열장과 선반 위에 놓여있었다. 지상에서 처음 방독면을 벗었을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바츠는 그 아기자기한 모습들을 살펴보며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전에 살았던 레벨1의 집에서나 지금 머물고 있는 전진기지에서나 절대 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레벨1은 낡고 허전하고 초라했고, 전진기지는 답답하고 더럽고 어두웠다. 하지만 이곳은 이제 4살 된 여자아이의 재롱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기분이 좋았다.

“이쪽이네.”

부사령관이 바츠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꽤 널찍한 공간이었는데, 방(Room)이라기보다는 집회장(Hall)에 가까운 곳이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벽은 밖을 그대로 내다볼 수 있는 유리벽이었고, 다른 쪽 벽에는 직사각형의 얇고 넓적한 물건이 중앙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었는데, 하나로 이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고, 그 공간도 나름 넓었다. 무엇보다도 전진기지에서 항상 앉아있던 그 푹신한 의자만큼 안락감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시장하지 않나? 씻고 나오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내가 음식을 준비해놓겠네.”

부사령관은 방금 전 넓은 공간을 지나서 좀 더 안쪽으로 이동한 다음에야 걸음을 멈췄다. 중간에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방을 지나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불투명 유리 앞에 멈춰 섰는데, 그가 손을 가져다대자 그 유리가 옆으로 사라지며 지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바츠는 저절로 열리는 문은 이제 많이 보아서 그다지 놀랍지 않았지만, 그 안에 펼쳐진 모습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눈에도 몸을 씻을 수 있는 욕실로 보였지만, 알 수 없는 물건과 모습들이 마구 늘어놔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단출하고 매우 깔끔한 모습이었으나, 처음 보는 물건들 때문에 바츠에 눈에만 어지럽게 보인 것이었다. 부사령관이 안쪽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안으로 들어가면 샤워를 할 수 있네. 씻고 나오게. 조금 전 중앙에 큰 테이블이 있던 곳을 기억하나? 씻고 그리로 오게. 거기서 기다리고 있겠네.”

부사령관의 손끝은 욕실 가장 안쪽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농도가 진한 불투명 유리로 부스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크기가 적어도 다섯 명이 격렬하게 움직여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전진기지의 절반에 가까운 면적의 욕실 안에서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부사령관은 그곳을 안내해주고는 바츠만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문은 다시 저절로 닫혔고, 바츠만 홀로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왠지 낯선 마음에 불안해서 다시 몸을 돌려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기다리고 있던 부사령관의 얼굴을 바라볼 때 민망해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문이 닫히고 나자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 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부사령관과 한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사령관이 나긋나긋하게 애써 목소리를 낮추려고 노력하는 것과 다르게, 그녀는 한껏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진짜 왔어요? 일리트시의 집사 말이야! 정말이에요? 정말? 진짜에요?”

“그래, 그래. 진정하거라.”

“어디에 있는데요? 지금 어딨어요?”

“멀리서 와서 지금 씻고 있단다. 그러니 진정하거라. 그런데 누구에게 들은 게냐?”

“누구에게 듣긴요, 타라스에게 들었지. 그런데 정말 달라요? 타라스가 그러던데, 집사들은 헌터랑 다르다고. 정말이에요? 정말 그 괴물들하고는 다르게, 무뚝뚝하고 차가워요? 그 괴물들은 정신이상자가 많다면서요.”

부사령관이 그녀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무섭게 대꾸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말투였다. 화가 난 사람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카르멘, 입 조심하거라. 또 한 번 그들을 괴물이라고 부른다면 그땐 따끔하게 혼쭐이 날게야.”

“아빠도 참...알았어요. 그런데 나 그 집사 볼 수 있어요? 네? 볼 수 있게 해줘요.”

그녀는 부사령관의 꾸지람에 삐죽이는 입술로 입김을 내뱉는 소리를 내고는, 달아오른 흥분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말했다. 억지로 노력하는 게 티가 나는 코맹맹이 소리였다. 동시에 둘이 부대끼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래, 그러려무나. 대신 항상 예를 갖추고 친절하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지?”

부사령관이 그런 그녀에게 단단히 이르는 것으로 대화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그녀가 즐거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부사령관과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지만, 둘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며 점점 멀어졌기 때문이었다. 바츠는 둘이 만들어내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옷을 벗고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에는 샤워기의 주둥이로 보이는 원형의 물체가 벽 중간쯤에 고정되어 있었다. 촘촘히 난 구멍으로 가는 물줄기가 여러 갈래로 쏟아질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샤워기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부스 안에 그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천장을 살펴도, 벽을 둘러보아도 뭔가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이 쏟아지도록 만드는 스위치나 코인을 넣어야 하는 틈 같은 것도 없었다. 샤워기를 손으로 툭툭 건드려보았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몹시 난감해졌다. 그저 당장 씻기 위해 적당한 량의 물이 나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고장 난 것처럼 보이던 샤워기가 가늘지만 거센 물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냥 칸막이로만 생각했던 샤워부스가 경쾌한 알림음을 내더니, 갖가지 알록달록한 그림과 글자들을 그려냈다.

바츠는 화들짝 놀라서 순간 움츠러들었다. 물줄기를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써 냉정함을 찾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부스에 드러난 그림과 글자들은 갖가지 수치와 통계들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은 그냥 깨끗한 물일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림과 글자들은 자세히 살펴본 결과, 지금 자신의 상태를 비롯해서 수온과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다. 바츠는 놀란 가슴은 진정시켰지만, 여전히 약간 긴장한 상태로 물줄기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소름끼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차가운 물이었다. 바츠는 그 물을 온몸으로 맞으며 좀 더 따뜻했다면 참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충분하다 못해 넘쳐나는 깨끗한 물로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때 집에서 끓인 물로 몸을 씻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이었다. 적은 양이어서 온몸에 묻히지는 못했지만, 가슴을 문지르고 머리를 적셨을 때의 기분은 쉽게 잊을 수 없는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그 순간 샤워 부스에서 또 한 번 알림음이 들려왔다. 처음 울렸던 경쾌한 알림음과 비슷한 단음이었다. 그리고 그 알림음이 끝나고 나자 수온이 차츰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뿌연 김이 부스를 가득 채울 정도로 뜨겁게 변했다. 너무 뜨거워서 뒤로 물러나, 물줄기를 잠시 벗어나야 할 정도였다. 그러자 금세 뿌연 김이 잦아들더니, 이윽고 물의 온도가 원하던 만큼의 온기를 지니도록 알맞게 변했다.

바츠는 다시 물줄기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도 확인했다. 누군가가 꼭 자신을 감시하며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조금 꺼림칙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심될 만한 것은 없었다. 부스 칸막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러 수치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그래도 몸을 씻는 동안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을 완전히 푼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따뜻한 물로 온몸을 적시니, 절로 나른해지며 마음까지도 편안해졌다. 특히 중간에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물과 함께 섞여 나올 때에는 긴장감이나 불안감 같은 위축되고 조마조마한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마치 추운 날 두터운 담요를 발견하고 뒤집어 쓴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이미 다 씻고 나서도 쏟아지는 물줄기를 한참동안 더 쐬고 있었을 정도였다. 완전히 녹초가 된 뒤에야 부스 안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지쳐서 나오게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하다는 것이었다. 샤워기의 물줄기는 알아서 잦아들었다. 그리고 부스의 벽면에 나타났던 각종 그림과 글자들도 처음에 울린 알림음과 똑같은 소리를 내며 저절로 모습을 감췄다. 뒤이어 레벨6에 들어오기 직전 통로에서 소독액을 맞은 뒤에 불어오던 바람과 비슷한 바람이 부스 안을 휘저었지만, 이미 그 안을 빠져나온 바츠는 무사히 피해낼 수 있었다.

바츠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도톰하고 커다란 수건을 사용해서 몸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콧노래가 생각날 만큼 흥에 겨운 상태로 욕실을 벗어났다. 출입구를 가로 막고 있던 유리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손끝을 가져다대는 것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손끝이 닿자 문은 알아서 비켜났다. 바츠는 놀라움과 더불어 매우 편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욕실을 떠나, 부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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